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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은혜가 망극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온 세상에 로마서 3장 21-26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나타난 사실을 전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우리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고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원합니다.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힘을 주시고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온 세계적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세세토록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샬롬! 최근의 글들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영문으로도 올리니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의 사람이 다 볼 것으로 믿습니다. 읽으시고 크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롬3:21-26)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정받는 이신칭의
(Righteousness from Faith)
지금 상황에서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은
이런 사실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David 목사
하나님 나라(天國) 첫 강의 목차
제목: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의
목차: 1. 서문
2. 성경본문- 로마서 3장 21-26절, 로마서 5장 8절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1) 하나님의 사랑
2) 구원
4.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
1) 그림.
2) 하나님의 의.
3) 이신칭의에 대해서
(1) 이신칭의의 성경적 근거. (2) 하박국과 아브라함의 예.
(3) 칭의의 주체-하나님 과 나. (4) 칭의의 객체- 죄인인 인간.
(5) 칭의되는 믿음에 대해서.
(6) 칭의 된 믿음의 도표
5. 찬양, 간증- 사도행전 2장 37-38절의 말씀이 이루어짐
1) 찬양
2) 간증
3) 요약
1. 서문
고달픈 인생! 내가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느끼어진다. 왜 나는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빛이 한줄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허덕이며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가족도 내 탓을 한다. 정말로 내가 무능해서 이 세상이 이렇게 버거운 것일까?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고 공부도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뒤에 처져 있는 것인가? 나에게는 희망도 없고, 돌파구도 없는가? 내 주변의 누구도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홀로 이 우주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나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버겁게 사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내가 아직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 탓만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나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복을 주시는 가장 권세가 강한 분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겸손히 이를 인정하고 이 관계만 바로 잡으면 나는 모든 짐에서 해방이 될 수가 있고 자유롭게 될 것이다.
사람 편에서 틀어버린 관계를 바로잡고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보내셨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주범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를 짓는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인 피를 흘림과 죽음을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도록 하셨다.
모든 인류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나도 역시 예외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죄는 마음으로 짓는 죄도, 양심을 어기는 죄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을 어기는 것도 모두가 죄이다.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고 그분의 법도 모르고 산 나는 사실 밥만 먹으면 죄를 쉬지 않고 지었던 존재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이제 이런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문제의 원흉인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분의 아들을 나 대신에 희생시키신 것이다.
이제 이런 나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잡히게 되어 죄로 인해서 내가 홀로 지고 살던 모든 짐에서 해방이 된다. 사망의 굴레도 벗게 되고 저주의 문제도 해결이 된다. 마음이 치유 받고 기도가 상달이 되고 믿는 모든 사람과 형제가 되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예수님을 주로 모시게 된다.
이제 인생의 모든 짐을 다 벗어 던져도 된다. 해방을 노래하고 자유를 소리쳐도 된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 진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도 받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은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다.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서 자유를 누리자
예수님을 믿기로 했으면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거나 혹은 성경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나를 좌절케 하고 나를 실패하게 했던 과거의 잘못된 행위들을 끊고 새롭게 살기를 바란다. 더 깊은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알기를 원하는 분은 뒤의 글을 읽기 바란다.
이 작은 책자는 영어로 번역이 되어 온 세상의 사람이 다 보게 될 것이고 동영상을 만들어서 영어로 한국어로 설명을 할 것이다. 읽게 되는 많은 분들이 위로 받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고 주님께 즐겁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표지를 천국으로 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로 천국을 설명하니 한자로 표시를 했고, 두 번째 페이지에서 이 책을 통해서 나눌 하나님의 은혜의 제목을 적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그 타이틀로 정했는데 이는 로마서 3장 21-26절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를 선포하는 로마서 5장 8절을 본문으로 설명할 것이다.
흔히 십자가 하면 예수님의 대속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죄인인 인류의 대한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틀림이 없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와 함께 로마서 3장 21-26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데 역시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을 통해 설명한다. 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건에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의가 동시에 나타나 있음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성도의 의에 대한 인정을 본문과 본문에 등장하는 하박국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주체인 하나님과 그리고 인정을 받는 객체가 되는 인간 즉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의 어떤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의가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도표로 알기 쉽게 모두가 한눈에 보도록 표시했다.
우리는 모든 분들이 한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의를 잘 인식하고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먼저 해야 되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문제에서 해방이 되는 삶의 길로 한 분도 빠짐없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도한다.
2. 성경 본문- 로마서 3장 21-26, 5장 8절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개역개정)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공동번역)
21. But now a righteousness from God, apart from law,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22. This righteousness from God come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23.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24.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25.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
26.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NIV)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개역개정, 공동번역, NIV)
2-1 성경 본문의 설명(로마서 3장 21-26절)
로마서 3장 21-26절은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글로도 이해가 쉽지 않다. 그리고 영어 성경도 역시 그 표현을 다양하게 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반드시 올바로 이해를 해야 된다. 이 구절 속에 하나님의 사랑도 있고 하나님의 의도 있고 이싱칭의도 있다. 그리고 구약이 들어 있는데 예언서와 율법서로 표현이 되어 있다. 아울러서 구약의 제사 제도가 성막, 제물, 제사장, 피 흘림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성경을 과학 중의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은 어떤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설명하며 이를 이론화한 것으로 증명이나 검증이 가능한 이론의 집합체를 말한다. 성경은 이런 과학에 비추어서 모든 면에서 정확한 과학 중의 과학이다. 성경을 읽고 정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면 할수록 성경의 글자 한 자 한 자가 다 진리로서 우주와 인간과 그리고 역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한다. 내가 이런 과학적인 성경을 아직도 믿지 않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렇게 정확한 성경을 무슨 원인으로 내가 읽지도 않고 있고 읽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고 읽으면 누구나 성경이 진리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본문 21절은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과 별도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의는 율법서와 예언서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율법이 의에 대해서 규정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온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율법이 추구하는 정의나 평등, 혹은 공정 그리고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의 모습이 아니라 예언서 즉 하박국서에 그리고 율법서 즉 창세기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한 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의로서 인종, 국적,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얻게 되는 의라는 것이다. 이 의는 율법이 추구하는 의와 완전히 다른 믿음을 통해서 오는 의인데 이 의가 하박국서 2장 4절에 그리고 창세기 15장 6절에 예언이 되었다는 것이다
23절은 아담의 죄로 에덴에서의 영생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인류가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담의 죄와 우리가 살면서 짓는 자범죄로 인해서 우리가 죽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24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의 표현이 동시에 있는 십자가 사건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 해도 의롭게 될 가능성이 1%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25절은 성경이 과학 중의 과학임을 증거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의 이해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구약에 기록된 동물의 피를 흘리는 제사는, 피가 생명이며 죄의 대가는 사망으로서 피 흘림이 없이 용서가 없기에, 죄를 지은 자가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그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오직 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만 이렇게 죄의 용서의 길을 열어 주셨는데 이 제도를 율법으로 규정하고 율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었다. 구약의 의미가 여기에서 유래된다.
누가 죄를 지으면 제사법에 따라 흠 없는 짐승을 성막에 가져가서 제사장과 함께 율법에 정해진 규정대로 피를 흘리고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 그 사람의 죄가 용서가 되었었다. 이 율법의 규정대로 예수님께서 똑같이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것이 대속이며 예수님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속죄를 한 것인데 이는 피를 흘려야 죄를 속할 수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이 된다. 즉 이런 제사 제도에 대한 믿음으로 또 이런 제사 제도의 원형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가 화목케 되는 제물이 예수님께서 되셨다는 것이다.
25절의 끝부분의 이해가 참으로 중요한데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를 온 세상에 나눈다. 이 진리을 나누는 것은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를 길이 참으시며 쉬지 않고 감동하시고 격려하시고 깨닫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의 사랑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며 성령의 감동임을 고백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이유를 설명하는데 영어 버전을 통해서 이해를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전에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죄에는 합당한 벌이 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인데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모든 인류를 그냥 보시기만 하고 바로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로 설명한다.
