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오후
김명숙
비가 내린다. 봄비 치고는 빗줄기가 굵고 차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런데 마음엔 감사가 조용히 흐른다. 그냥 이 상황이 좋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오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비어있는 시간,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건강이 감사하고, 비가 내리지만 낡은 우산이라도 내 머리 젖지 않게 가려주어 감사하고 내가 몸을 쉴 수 있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게 감사이다. 그리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했는데 네 아이들 가지에 바람이 자고 있어 감사하다.
한동안 아들 녀석의 방황 때문에 힘들어 할 때 내 자존감을 형성하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들이 대학에 안 가겠다고, 군대에 다녀와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을 때 나는 무너져 내렸다. 나는 고등학교를 일하면서 공부하는 산업체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자신과 싸우면서 공부를 하여 대학에 가고 늦깎이로 대학원까지 학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아들은 공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다 채워주겠다고 하는데, 그냥 편히 공부만 하면 되는데 하지 않겠단다.
그때부터 나 자신과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내려놓음과 포기 사이에서 씨름을 했다. 아들을 포기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호적에서 파내고 싶었다.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자문하고 자문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식 교육 잘 못 시킨 엄마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적어도 아들이 명문대에는 못 갈지라도 서울에 있는, 인 서울을 했다는 소릴 듣고 싶었고 그래서 아들로 인해 내 체면이 세워지길 원했다. 보잘 것도 없는 체면이 더 깎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물론 아들이 잘 되면 좋겠다는 표면적인 바람도 있었지만 마음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은 나를 위한, 내 만족을 위한 것이 더 컸다. 그러나 아들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의지대로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회와 부딪치며 스스로를 키워가는 것이 더 맞는 것이다. 이웃집 아들이었다면 아마도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라고 쿨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내 아들의 이야기이고, 내 일이다 보니 생각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생각 같아서는 호적에서 파내고 너 집 나가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내고 싶었지만 이성이 나를 막아섰다. 이성과 감성의 싸움이 몸까지 앓아눕게 했다.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우면서 내 자존감의 근본을 생각하게 했다.
내려놓음, 아이를 신뢰하는 것, 그 아이 안에서 살아계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지금은 미래가 없어 보이지만, 아직 그 아이 인생이 다 끝난 건 아니라며 자위했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겠다고 혼자서 외로이 자신과의 씨름을 하고 있을 그 아이…. 엄마가 반대하는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얼마나 혼자서 힘이 들까…. 친구들 다 가는 길이 아니라는 그 것 자체만으로도 힘들 텐데 게다가 엄마마저 반대를 하고 있으니…. 잘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집 나가라고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 아인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임을 아프게, 아프게 깨달아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 앞에 그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 씨름을 하면서 자존감의 본질, 내 존재의 근원을 보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였던가. 모래위에 내 행복을 쌓으려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잘 될 때 얻어지는 평판 하나- 행복 하나, 아이가 잘 못될 때 주어지는 평판 하나-불행 하나, 남편이 잘 나갈 때 주어지는 평판 하나-행복 둘, 남편이 무너질 때 주어지는 평판 하나-불행 둘…. 이런 식으로 껍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방황하면서 애써 쌓아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마치 벌거벗은 것 같은 나를 만났다. 깊은 수렁이었다.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놓아가고 있을 때, 저 깊은 곳에서 뜻밖의 단단한 바위를 만났다. 반석이었다. 그 위에 처참한 내가 서 있었다. 안전했다. 죽음 같은 고통을 지나 일어설 수 있도록 단단히 받쳐주는 디딤돌, 반석, 하나님….
내가 나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분의 은혜였다. 그 분으로 인해 내가 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을 채워주시는 분, 만족함과 평안을 주시는 분, 나를 가장 나 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가장 잘 아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 그 분이 나를 잡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도록…. 결국 그 힘을 의지하여 일어섰다. 아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하 웃으며 잘 해 보라고, 엄마 아빠가 응원한다며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아들 마음이 기적같이 바뀌었고 지금은 제 갈 길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다.
봄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오후, 커피를 다 마시고 팡세를 접는다. 언제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긴다. 미리 염려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혼자만의 시간. 오늘 같은 날은 날씨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 마음 가득 흐르는 잔잔한 감사가 꽃바구니 향기처럼 달콤하다.
허풍을 빼고 나면
집이 난장판이다. 늦둥이들이 엎어놓은 장난감통과 장난감들, 벗어놓은 양말과 옷들, 책상위에 널린 책과 볼펜들, 식탁위의 컵과 싱크대에서 내 손길 기다리고 있는 그릇들, 컴퓨터 안에서 기다리는 튜티들…. 모든 걸 멈추고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너저분한 책상 위 책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남편이 들고 온 꽃바구니 올려놓았더니 아낌없이 향기를 내뿜어 준다. 꽃바구니에 대한 예의로라도 집을 청소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멈추어 있고 싶다. 마음이 원하는 것에 집중해 주고 싶다. 쉼과 커피 한 잔과 여유! 그리고 파스칼의 팡세를 펼친다. 읽다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거나 공감되는 부분이 있고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한다.
허영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졸병이나 미장이도, 요리사나 짐꾼도 허풍을 떤다. 그리고 자기에게 감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철학자들조차도 그것을 원한다. 비판적인 글을 쓰는 사람도 잘 썼다는 명성을 얻고 싶어 하고 그들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읽었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어쩌면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도….
내 안에도 허영심이 너무나도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가끔씩 허풍을 떨거나 떨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 20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살아오다가 시간제 일이긴 하지만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전공을 살려서.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사람들에게 자랑 좀 하고 싶은데 체면상 차마 드러내놓고 자랑을 못했다. 대신에 엄마와 시어머니께 첫 월급 탔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용돈을 드렸다. 두 분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셨다. 어찌되었든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나보다.
얼마 전 일이다. 모임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남자들이 자신들은 실적이 늘 스트레스이고 제일 힘들게 한단다. 그래서 나도 거들었다. 실적 정말 어렵다고 하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대충 얼버무려 말을 했다. 돌아오는 길 마음이 씁쓸했다. 누군가 내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허풍을 떨고 난 다음 일어나는 씁쓸한 후회….
함께 있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는 욕심이 허풍을 불러 오고 때론 본연의 나를 들킬까 봐 움츠러들게 한다. 명예욕이 강한 걸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어쩌면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명예욕일지도 모른다고 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말 그럴까? 난 단지 쓰고 싶으니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일하면서 공부하는 산업체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죽기보다 싫었던 야근을 하면서 차라리 감옥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도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 때 채워지지 못했던 욕구가 지금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모를 일이다.
허풍을 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나일 때 가장 생동감 있고 우아하게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아이의 엄마요,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 비록 잘 쓰지는 못하지만 뭐 어떤가. 못 쓰면 못 쓰는 대로 내 마음이 즐겁고 가족들이 읽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 글을 쓰면서 살아갈 때 참 행복할 것 같다. 집안 곳곳 폭탄을 맞은 듯 난장판이어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면 그것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