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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글자 語助辭(어조사)에 담긴 의미
한문 문장에는 글자의 본래 뜻과는 별도로 어조사라는 명칭으로 쓰이는 글자들이 많다. 어조사는 일종의 虛辭(허사)라고 하여 굳이 해석을 하지는 않지만 문맥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포된 의미까지 보아야 할 글자들이다.
語助辭에서 語는 ‘내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말’이란 뜻이고, 助는 ‘돕는다’는 뜻이며, 辭는 얽혀진 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뜻이다 (拙著,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 203쪽 참조). 특히 문장 말미에 쓰인 어조사는 앞서 얘기한 말에 대한 話者(화자)의 입장과 마음을 담아 마무리하는 글자이므로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이는 뜻글자만이 가능한 표현방식이다.
(1) 논어 제5 공야장편 26장에는 공자가 세상에 도를 전하는데 깊은 좌절을 겪고 “그만둘지니라(已矣乎라)”고 하였다. 종결어미로 矣와 乎란 어조사 두 글자를 반복해서 썼다.
乎는 그 속에 말이 숨어 있다고 해서 語隱乎(어은호)라고도 하며, 矣는 꼭 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하여 執語矣(집어의)라고도 하는데 決定辭(결정사)인 也보다 더 강한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已矣乎’의 矣乎는 일반적인 어조사가 아니라 語隱乎와 執語矣의 뜻이 담겨 있다. 단순히 ‘그만두다’는 뜻이 아니라 매우 강한 의지와 심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즉 공야장 제21장에 나오는 어조사 與가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공야장 제26장의 矣乎는 결의와 각오의 심경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矣에는 ‘더 이상 세상에 도를 펼 수 없기에 이제 정말 철환주유를 그만 두겠다’는 최종 결심이 담겨져 있으며, 乎에는 뒤이어 덧붙인 말인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케라(내 능히 그 허물을 보고 안으로 스스로 송사하는 자를 보지 못했노라)”와 같이 상황이 이 지경인데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반문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고향에 돌아가서 후학양성과 함께 주역 십익전과 春秋를 비롯해 만세사표가 되는 유학경전을 집필하였다.
(2) 乎
乎는 종결어미로 ‘~한데 그렇지 아니한가’라는 뜻으로 쓰는 反語辭(반어사)이자, 그 속에는 話者(화자)의 견해에 聽者(청자)도 마땅히 동의할 것이라는 뜻이 숨어있으므로 語隱乎(어은호)라고 한다.
학이편 제1장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라고 하였다. 문장의 뜻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로부터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이다.
문장 끝에 쓰인 乎를 음미하면서 재해석한다면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하는데 그대들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어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니 즐거운데 그대들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세상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인데 그대들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이다.
乎는 또한 이름 뒤에 붙여 呼格助辭(호격조사)로도 쓴다. 이인편 제15장에서 공자가 증자에게 “吾道는 一以貫之니라”를 말씀하실 때 “參乎”라고 불렀다. 乎가 호격조사로 쓰였지만 그 속에는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지?’하는 뜻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吾道는 一以貫之니라”라고 말씀하시자 증자는 머뭇거림 없이 “唯”라고 답변한다.
하지만 乎가 문장 중간에서 쓰일 경우는 ‘~에, ~에 대하여, ~보다’는 뜻으로 쓰인다. 위정편 제16장에서 “攻乎異端이면 斯害也已니라(이단에 대하여 공격하면 이에 해로울 뿐이니라)”가 이에 해당된다.
(3) 矣
학이편 11장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三年을 無改於父之道라아 可謂孝矣니라”하였다. 뜻은 ‘삼년을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어야 가히 효라 하니라’라고 해석하지만 어조사인 矣를 함께 새긴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삼년동안 아버지의 도를 조금도 고침이 없어야만 효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矣는 문장의 끝에 두고 앞서 한 말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어조사이다. 그러므로 矣는 也라는 결정사보다 강한 뜻을 내포하여 말을 꼭 집었다는 뜻에서 執語矣(집어의)라고 한다.