여기서 간과는 용서와는 의미가 다르다. 용서는 완전히 죄를 없는 것과 같이 한다는 의미이지만 간과는 죄에 대한 벌을 유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피를 흘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이제 이를 믿는 사람들을 완전히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경은 가히 과학이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지 않으시고 죄인인 모든 인류를 죄에 합당한 벌을 바로 내리셨다면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하면 이미 죄에 대해서 벌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분명히 말을 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이미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처벌을 받아서 몸이 망가지고 재산이 날아가고 명예가 실추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지은 죄가 용서가 된다고 하는데 이미 벌을 받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과연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하고 반드시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항의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서 오는 인내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내가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서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이로 인해서 모든 죄로 인한 처벌에서 자유하게 되니 얼마나 내게 복된 소식이 아닌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의해서 새롭게 살게 된 사람들이다. 이를 전파하고 찬양함이 당연하지 않는가? 25절 하반부에 영어 성경은 분명하게 과거에 지은 죄를 벌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의를 나타내셨다고 하는데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벌을 반드시 내려야만 하나님의 정의가 실행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자신의 아들이 대신 받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벌을 반드시 내리시는 정의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26절은 하나님께서 이제와서 이렇게 즉 위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 것은 자신도 의로우신 분이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영어 성경도 참고를 해야 하고 공동 번역도 참고를 해야 되는데 모든 번역이 이렇게 해석을 하도록 도왔다. 성경 정리 공부법을 오천만의 로마서에 소개를 했는데 이 공부법이 이렇게 의미를 찾아가는 길잡이가 되게 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위해서 25년 전에 방문했을 때 어떤 수험생이 테리 홀의 파노라마 성경을 소개해 준 것도 하나님의 인도함이다.
그 책 속에 테리 홀이 성경을 읽고 정리하는 법을 소개를 했는데 장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도 잊고 성경 정리에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계속해서 성경을 정리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이다. 나는 게으르고 무지하고 제 갈길로 가고자 쉬지 않고 몸부림쳤고 그리고 때로는 심각한 죄도 지었던 하찮은 인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본문을 이렇게 설명을 드리는데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리라 믿는데 이를 바탕으로 더욱 올바른 이해로 모두가 전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깊이 이해하고 온 세상을 품고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기원한다.
2-2 성경 본문의 설명 (로마서 5장 8절)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이 페이지를 마지막으로 기록한다. 먼저 파워포인트로 27페이지를 완성하고 컴퓨터로 카피를 하는데 로마서 5장 8절의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확실한 증거에 대해서 글이 빠졌음이 보인다. 5장 8절로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데 그 순간 별로 떠오르는 말들이 없다.
그 순간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며 책을 한 권 가져다 준다. 그는 군산 늘 사랑 교회 교인이다. 어제 내가 쓴 부활 전도 책자를 한 권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도 선물로 한다며 제목이 “하나님의 광야 학교” 이고 저자는 고영환 목사님으로서 군산 늘 사랑 교회 위임 목사님이시다. 나는 책을 준 것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주신 분이 나가자 곧 읽어 보았다.
책의 87페이지에서 98페이지를 읽는데 곧 눈물이 난다. 주신 분으로부터 그분께서 책을 출판했을 때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고 책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들었었다. 내가 책을 읽어보니 목사님께서 자신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리고 재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직 어릴 때 버스에 깔려서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반인이 한 번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목사님께서 두 번이나 겪으실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목사님께 아들을 눈 앞에서 잃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제 이해가 되느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당부하시길 목사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상한 마음도 반드시 전해주기 바란다고 하셨다 한다. 이 책은 만 삼천원의 작은 책자인데, 모든 분이 사서 읽어 보시면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인 할 수가 있으리라 믿는다. 참으로 완벽한 타이밍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5장 8절은 관련된 구절과 함께 이해를 해야 되는데 로마서의 핵심 구절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의로운 이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고 희생하는 이가 거의 없는데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우주에 어디에 있겠는가? 나로서는 너무나 이 사랑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을 느낀다. 나보다는 고명환 목사님께서 아들과 아내를 잃는 경험을 하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보다 더 깊이 이해하셨으니 그분의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더 절절히 이해하길 부탁을 드린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들의 사랑을 늘 묵상하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욱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고 기도이다.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의 말씀을 하루에도 쉬지 않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변의 분들을 따뜻하게 사랑함이 우리 모두의 변치 않는 사명이며 의무임을 굳게 믿는다. 로마서의 깊고 넓은 바다 속으로 이신칭의의 얕은 이해를 넘어 모든 성도가 힘차게 나아가자!!!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1
십자가 하면 생각나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모두가 빨간색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빨간색 무슨 관련과 사연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이는 나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 빨간색으로 나타난 것인가? 빨간색은 단심이라 하여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빨간색과 가장 급히 연결이 되는 것은 피다. 피가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빨간색이고 이는 피로 표현이 되었고 이를 다시 십자가로 표현을 왜 했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빨간색의 피와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피는 생명이고 피가 없으면 죽음이다. 그래서 자신의 피를 흘리는 것도 위험하게 생각하고 타인의 생명을 해하는 일은 피를 흘려야 한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피로 그리고 십자가로 왜 나타난 것인가. 십자가 하면 떠오는 첫 사람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참혹한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이는 사실이다. 십자가도 예수님을 나타내시고 성경도 신구약이 예수님을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져야 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장사 후에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모든 이를 심판하시고 재림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약속대로 예언대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계시며, 요한복음은 세상의 창조주가 예수님이라고 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이시고, 빛이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라 한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피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 아들을 피를 흘리고 죽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이다(롬 5:8) 어떻게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사랑해서 바치시기까지 하셨을까
이는 우리의 죄 때문이다. 죄는 지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만 해결이 되는데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아들을 피를 흘리고 죽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신 이기 바로 예수님이시다. 누구든지 이 아들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되고 문제가 해결이 된다. 나의 유일한 살길이다. 우주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고 최강의 복되고 기쁜 소식이다. 먼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자.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됨)―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3.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구원 2
십자가도 사실이고 예수님도 사실이다. 이 순신 장군을 보지 못해도 믿는 것은 기록과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온 세상의 수십억 명의 사람이 다 믿는 것은 그분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은 예수님의 생애를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분을 본 사람과 믿는 사람이 증거하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그 수를 늘리면서 지금까지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도 진리이고, 사랑이시고 정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시작이 된 것이고 누가 사람이 상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누가 한 사람을 속일 수가 있고 여러 나라를 속일 수가 있고 그리고 수백 년을 속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과 많은 나라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속일 수는 없다. 거짓은 시간이 가면 곧 탄로가 나고 모든 사람이 거짓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구약은 4천 5백 년, 신약은 2천 년 동안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가 온갖 수를 다 써서 이를 부인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성경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과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게 오랫동안 믿고 있는데 이는 성경이 틀림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줄기차게 증가하고 있고, 온 세상이 다 예수를 믿으니 이를 거짓이라 말하는 것은 오리려 내가 너무나 잘못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우리의 주를 믿는 것이다. 그분의 본래의 모습과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과 그리고 그분의 재림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죄인인 나도 너도 그리고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성경을 검색하면 수백 개의 구절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쓰임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원을 성경의 검색을 통해서 정리를 해 보면 어떤 사람을 어떤 곤경에서 건진다라는 의미가 있으니 이는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건진다라는 말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해방한다란 말로도 쓰이는데 죄로 인한 죽음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유 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회복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이는 역시 죄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를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죽은 사람을 살린다 라는 의미도 강하게 있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살게 창조된 인간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누구나 죽게 되는데, 이런 죽음에 이른 사람을 살려서 영원히 살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구원은 높인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죄로 인해서 수렁에 빠지고 깊은 지옥 갈 우리를 건져서 높인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백성의 삶과 영광스러운 지위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은 승리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는 인간을 꾀어서 죄를 짓게 하고 지옥으로 인도하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긴다는 뜻이다. 마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낸다는 의미이다. 이 외에도 고친다, 문제를 해결한다. 등 여러 가지 의미가 복합된 말로서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잘 이해를 해야 된다.