또 한 예를 든다면, 학이편 제3장에서 “巧言令色이 鮮矣仁이니라”이라고 하였다. ‘교언영색을 하는 자 가운데 어진 자는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여기서 ‘鮮矣仁(드물도다, 인이여)’는 본래 ‘仁鮮矣’라고 해야 하나 문장을 倒置(도치)하여 드물다는 뜻을 강조하였고, 執語矣까지 덧붙여 ‘매우 드물다, 거의 없다’는 강조용법으로 쓴 어조사이다.
(4) 也
也는 공자가 주역 64괘 384효에 ‘象曰’이라고 풀이하면서 두 곳을 제외한 모든 문장의 끝에 붙인 말이며,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이기도 하다. 也는 ‘익기 야, 잇기 야, 입겻 야’로 부르는 어조사로 문장 말미에 붙어 ‘더 이상은 없다, 이것으로 마친다’는 뜻이 내포되어 決定辭(결정사)라고도 한다.
공야장 제9장에서 낮잠 자는 재여에게 공자가 “朽木은 不可雕也며 糞土之牆은 不可杇也니(썩은 나무는 가히 아로새기지 못하며 썩은 흙으로 친 담은 가히 흙손질하지 못하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문장 말미마다 也를 붙여서 뒤에 오는 “於予與에 何誅리오(재여에게 무엇을 나무라리오)”를 더욱 강조하는 뜻이 담겨 있다.
곧 ‘썩은 나무에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절대적으로 매끄럽게 흙손질 할 수 없듯이 바탕이 이미 그런 사람에게 나무란다고 고쳐지겠는가? 고쳐질 수 없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한편 논어 곳곳에 공자가 제자들의 이름을 들거나, 제자들이 문인들의 이름을 들어서 말할 때 也를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맹무백이 제자들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을 때 “由也(자로는)” “求也(염구는)” “赤也(공서화는)”라고 하고, 공자 또한 똑같이 이름 뒤에 也를 붙여 대답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꼭 그 사람’을 지칭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由也”라고 할 경우 ‘유라는 그 사람은’이라는 뜻이다. 역시 결정사로 쓰인 것이다.
(5) 哉
焉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앞에서는 부사로 쓰이고, 문장의 뒤에서는 의문이나 감탄, 반문 등의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부사로는 ‘비로소, 처음’라는 뜻으로 ‘哉生明(달의 밝은 부분이 처음 생긴다는 뜻으로, 음력 초사흗날을 가리킴)’ ‘哉生魄(달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음력 열엿샛날을 가리킴)’이 대표적인 예이다.
의문과 반문의 뜻을 담고 쓰는 경우는 위정편 제10장의 “人焉廋哉리오 人焉廋哉리오”에 잘 나타나 있고, 감탄의 뜻을 담고 있는 경우는 팔일편 제4장에 잘 나타나 있다. 임방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었을 때, 공자는 ‘아직도 이런 곳에 관심을 갖고 묻는 사람이 있구나’하고 감탄한 나머지 “大哉라 問이여”하고 먼저 말을 꺼낸 뒤 답변하였다. 주역 乾괘의 '大哉라 乾元이여'의 '哉' 또한 감탄사로 쓰였다.
(6) 也已
也는 어조사로 결정의 뜻이 있고, 여기서 已(그칠 이, 이미 이, 뿐 이)는 也 뒤에 붙어 앞말의 내용을 온전히 강조하여 ‘다만 그러할 뿐이다, 이미 그렇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학이편 제14장 “可謂好學也已(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르니라)”와 위정편 제16장의 “斯害也已(이에 해될 뿐이라)”를 예로 본다면, 앞의 문장은 ‘~라면, 이미 배움을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뒤의 문장은 ‘다만 해로울 뿐이다, 굳이 이단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숨어 있다.
(7) 焉
어조사로 쓰이는 말 가운데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 중 하나이다. 焉에는 ‘어찌, 이, 이에, 여기’ 등의 부사로 쓰이는 외에도 문장의 종결어미로 의문과 가정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위정편 제10장의 “人焉廋哉리오 人焉廋哉리오(사람이 어찌 숨기리오, 사람이 어찌 숨기리오!)”와 공야장편 제10장의 “焉得剛”에서 焉은 ‘어찌’라는 뜻의 부사로 쓰인 말이고, 학이편 제14장의 “就有道而正焉이면(道있는 데에 나아가 바르게 하면)”에서 焉은 가정의 의미로 쓰인 어조사이다.
문헌들을 보면 焉이란 글자의 어원에 대하여 ‘새 조(鳥)’ 혹은 ‘까마귀 오(烏)’에서 찾는데(拙著,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 544쪽), 이로 비춰보면 焉은 正 + 鳥(혹은 烏)가 결합된 글자로 ‘바르게 날다(나아가다, 말하다)’에서 ‘어찌, 이’ 등등의 뜻으로 轉化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결어미로 쓰이는 焉은 ‘정말 그렇다면’이라는 가정의 의미로도 쓰이고, ‘그럴까’라는 의문사로 쓰인다. 천자문의 마지막 문구인 “焉哉乎也”에서 焉과 哉도 ‘이는’과 ‘비로소’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천자문의 대미를 종결짓는 의미가 된다.
(8) 與
① 공야장 제21장에서, 공자는 더 이상 세상에 도를 펼 수 없음을 알고, 철환주유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양성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고 하였다. 이때 쓰인 문장이 “歸與歸與”이다.
‘與’가 종결어미인 語助辭(어조사)로 쓰일 때는 해석하지 않아도 무방하나, 이 문장의 與에는 與 본래의 뜻인 ‘더불어’ ‘함께’ ‘그리고’ ‘~와’ ‘주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철환주유를 함께 했던 제자들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후학들에게 마름질하는 도를 가르쳐주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② 학이편 2장의 유자가 말한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孝弟라는 것은 그 仁을 하는 근본인저!)”라는 문장의 與도 어조사인데, 이 與에는 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효제와 더불어 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③ 학이편 제10장에서 자금이 공자의 정치와 관련하여 자공에게 한 질문인 “求之與아 抑與之與아(구하심인가? 아니면 주심인가?)”에서의 與(문장 끝 글자) 역시 어조사이다. 즉 이 與에도 ‘(벼슬자리를) 구하려고 그들과 함께 하신건가, 아니면 (정사를 들려)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하신건가?’에서 보듯이 ‘함께’라는 與 본래의 의미가 담겼다.
(9) 思
시경大雅 抑편의 “神之格思(신지격사)를 不可度思(불가탁사)온 矧可射思(신가역사)아(신이 이르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싫어하랴)”라는 문장에 나온다. 子思가 중용에 인용한 시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思는 모두 어조사로 쓰였기에 굳이 해석하지 않지만 話者의 마음 상태가 담겨있는 글자이다.
가령 사람이 눈을 뜨고도 깊은 것은 보지 못하고, 귀로 사물의 소리는 들어도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즉 앞 문장에서 어조사 思의 뜻은 제사를 지내는데 신이 오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신이 있느니 없느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헛일이니, 또는 귀신이 먹고 가겠느니’ 하면서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깊이 헤아려 보라고 강조하는 의미에서 ‘思’를 어조사로 세 번 쓴 것이다.
(10) 爾已矣: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뜻이 담긴 어조사
공자가
자신이 당대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에 대해서는 ‘내
어찌 감당하리오(吾豈敢)’는
겸양의 표현을 썼다. 반면에
‘성인과
어진 자의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則可謂云爾已矣’라며
조심스러우면서도 반복과 강조를 통해 단호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리
말로야 ‘곧
가히 이를 만할 뿐이라’고
해석하지만, 이
말로는 원문에 담긴 조심스런 말투와 강조와 반복의 의미를 담아 내지 못한다. 즉
‘則可謂云爾已矣’에는
공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배여 있다.
則(곧
즉)에는
두 말할 필요없이 ’바로
그렇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可는
‘가히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긍정의 의미이다. 謂는
충심으로 이른다는 말이다. 云은
띄워서 즉 다소 고양된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따라서
‘則可謂云’은
‘두
말할 필요없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爾已矣’에서
‘爾’는
‘가깝다’는
뜻의 어조사이다. ‘已(~뿐이며)’는
爾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다. 矣는
‘말을
꼭 집어서 하다(執語矣)’는
뜻의 어조사로 ‘분명히
그렇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爾已矣’는
‘내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한 단어나 어조사만 써도 뜻이 이루어지는데, 굳이
공자는 여러 단어와 어조사를 썼다. 그만큼
공자가 ‘爲之不厭’과
誨人不倦‘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출처 : 『논어 易解』1, 2권,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易解』
출처 : 『논어 易解』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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