예수님을 통한 우리의 구원은 죄로 인해서 죽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되고 그래서 소망이 없던 우리를 이와 같은 구원의 의미로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 죽음을 극복하고 죄의 사슬에서 자유 하게 되고 낮은 저주의 자리에서 영광스럽게 높여지고 그리고 모든 마귀의 궤계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진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나의 구원을 점검해야 한다. 의롭게 인정을 받는 이신칭의는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삶, 혹은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그 사람에게 인정하시는 놀라운 은총이기 때문이다. 의롭게 되는 것도 믿음이지만 구원을 받는 것도 역시 믿음으로 인함이다. 앞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고 이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난 즉 피 흘리심과 십자가 대속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성도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식하고 죄에 대해서 겸손하게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절차에 따라서 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예수님 이름의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게 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령을 기다리게 된다, 때가 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틀림없이 임하셔서 이 사람을 능력으로 살게 하신다. 이렇게 성도가 믿음의 생활을 성령의 인도로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하나님의 때에 의에 대한 인정을 어떤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할 이신칭의이다.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행위는 삼위 하나님의 합작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완벽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이상 좋은 것이 절대로 없다. 모든 인류가 죽도록 꿈을 꾼 영생을 누린다. 그리고 공자가 그토록 듣고자 했지만 듣지 못한 도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했다.) 즉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최선의 복이다. 내가 노력으로 명문대를 가고 내가 노력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잘 살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구상의 사람이 다 공평하게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해야 된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인식해야 된다. 내가 의로우면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 예수님이 나와 상관이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죄인임을 인식한 인간이 해야 되는 일이 회개이다. 회개는 나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 나의 과거의 삶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삶에서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마음의 다짐과 함께 과거의 죄에 대한 통회와 함께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이 필요한데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사람은 틀림없이 이런 행위가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믿음 속에 있는 행위의 요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아들 되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 이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그리고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 성도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선물로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능력을 주신다. 이렇게 겉모양을 그대로 두고서 속 사람을 새롭게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창조물(피조물)이라 부르시고 또 자신의 작품 즉 하나님의 작품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여기까지 이해를 해야 한다. 물론 교회에서 교육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는 필수이다.
4.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 그림
4-1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인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은 한계가 없다. 진시황은 죽지 않는 약초를 구하러 온 세상에 사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거대한 무덤을 건설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거대한 피라미드를 사후에 자신의 부활을 위해서 사막에 건설했다. 모든 권력자가 영생을 위해서 할 수가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모든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 돈과 시간과 모든 열정을 다 바친다. 이 작은 문서가 그 길을 틀림없이 그리고 부족함 없이 알려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오직 5분의 시간을 절대로 아깝게 생각지 말기 바란다.
위의 그림은 앞에서 설명 드린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상과 그리고 이를 믿고 의롭게 되는 성경구절이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과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피를 흘리고 독생자가 죽어야만 구원이 되는 우리 인간에 대한 설명이다.
십자가에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어주신 사랑으로 나타난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 그분의 의가 어떻게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는지 보자
하나님께서 사랑이시지만 그래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내어 주셨지만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심은 성경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다. 그분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하는 법인 율법은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의는 올바름이며 공정함이기도 하지만 또한 죄에 대한 벌과 심판으로 나타난다.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성경의 정의이기도 하고 세상법의 정의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게 된 운명에 처해졌다. 오직 자신의 피 흘림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런 인간을 사랑하셔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마땅한 죽음의 형벌을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받도록 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 죄인 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의 실행이 인간이 죄로 인해서 완전한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시고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셨으니 이 벌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지시고 묵묵히 그 부끄러움과 고난과 죽음을 맞으셨으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예수님께서도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참혹한 십자가의 중한 짐을 지신 것이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어 흘러내리도록 기도하셨다. 끝내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고소되고 총독 빌라도의 사형 판결로 십자가를 어깨에 메시고 골고다로 향하셨다.
그곳에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달리셔서 운명하셨다. 실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창에 찔리시고, 우리를 화평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장사한지 사흘 만에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려 재림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나타났으니 이를 통해서 믿는 우리는 의롭게 된다.
그리고 정의는 모든 권력자를 비롯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또 하나의 가치이다. 불의한 자나 국가나 단체는 온 세상의 지탄을 받고 생존을 할 수가 없다. 개인도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죄로 낙인이 찍히면 인생이 바로 끝이다. 회복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인간과 국가와 단체는 정의를 표방한다. 그 정의 그 의를 바로 나도 받아 누릴 수가 있으니 이는 바로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인간과 국가와 단체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가장 우주에서 높으시고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이다. 내가 살인을 했든, 간음을 했던 도적질을 했든 속였던 폭행을 했던 세상의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내가 누구도 덤빌 수가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 내용을 설명하고자 위의 그림으로 표현을 했는데 가운데는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는 성경 말씀을, 그리고 오른쪽에는 나를 사랑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왼쪽에는 나와 너 우리 모든 인간의 본 모습을 설명한다. 그리고 정의로우신 가장 높으신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어떤 죄를 지었던 상관없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믿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그 믿음을 담는 나의 참된 모습, 죄인 된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살펴 볼 것이다. 길지 않다.
아울러서 500년 전 로마서 1장 17절의 구절을 보고서 당시에 믿던 분들을 각성시키고, 이렇게 500년이 지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개신교 신자들이 믿을 수가 있도록 온 세상에 설명 하신 개신교의 선진들 캘빈과 루터의 혁신적인 도전이 있었기에, 우리도 그 주장을 따라서 성경의 더 세밀한 부분을 살피게 된 것이다. 나의 믿음의 선배(앞서 믿은 분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잘난 채 한 태도들은 성경을 이해하는 큰 은총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오천만의 로마서의 글 중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바로 잡을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단절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큰 육체적인 고통으로 알게 되었다. 안다고 뻐기던 나의 못난 모습들을 회개한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후학(믿음의 후배)은 그분들의 생명을 건 도전이 있었기에 성경의 새로운 부분이 열리고 나와 같은 영광에 약한 후배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렇게 세상에 이신칭의의 의미를 더욱 세밀하게 전하는 것임을 고백한다. 스스로 못남을 증명한 아직도 배움의 여정에 있는 가난한 목사는 위대한 믿음의 선진과 지금 죽을 힘을 다해서 주님께 충성하며 목회하시는 모든 목사님께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한다. 관대한 마음으로 친구로 받아 주길 기도한다.
※이신칭의의 이해의 심각한 함정/ 칭의의 앞과 뒤를 자르고 오직 믿음만 강조함
① Rom 1:17.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17. εγενετο δε μετα ημεραςτρειςσυγκαλεσασθαι τον παυλον τουςονταςτων ιουδαιων πρωτουςσυνελθοντων δε αυτων ελεγεν προςαυτουςανδρεςαδελφοι εγω ουδεν εναντιον ποιησαςτω λαω η τοιςεθεσιν τοιςπατρωοιςδεσμιοςεξ ιεροσολυμων παρεδοθην ειςταςχειραςτων ρωμαιων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② 위대한 캘빈과 루터는 성경속에서 로마서 1장 17절의 Righteousness from faith라는 위대한 신학적 교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오는 의를 통해서 개신교를 열고 천주교와 다른 신앙을 추구했다.
이 위대한 선각자의 뒤를 이어 우리는 이 문구의 앞과 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혀야 하는데 다행하게도 우리는 한국에만 한국어 버전 5개, 그리고 영어 버전 수십 개의 성경을 갖고 있다. 한글을 알고 영어를 조금만 알면 이 문구 앞에 그리고 뒤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누구나 확인이 가능하다. 이를 올바로 이해함이 천국에 가는 길이다.
③ 이신칭의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로 피는 생명이다. 피가 없으면 사망이다. 마찬가지로 죄는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 그런데 짐승의 피를 통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용서받았다. 이 예표에 따라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셨다. 그리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십자가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죄인인 내가 이 피를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임을 믿을 때 이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받게 된다. 이 믿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을 때 죄의 용서가 있고 그리고 성령께서 선물로 오신다. 이신칭의는 이렇게 된 신자가 한결같이 믿음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칭의를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절차 없이 칭의가 절대로 없다.
의인을 부르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시다. 죄인을 부르려 오셨고 내가 죄인임을 인식한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이다.
내가 죄인임을 인식한 사람의 첫 반응은 회개 이다.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 없고 성령 세례도 없고 칭의도 당연히 없다. 내가 회개했는가?
칭의의 복을 논하기 전에 나를 검토해야 한다.
④칭의의 앞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다.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 앞 부분은 그러하다면 뒷 부분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신칭의의 성경적인 해석이다. 캘빈과 루터가 깊이 살피지 못했으면 후학인(후배) 우리가 살펴야 한다. 로마서 1장 17절 후반부는 하박국서 2장 4절의 인용이다. 하박국서 2장 4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로서 의인들은 당시의 불의가 판을 치는 현실속에서도 남유다와 바벨론을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당시의 의인은 이 믿음으로 사는데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이 말의 의미는 당시의 악을 행하는 이들과 다르게 정의롭게 하루하루 산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다시 이 의에 대한 율법서의 예를 창세기를 들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다 한다. 이에 대한 구절은 로마서 4장 3절과 4장 17-22절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믿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때까지 모든 여건이 갈수록 아들을 낳을 수 없게 악화되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런 변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를 종합하면 25년의 한결같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할 때 이를 척결하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신약을 사는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이 아무리 물질이 넘치고 또 사랑이 식어 냉랭해도 그리고 불의가 만연해도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이를 심판하고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에 대해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의를 인정하실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이신칭의의 올바른 이해이다
이전의 이신칭의를 주장하시는 분은 1+2를 강조함 3+4는 우리가 새롭게 살펴봄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1) 성경적인 근거
※ 먼저 인간이 백날 소리쳐도 근거가 없는 말은 소용없다. 인간의 말이 아닌 거짓이 조금도 없으신 신실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보자. 성경은 읽어보면 아는데 모든 과학 중에 최고의 과학으로 일 점 일 획 틀리는 말이 없이 정확하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성경의 흠을 발견하는데 도전했지만 결점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그 정확성이더 밝혀지고 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개정) 믿음의 삶 혹은 생활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공동번역)
로마서 1: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개역개정).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공동번역)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개역개정)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공동번역)/25년 믿음
생활을 철저히 함
로마서 4:17-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개역개정)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하셨습니다.”(공동번역) 약 25년간 변치 않는 믿음을 보시고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개역개정)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공동번역)
Hab 2:4 but the righteous person will live by his faithfulness.
Rom 1:17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Gen 15:6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Rom 3:22 This righteousness is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Rom 4: 22 This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Rom 4:24 but also for us, to whom God will credit righteousness- for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 믿음의 행동성, 믿음의 시간적 연속성과 굳셈/ 믿음과 믿음의 삶 혹은 생활이 반드시 필요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2) 하박국과 아브라함의 예
1. 하박국의 예: 하박국서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표현이 있다. 이를 바울 사도가 로마서 1장 17절에 인용해서 믿는 사람이 의롭게 됨을 설명한다. 하박국은 구약의 선지자로 기원전 608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당시 남유다는 홀로 멸망치 않고 남아 있었는데 참고로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홀로 남은 남유다는 하나님보시기에도 선지자가 보기에도 올바르지 않았다. 율법이 해이해져서 정의가 사라졌고 하박국 같은 의인이 살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다.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한 하박국이 정의의 하나님께 묻는다.
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남유다를 그냥 보시고만 계시느냐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당시 가장 강대하며 온 나라를 침략해서 노략하던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에 하박국은 다시 하나님께 비록 남유다가 악하지만 이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어찌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까? 하고 여쭈니 이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배우는 하박국서 2장 4절의 말씀이다.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 의미는 1장과 2장을 연결해서 보아야 하지만 여기에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을 절대로 옳다고 보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그렇지만 자신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 하박국서의 내용을 그대로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 1장 17절에 인용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설명한 것이다. 하박국서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는 비록 남유다가 불의하고 소망이 끊어져도 그리고 바벨론이 조국 남유다를 심판하는 참기가 어려운 현실이 닥쳐오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결국 심판하시고 정의를 마침내 실현할 것을 믿고 세상이 어떠하든지 정의롭게 견디며 살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모든 여건이 어려워도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의를 척결하실 것을 믿고 정의롭게 꿋꿋하게 살 것이다란 뜻의 행동하는 믿음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의 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위대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데 또한 신약의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곳으로 갔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늘의 별과 강의 모래를 보여주시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와 같이 많게 될 것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을 하셨다.
이를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용을 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예를 들었다(롬 4:3) 이와 함께 다시 로마서 4장 17-22절에서 이 믿음을 다시 설명한다. 그가 100세가 되어서도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한다. 비록 자신의 육신은 점점 약해지고 아내도 날이 갈수록 아이를 가질 수가 없을 정도도 늙어갔지만 말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를 의롭다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이삭을 아들로 낳는 복을 누렸다. 이 이삭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로마서 4장 17-22절의 내용을 두 가지 버전으로 소개를 한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공동번역)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개역개정)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3) 칭의의 주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나인가
※ 성도를 의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가? 혹은 믿는 개인인가?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개정)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공동번역)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개역개정)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공동번역)
롬 4:17-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개역개정)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하셨습니다.”(공동번역) 약 25년간 변치 않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하늘과 지구와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유일하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이 사랑이시기에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정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예수님을 통해서 받게 하셨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모든 만물이 스스로 된 것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이 되었다. 나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인간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의무이다. 모든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이 하나님께서 하박국서 그리고 창세기 그리고 로마서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하박국서에 등장하는 의인들에게 의롭다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성도의 칭의에 대해서 그 칭의를 결정하시고 선언하시는 분이 믿는 개개인이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인정은 루터와 같은 신학자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어떤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의롭다 인정을 하신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혹은 하박국 시대 의인들이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스스로 혹은 주변의 사람이, 그 사람이 의롭다 할 수가 절대로 없다.
비록 그가 의롭게 살고 믿음 생활을 잘 해도 말이다. 그리고 혹 누가 그렇게 했다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인지 우리는 확신 할 수가 없다. 의로움에 대한 판단은 사람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니 차별이 없으니 라는 표현은 믿는 사람이 인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의롭게 된다는 말이지 내가 스스로 내 의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 전에 주장할 수가 있다는 말이 아닐 줄 믿는다. 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성도의 칭의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내 스스로 나는 의롭게 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서 칭의의 대상이 되는 믿는 우리 즉 칭의의 객체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를 하도록 해보자.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4) 칭의의 객체: 죄인인 인간
※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보며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죄인인가 의인인가?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내가 그런 죄를 짓고 있는지 혹은 지은 적이 있는 사람인지 분별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절대로 쉽게 알 수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감옥에 가고 벌금을 물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때만 죄인이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즉 국법을 준수하고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서 위와 같이 법의 처족을 받지 않고 살고 있다면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도리어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믿고 산다. 과연 나는 나의 생각대로 의로운가?
죄는 형법에 규정이 되어 있다. 법 없으면 죄 없다라는 죄형 법정주의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만든 법에 여러 규정을 해놓고 이 법의 규정을 위반하거나 범하면 죄인이 된다는 원칙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이 있다. 이 법을 어기면 하나님 편에서 보는 죄인이 된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된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다고 하신다. 즉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인이요' 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에게 자신이 죄를 범하는지 아니 범하는지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각 사람 모두에게 있는 양심이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우리를 찌르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는 양심을 통해서 스스로가 죄인인지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양심도 우리가 계속 죄를 짓게 되고 자신을 속이게 되면 무디게 되어서 죄에 대해서 둔감하게 된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 아담이 이를 따 먹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전가 되게 되었다. 이 죄로 인해서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지금과 같이 살다가 죽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쉬지 않고 성경에 있는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 살고 있으니 이 죄는 스스로 짓는 죄 곧 자범죄이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죄에는 심판이 있고 그 벌은 죽음이며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는 그 믿음 속에는 나의 죄에 대한 인식과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의인이면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전혀 없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칭의에 대해서도 논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사람 사이에서 죄인이라면 내가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고 이는 나의 회개로 시작이 된다.
회개는 지금 나의 가는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베드로 등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어부였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며 배와 그물과 잡은 고기와 자신의 가족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에 달리심과 운명하심을 직접 보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직접 만났고 그리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성령을 기다렸다가 선물로 받고 능력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전도나 혹은 개인 체험이나 혹은 성경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만나고 나를 위해서 피 흘리고 죽으신 구세주로 만나게 되면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리고 이제는 주가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면 된다.
이렇게 과거에 예수님도 성경도 모르던 삶에서 생각에서 행동에서 떠나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당신이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의 인도하심 대로 사는 것이 회개이다. 처음부터 많이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순종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있는 자리에서 이제는 내 뜻대로 사는 것을 버리고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회개이다. 이렇게 하면서 성숙한 성도로 자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잘 따라가다 보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는 예수님의 복 주심을 따라서 내가 홀로 살면서 이루고자 했던 것과 비교도 되지 못할 일들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우리를 주님께서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때론 어려움도 있지만 이도 나를 더욱 신앙인으로 멋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기에 두려워 말고 끝까지 예수님의 손길을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5) 칭의되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는 믿음에 대한 설명
믿음은 히브리서 11장에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정의되어 있다.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도 하고 죄로부터 구원도 받게 되는데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박국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보자.
1. 하박국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박국서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 즉 불의한 남 유다를 바벨론을 통해서 멸하시고,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시 가장 강대국 바벨론도 결국 멸망시키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끝내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 세상이 의인이 살기에 너무나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이런 세상에서 모든 악을 멸하시고 결국에 의인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루하루 불의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굳굳하게 정의롭게 사는 하박국과 같은 사람들이다.
2.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믿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그가 부르심을 받고 25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고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된다. 즉 아브라함의 시간적으로 변치 않는 믿음에 대한 의의 인정이다.
3. 신약의 시대 성도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이다.
성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예수님께서 하신 일-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일, 부활 승천과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이 세상에 재림하실 예수님과 하실 일을 믿고서 믿음으로 삶을 사는 것. 즉 불의와 싸우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삶을 삶. 이렇게 성도가 살 때 칭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어느 때에 이루어짐- 회개, 예수 이름 세례, 죄 사함, 성령 선물 그리고 믿음 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어느 때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의롭다 하실 것임/ 정의로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4. 결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성경의 주장이기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의롭다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예에서 보듯이 한결같이 믿음 생활을 25년 정도는 해야 했다. 하박국서에선 의인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을 믿고서 정의롭게 살아야만 되는 것을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변치 않는 신앙생활을 성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어느 때까지 반드시 해야 되고 반드시 또 행동으로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다.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면 성도는 먼저 믿음 생활을 아브라함의 예에서 보듯이 시간이 가도 믿기가 어려워도 하나님을 변치 않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의와 공도를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로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을 실천해야 된다. 하박국서의 예에서 보듯이 불의가 만연한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이런 세상을 척결하고 반드시 좋은 세상을 만드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세상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과 그분이 건설할 천국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꿋꿋하게 정의롭게 우리가 살 때 언제나 우리에 대한 의의 인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2 이신칭의에 대하여
(6) 칭의 된 믿음의 도표를 통한 이해
예수님, 하나님 만남, 영접 | 회개 | 예수 이름 세례 | 죄 사함 | 성령 선물 | 칭의가 일어남 |
초대 교회 성도- 직접 예수님 만남, 성령 체험을 함 | 예수님 따름 | 예수님께 제자, 요한 | 일어남 | 마가 다락방/ 3년 후(행 2장) | 예수님 만나 믿고 적어도 3년 후 |
바울-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심 | 예수님 따름 | 아나니야를 통해 | 일어남 | 아나니야를 통해서(행 9:17) | 구약의 하나님을 믿은 후 수십 년 뒤 |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심 | 75세 고향, 본토 아비 떠남 |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으로 밝히심, 행하여 완전 하라고 명하심 (창17:1, 18:19, ) | 약 100세가 되어 하나님 만난 후 25년 뒤 | ||
하박국- 구약의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킴 |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서 정의로운 삶을 살면서 당시 불의한 동족의 삶을 보면서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함 | 하나님을 믿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 | |||
정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동일, 그러나 그 대상인 믿는 사람과 그 사람의 믿음의 내용이 각각 상황에 따라 다름 |
(7) 믿음, 이신칭의 객체, 의의 흉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즉 이신칭의는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시간과 과정과 그리고 인내와 즉 믿음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에 대한 인정도 나의 스스로의 인정이 아니라 신학자나 목사의 나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나를 의롭다 인정하시는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인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시와 때는 그리고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할 때 반드시 착용해야 되는 의의 흉배는 성도의 올바른 삶인가 혹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를 통해서인가 하는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의의 흉배의 의는 이신칭의의 의로 본다. 의의 흉배는 심장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우리가 반드시 착용을 해야 된다. 이신칭의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속적인 믿음 생활 즉 믿고 정의롭게 사는 삶을 통해서 온다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면, 나의 믿음으로 오는 의에 의한 심장을 보호하는 흉배는 언제 나에게 착용이 되는지 참으로 궁금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흉배가 나를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내 심장을 보호해 줄 수가 있는 흉배인데 그 흉배의 기능에 대해서 분별이 필요하다. 가령 군인에게 방탄 조끼를 나누어 주는데 정품과 불량품을 동시에 주고 모양만 같게 하면 이를 모르고 입고 전투에 나갔을 때 총알이 날라 올 때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그리고 그 흉배를 얻어 입는 방법이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서 온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 위의 설명과 같이 제대로 알고 믿어야 된다면 나는 과연 이런 흉배를 입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입지 않고 있는가? 만약에 내가 입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성능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기를 소망한다.
5 찬양, 간증, 요약
1) 찬양
할렐루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죄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다 여기던 죄인을 불현듯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김 성수 장로님께서 전해준 성경 말씀을 보게 하시고 흉악한 죄인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 때까지 옳다고 믿고 살던 삶의 길에서 완전히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묵상하게 하시고 실천하려고 몸부림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과 말씀을 배우며 성경석 목사님을 통해서 장유 반석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1991년 5월 19일). 그리고 제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림동 선민교회에서 박기수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득 채우시며 나타나셔서 입으로 빨간색의 불을 제 가슴에 뿜어 주셨습니다. 제 가슴에 작은 촛불과 같은 불꽃들이 보이고 손에 땀이 나면서 누군가 예수를 믿는 분이 아프면 제가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도 같이 왔습니다. 그리고 행정고시 2차 준비 중이었는데 이도 잊고 3일 동안 천국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1992년 2월 중)
그 때 주께서 목사가 되라고 명하셔서 약 19년 뒤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늘 불순종하고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저를 길이 참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정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사도행전 2장 37-38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주님께 불을 받은 후 훨씬 나중에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잠실교회와 모든 성도들, 천국에 가신 어머니와 홀로 사는 남동생, 그리고 제 처를 통해서 많은 사랑을 받게 하시고 도움도 받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저보다 사랑이 크시고 한결같은 믿음의 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무능하고 변덕스러운 자가 이렇게 온 세상에 주님의 진리를 전하니 그 은혜를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참고 사랑하며 도운 잠실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제게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께 주께서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김성수 장로님의 가족을 기억하시고 성경석 목사님과 가족들을 축복하시며 박기수 목사님과 선민교회 식구들이 모두가 건강하게 하나님께 충성하시길 빕니다. 홀로 사는 동생이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께서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 땅에 건설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약한 자를 들어서 쓰시는 강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세세토록 찬양 받으시길 빕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나라를 간단하고 줄여서 설명, 상금 500만)
행 2: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7. When the people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heart and said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Brothers, what shall we do?“ 38. Peter replied,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forgiveness of your sins. And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개역개정, 공동번역, NIV)
2) 간증
샬롬! 성령 받은 주님의 도구인 저 David 목사는 세상에 흩어져 사는 성령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 뜻을 행하는 모든 믿음의 형제에게 위로와 평강을 빕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우리는 어두운 세상과의 전투에서 다시 힘을 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형제가 성령을 받고 전합니다. 믿는 성도가 세상에서 가장 우선해서 해야 될 일이 전도이고 이를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고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돈에도 재물에도 세상의 영광에도 큰 관심이 없고, 심지어 주변의 사랑도 때로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곤고합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이 여김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만인이 나에게 대적으로 덤비는데 때론 사람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에게 막무가내로 덤빕니다. 이는 내가 절대로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흠이 없어서 입니다. 우리가 의의 흉배를 하나님께 받아서 마귀와 대적하기에 이를 싫어하는 어둠의 세력이 약한 심령을 꾀어서 우리에게 대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론 가족이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만나기도 꺼려 합니다. 세상은 하박국 시대와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어디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품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교회는 나를 싫어합니다. 이유가 없이 우리를 싫어합니다. 모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주님의 백성이 역사적으로 이런 고난을 겪고 옥에 갇히고 순교를 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순교는 일부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슬람 제국과 북한 그리고 복음의 전파를 싫어하는 국가에서 믿는 이들을 박해를 합니다. 이분들이 가장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유를 지니고 조금 고난을 받는다 해도 이들을 위해서 도리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참된 형제가 되었으니 이들의 고난을 잊고 자유를 다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임을 확인하고 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모든 것이 자유롭지만 가난하고 미움 당하고 배척당하고 그리고 때론 악의 세력에 악으로 대적할 수가 없어서 숨을 죽이며 살고 그리고 몰래 눈물도 흘리며 살고 있는데 약 3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집도 없고 모은 돈도 없고 그리고 직장도 자주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도 앞에서 고백한 대로 저를 도우신 분들이 많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약 37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 오셨을 때 저는 성경도 교회도 그리고 진리도 아무것도 모르던 매일 죄만 짓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흉악한 죄를 지었고 짓고 있었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다 여겼던 사람입니다. 저는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분들께도 사랑을 하지 못했던 냉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이런 글을 전하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제게도 많은 고난과 시련과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난이 유익이고 징계가 있어야 아들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저는 저도 모르게 잘못 갈 때 큰 고난을 통해서 제 잘못을 알고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마도 제 글을 보신 분은 조금 안다고 너무나 잘난 체 하는 저의 글을 보시고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저의 못난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못 알고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가 있는데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속히 바로 잡고 그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믿는 분들에게 그런 용서가 없었다면 온전히 살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베드로도 바울에게 심히 책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를 바로 잡으면 되고 그 잘못에서 속히 돌이키면 됩니다.
저도 여러 번 그렇게, 하고자 하던 일에서 속히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잘못된 것의 바로 잡음이고 잘못한다고 제거가 아니라 돌이킴임을 믿습니다. 캘빈이나 루터는 이신칭의를 발견함에 위대하고 우리는 이를 더욱 발전시키면 됩니다. 이분들과 단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분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더 깊은 이해로 가면 됩니다. 그리고 조금 다르다고 분리하면 아니 됩니다. 사랑은 분리가 가장 큰 고통이기에 서로 참으면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도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서로 조금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한 형제는 품고 오래 사랑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세상의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예수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할 줄로 굳게 믿습니다. 이런 주님의 뜻이 온 세상에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히 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우리도 모르게 점점 자라서 크져 가고 있고 누룩과 같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쉬지 않고 성장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믿고 힘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내용들은 세상을 완전히 바꿀 성경의 새로운 이해라 믿습니다.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줄 믿습니다. 값없이 그냥 받아서 누릴 수가 있습니다. 감동이 있으신 분은 이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서 온 세상에 전하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동영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가장 큰 도움입니다. 저도 모든분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사역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부탁을 드립니다. 곧 동영상으로 만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늘어날 믿는 이들이 천천이 만만이 될 줄 굳게 믿습니다. 늘 참으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사랑과 우리 주 예수의 오래 참으심과 함께 하심을 찬양하고 늘 감동을 주시는 성령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David 목사
3) 요약
이제 이 글을 온 세상에 전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로마서 3장 21-26절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의는 믿음으로 오는 의가 인데 구약의 모세 오경 즉 율법 중에 창세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오는 의가 있고, 예언서의 하박국서를 통해서 오는 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이신칭의 입니다. 아브라함의 한결같은 25년의 믿음이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된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고 마음대로 산 사람이 아니고 의롭게 공도를 행하면서 믿음도 변치 않고 하나님을 어떤 상황에도 잘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하셨기에 그의 행동이 완전하도록 정의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면서 믿음 생활도 했을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본받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의롭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절대로 아님을 성경을 읽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의도는 민족의 조상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은 틀림없이 맞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치 않고 오직 믿는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아브라함을 절대로 의롭다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그 부르심의 목적을 아브라함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이를 불순종하고 불의하게 살고 공도를 행치 않고 세상의 사람과 같이 구분이 없이 거룩하게 살지 않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에 그러셨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대노하시고 절대로 절대로 순종치 않는 거짓된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참으로 의롭구나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정말로 악을 너무나 미워하시고 정의롭게 사람이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믿기 바랍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정의롭게 사는 믿음이 의롭게 되는 믿음임을 앞에서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다시 반복하면 남유다의 상황이 불의가 만연한데 멸망을 받을 정도로 정의는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의롭게 사는 하박국은 너무나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어려워서 차라리 동족을 멸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는 악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이 심판의 도구로 선택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강대국도 더욱 악해서 바벨론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페르시아를 통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모두가 악합니다. 행위가 올바른 자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누구입니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멸망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바벨론도 멸망시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박국과 같이 악을 미워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을 참지 않으시고 심판을 행하십니다. 의인의 숨통을 죄어 오던 남유다의 왕과 고관과 대작과 그리고 모든 불의한 자들이 죽음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고 그 가산이 다 풍지박산이 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의인을 괴롭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고 역시 더 센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이 됩니다. 이제 소망이 없던 당시의 약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보입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악을 행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집과 땅을 빼앗았던 무리가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죽고 포로가 됩니다. 바벨론의 느부 사라단이 모든 토지를 다 이제는 가난한 농군들에게 넘겨 줍니다.
이렇게 악한 세력을 초토화시키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는 자가, 당시에 살던 악한 이들과 같이 역시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이렇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계심과 능력을 절대로 믿지 못하는 무리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의를 척결하시는데 왜 이를 참지 못하고 악의 세력에 동조를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자신도 악을 행하게 되면 역시 악의 세력이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데 말입니다. 분명하게 성경을 이렇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믿음대로 악한 세력을 멸하시는 장면을 당시를 살던 예레미야가 똑똑히 봅니다. 그리고 하박국 당시 악한 그들이 누리던 토지와 집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처리를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하박국서가 쓰여질 때에서 약 20년 뒤에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 악을 행하던 세력이 너무나 사랑한 동족이기에 예레미야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다
렘 39:1.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2.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3.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4.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5.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6.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10.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절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악하기 때문에 동족이, 이웃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두려워서 어떻게 악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악하게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고 살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잘 읽어 보시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악을 멸하실 때에도 자비를 베푸셔서 의인은 구원하십니다. 남겨진 그루터기도 그러하고 나라가 망해도 다니엘과 에스겔 같은 분은 여전히 포로가 되어 가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높이심으로 존귀하게 됩니다.
의인이 피를 흘리고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받아 주실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의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은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사명을 절대로 면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세우고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로서 성령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롬 14:17) 정의는 어디서 확보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지켜지는 곳입니다. 율법이 틀림없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질서가 있으니 평안하고 그 평안이 있는 곳이 희락이 넘치는 곳이 됩니다. 성령 안의 의미는 성령을 받고 자발적으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서 사랑을 실천을 통해서 율법을 잘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서에 이를 잘 설명했습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6.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27.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그런데 이 칭의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동시에 나타난 십자가를 통해서 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서 오는데 피를 믿음으로 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피흘림이 없으면 죄의 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 이를 믿는 우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 과정이 있습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과학인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온 세상에 사는 사람이 짓는 죄에 대해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벌을 주시지 않고 정말로 정의로우신 하나님 편에서 참기는 어렵지만 길이 참으십니다. 이렇게 하셨기에 모든 인류의 죄를 간과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야먄 하십니다. 그 죄는 분명하게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아니라 과거에 지은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에 반드시 죄의 댓가로 죽어야만 하지만 또 그렇게 죽는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게 된 인류일지라고 살면서 또 죄를 짓는데 이에 대한 벌을 바로 실행치 않으시고 유보하신다고 하십니다. 물론 죄로 인한 저주도 유보하실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잠시 유보를 합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죄로 인해서 에덴을 잃고 엉컹키가 나고 남녀가 수고하면서 살아야 하는 지금 우리가 사는 땅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이 자체가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비록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또한 구원을 얻을 희망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즉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구원에 대한 논의도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나는 정해진 수명대로 살면서 내가 희망하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며 에덴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완전히 죽고 영벌을 처하게 되는 죄의 벌이 지금 집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그렇습니다. 이렇게 먼저 우리 모두의 과거에 죄에 대해서 묻지 않으시고 간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인을 했든, 강간을 했든, 혹은 도적질을 했든, 폭행을 했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시고 인류의 죄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열어놓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드러납니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됨을 얻게 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의 간과를 통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를 죄에 합당하게 벌을 주셔서 우리를 바로 죽게 했다거나 혹은 재산과 신체적인 손해를 겪게 하셨다면, 즉 우리의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간과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온 인류가 평안하게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합당한 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무리 죄를 용서받을 길을 제시하셔도 이미 죗값을 치른 자들을 별로 호응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얻는 이익이 별로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죄를 간과하시니, 즉 처벌하지 않고 내가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려고 간과하고 기다리시니, 내가 이제 속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엄청난 죄의 대가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간과하신 내가 지은 모든 죄들을 결국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소망이 조금도 없는 나는 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완전히 간과하신 후에 완벽하게 벌을 주시지 않고 용서해 주실 놀라운 은총을 우리 주 예수님과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베푸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인 인간이면서도 나는 죄가 없소! 나는 의인이요! 하고 주장하고, 또한 자신을 살리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다면, 이제는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는 영벌을 향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는 이런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이미 간과가 있으시고 예수님께서 오시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완전히 간과하던 죄들이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완벽한 용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세상은 또 법으로 사형으로부터 죄를 벌하게 정해 두고 있어 죄를 지은 인간에게 벌을 주는 것은 피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박철웅 씨 같은 경우는 금당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가 되어서 사형을 집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수감 중일 때 복음을 받아들여 완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에게 예수님을 잘 전해서 믿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글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회개하신 모습이 보이고 영적으로 너무나 높은 경지에 있음이 보입니다. 저는 세상이 그분께 손가락질 하나 그분께서 천국에서 전도의 큰 상을 받고 영원토록 잘 사실 것을 믿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만 아니라 원수였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으로 누가 누구를 정죄할 자격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심으로 자신이 정의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을 자신의 아들이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며 받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보고 우리는 분명히 장래에 하나님께서 악을 행한 자 즉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대로 죄 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실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악은 절대로 결국에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그 심판이 최후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어서도 피해 갈 수가 없는 심판이 존재하고 있음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죄는 피 흘림과 죽음 이외에는 피해갈 길이 우주 전체를 다 뒤져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서만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회피하는 자들은 이런 하나님과 예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희생을 거절하는 자로서 어떤 소망도 없이 심지어 이를 인식도 못 하고 살다가 영벌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의 조금 잘 되는 것을 우리가 본다해도 절대로 절대로 이런 운명에 처해질 이들을 부러워할 일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도 의로우신 분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려 하심을 분명하게 로마서 3장 21~26절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는데 두 가지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의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의의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심판을 즉 인류 모든 사람의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심판 즉 처벌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행하심으로 나타내신 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있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의의 발로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대속의 죽음을 믿으므로 죄를 용서받게 되고 의롭다 인정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도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믿음이고 또 정의롭게 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사는 성도를 때가 되면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의롭다 인정을 하심을 또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신칭의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앞 부분의 역사적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므로 죄를 용서받게 되고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도 십자가에 있음을 간과하면 큰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고난을 생각지 않고 오직 믿음의 구절만 생각할 때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오직 믿음 구절 뒤의 그 세밀함을 살펴보지 않고 오직 믿음만 생각할 때도 큰 문제가 생깁니다. 즉 믿음의 앞 부분과 뒤 부분을 건너뛰고 중간에 있는 오직 믿음만 생각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음을 이번에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직 믿음 구절 앞과 뒤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성령님의 인도 아래 성경을 읽고 정리하고 전도하고 주변의 도움과 기도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6.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대해서 인간의 체험으로 이해된 내용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의에 대해서 제가 느낀 것을 전합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의 마음을 작은 짧은 세월을 사는 인간이 어찌 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그분의 은혜로 제가 직접 체험한 일로 전합니다. 성경에도 어떤 선지자는 결혼을 두 번이나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체험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정말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인간이지만 망극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입은 자로서 온 세상에 전합니다. 저의 체험을 통해서 모든 분이 정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이 세상에서 정의롭게 그렇지만 사랑을 또 잘 실천하시는 모든 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오천만의 로마서를 통해서 제가 받은 은혜와 그리고 성경 정리 그리고 전도에 대해서 글을 올린 지 약 4년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80개국에서 약 30만 정도의 분들이 제 카페와 블로그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약 1년 전에 80개국이었으니 100개 나라는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제 글을 읽어 보신 분은 제가 처음과 지금의 모습이 다름을 알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 성령을 받고 전도하면서 세상에서 너무나 악을 많이 보았습니다. 청소, 생선, 과일, 야채 장사, 그리고 경비, 재활용품 수거, 농사 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하려고 하지 않는 일들을 은행에서 나온 지 약 40년에 걸쳐서 했습니다. 물론 대학 대학원을 다니며 행정 고시를 공부한 시간도 포함이 되지만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고 난 후 전도하면서 옳고 그름이 분별이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때론 너무나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고 격분하곤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직장이라 그냥 참고 사는데 속에서는 분이 넘쳤습니다. 부당한 곳에서 일을 하다가 잘리기도 하고 스스로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목사 안수를 받고 12년을 일반인과 같이 일을 하는데 제가 목사임에도 목사로 인정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제가 하는 일을 숨기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모두에게 친절한 모습을 하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저는 보았습니다. 물론 대부분 예의를 지키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법이 있는데 누가 마음대로 살면 법에 처촉이 되고 직장에도 직장의 규율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법을 어기지는 않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렇게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게 살다가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신칭의에 대해서 개신교인이 접근하는 것과는 처음부터 약간 다른 자세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접근을 했으니 죄는 함부로 절대로 지으면 되지 않고 무제한의 용서는 없고 용서도 내가 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분의 뜻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아주 조심하는 편이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행정고시를 1차에 붙고 2차에서 1점 차로 떨어지게 하시고 신학을 하게 하신 연고로 국가나 법이나 혹은 경제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은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정의에 정말로 갈급해 있었는데 모세 오경의 율법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경 정리를 통해서 모든 성경을 다 정리를 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모세 오경도 잘 읽고 이해를 해야 정리를 하기에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법을 배우고 행정학을 대학원까지 나온 저도 레위기 등의 법은 접근하고픈 마음이 잘 생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좋은 글들을 읽게 되고 조금씩 접근을 시도해서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성경 정리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모세 오경을 그렇게 공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도 않고 세상의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성경을 오랫동안 읽고 정리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을 것인데 이 모든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셨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미군 부대에 약 8년간 근무하면서 영어를 배워야 했고,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도 조금 생겼습니다. 김현철 예비역 대령님의 인도하심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령님의 노후가 더욱 풍성해지시고 모든 가족과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컴퓨터도 아내의 교통사고를 통해서 배우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고 정리하는 즐거움을 하나님께서 늘 주셨습니다. 재미가 있는 일은 누가 말려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최근 약 4년이 넘게 온 세계에서 많은 성도들이 저를 열심히 배우게 도와주셨는데 이곳을 방문하고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다 저를 응원해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한 분 한 분이 다 제게는 너무나 힘이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는데 큰 즐거움을 늘 주셨습니다.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모든 하시는 일들이 잘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쉬지 않고 약 800편이 넘는 긴 글들을 단숨에 쓰게 된 것입니다. 제가 율법을 만났을 때 한줄기 큰 희망이 저를 감쌌습니다. 제가 그렇게 배운 자로서 세상의 밑바닥이라 할 수가 있으면 있는 곳에서 불의를 참으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이 살고 있었는데 성경의 율법은 이런 저를 너무나 크게 위로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제가 겪은 불의한 세상은, 성경적으로 그리고 성령을 받고 초대교회와 같은 세상을 꿈꾸는 자로서, 자본주의 공산주의 미국, 중국 등 모든 나라와 함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추구하는 나라는 너무나 질서가 있고 모든 사람이 살기에 좋은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의롭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표현해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세상에 주신 법이 율법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난 어떤 목사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줄이면 법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고려대 법대 출신 성도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려 법을 주셨는데 그 법이 성경이다. 이 대답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 말인지 모릅니다. 저도 처음 그 목사님께서 제게 성경에 대해서 물으셨을 때 너무나 많은 단어들이 생각이 나서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그렸습니다. 그러자 답이 법이라 가르쳐 주시고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하신 분이 딱 한 분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서울대를 나오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성경이 법이다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그 목사님께 되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지나서 제가 율법을 배우니 정말로 그 말이 맞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은 약 25년 동안 정리하다 보니 다 했는데 모세 오경은 법임을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가 다 압니다. 그리고 그 법으로 이스라엘이 산 역사의 기록이 역사서입니다. 그 법의 규정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게 되자, 남북 이스라엘이 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가서는 이런 역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지혜의 말씀의 기록이고, 예언서는 오실 예수님과 그분이 세우고자 하는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당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스라엘과 주변국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도 율법과 완전히 관계가 있으니 율법이 해이해지면 선지자들이 나와서 율법을 지킬 것을 명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구약이 그렇다면 신약은 율법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신칭의를 논하기 전에 반드시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말씀과 당시의 율법학자들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그 정신 즉 사랑과 신의와 그리고 정의를 생각하며 잘 지키는 율법학자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조문에 몰두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 율법학자와, 그리고 법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자신이 율법을 없애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작은 조항이라도 지키면서 그 조항을 조항 조항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자 즉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잘 지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아주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구약과 똑같이 분명하게 아주 중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저도 율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자 곧 이 블로그와 카페를 통해서 제가 이해한 것을 글로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기존의 이신칭의로 무장한 분들에 대한 공격도 심심찮게 했고, 특히 교회에서 학교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했고, 이분들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회에 대해서 너무나 그들이 과거의 이신칭의로 무장을 해 있기에, 제가 이해한 이신칭의와 너무나 달라서 그들을 비판과 비난과 그리고 심지어 정죄도 해 대었습니다. 제가 배운 지식과 율법을 보면서 율법을 어기고 사는 크리스천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그렇게 살면 천국에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습니다.
제 오천만의 로마서에는 이런 글들이 다수가 있고 이미 읽으신 분은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학교를 세우는 것도 싫었고,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낮은 자리에서 겪은 불의에 대한 울분으로 저는 이들을 성토하는 것으로 정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고 굳게 믿고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 공격에 대상에는 제가 힘들 때 도움을 주신 분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그래야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 모든 글의 기조는 최근에 까지는 이러하였습니다. 저는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에 대해서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캘빈과 루터도 공격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성경이 없던 시대에 살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그들보다 더 올바로 성경을 이해할 수가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새로운 이신칭의의 이해로 과거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외치고 있는 제게 큰 시련들이 닥쳐왔습니다.
대부분 장수하는 집안의 자손인 제가 혈압도 조금 높고 일을 하다가 넘어져서 인대가 두 대나 끊어져서 5개월을 수술받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조금 있으니 아침에 쿵 하고 쓰러졌습니다. 부상에서 조금 회복한다고 생각이 들 즈음에, 이번에는 허리로 인한 통증이 허벅지와 종아리로 거쳐서 내려오는데, 거의 쉬지 않고 하루 종일 계속되기에 참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가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고 직장도 조금씩 쉬면서 근근히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강하시던 늘 제게 도움만 주셨던 어머니께서 소천을 하셨습니다. 장가를 가지 못하고 어머니만 모시고 살던 막내 동생의 덕분으로, 제가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았는데, 너무나 예고 없이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일생을 효도를 못했습니다. 상심한 제 마음도 채 추스르기 전에, 이번에는 잠잠하던 아내가 또 쉬지 않고 제게 덤볐습니다.
그렇게 마구 덤비는 제 아내에게 어머니 가신 것도 아직 내 마음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제발 나를 좀 봐 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리고 다리 통증은 거의 참기가 어려울 정도로 크게 쉬지 않고 지속이 되고, 이제는 고통과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감내가 가능한 고통의 끝이 보이는데 그것은 제가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겪는 고통을 넘어서는 도저히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경지를 보니, 저는 두려웠습니다. 절대로 그 고통의 상태는 죽어도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저는 저를 심각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마침내 제가 제 생각과 다른 대상에 대해서 비난, 비판, 심지어 정죄까지 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오천만의 로마서 로마서 2장 강의에서 바울 사도께서 유대인의 죄를 논하면서 비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너도 그렇게 비판을 받고 정죄를 받게 된다는 구절을 보면서도 저는 그렇게 해도 되는 선지자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난을 동시에 겪으면서 저는 그 사명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멋대로 날뛴 모든 글들이 올바르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속히 글들을 내리려 하니 너무나 글들이 많아서 우선 심한 글들은 내리고, 2023년 새해 인사를 하면서 제 잘못에 대해서 사과를 했습니다. 율법을 알고 정의에 불탄 제 마음은 실상은 도를 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심히 싫어하심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정의로운 율법의 나라를 세우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시면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글들의 기조도 달라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제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조금은 보입니다. 누룩과 같고 겨자씨와 같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이 어떻하든지 펴져 가고 있고 자라고 있으며 2000년이 지났으니 크게 자랐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물과 같다는 의미가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되는데, 물속에 친 그물에는 다양한 물고기가 갇혀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비난과 비판과 정죄는 어떤 인간의 몫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저의 그런 모습은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사람이 어떤 판단도 때론 해야 되지만 사람에 대해서 절대로 올바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나도 너도 절대로 그런 일을 하면 죄가 됩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힘입어 이로부터 돌이키면서, 캘빈과 루터가 믿음에서 오는 이친칭의를 부르짓지 아니 했다면 아직도 어떤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분들의 위대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가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음도 보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비록 율법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라 그래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품고서 기다리면서 세워야 하는 분들임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주변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을 세워라 세워라 명하시는데 저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어떤 사람이 생각나면 세우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의미를 모르고 마음으로 어떻게 그 사람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그렇게라도 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세우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떻든지 품고 사랑하면서 섬기라는 말씀임을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어떤 분의 잘못이 조금 보이고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고 해서 절대로 그분을 비판하고 고치려 말고, 있는 그대로 그를 품고 인내하면서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우라"는 말씀속에 있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속에서 저의 그들에 대한 미움을 보시고 그렇게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임이 이제는 보입니다. 저는 죽을 고생을 하면서 배웁니다. 율법을 통해서 정죄하던 곳에서 떠납니다. 무엇이 나와 틀리면 그것이 어긋난 것이라는 태도에서 이제 돌아서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런 일들을 겪기 전에 저는 처음 결혼한 여인이 저를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약 4년을 불면과 우울의 지옥과 같은 시간을 겪으면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지 말고 정의롭게 살자 하고 나름대로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정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제게 하나님께서 러시아 국적의 여인을 아내로 주셔서 아들도 낳고 저를 불면증과 우울증에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해야지 하면서 쉬지 않고 전도하고 성경 정리하고 이렇게 글로 온 세상에 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틀리는 곳이 없고 하나님의 도구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게 오는 고난과 고통은 인간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너무나 심한 것이었기에 저를 비로소 돌아보니 제가 옳은 일을 안하고 있으면서 정죄까지 하는 해서는 아니 되는 일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도 제가 선지자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겁도 없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약 1년 이상 보시다가 크게 징계를 내림으로 제 잘못이 보였고 제가 크게 잘못 나간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니 즉 비판을 해서는 아니 되니, 그냥 그분들이 그렇게 사는 것도, 캘빈도 루터도 그냥 있는 그대로 두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정의의 칼이 하나님의 편에서 이렇게 작동하면 견딜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저보다 더 악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을 다 벌하고 싶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더욱 그럴 수가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서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그 심판을 지금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받겠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 죄 중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정의의 칼, 심판의 검을 가지시고는 계시지만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정의로우신 하나님 편에서 참으로 참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가 이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은 이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를 길이 참으시면서 간과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는데 그 심정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기가 쉽지 않은 우리의 죄를 그냥 보기만 하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피를 흘리게 하시고 또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십니다. 즉 인류의 죄에 대해서 대속의 제물로 예수님 즉 독생자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라고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이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용서를 받게 되어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지었던 다 용서를 받게 됩니다.
살인, 강간, 도적질, 상해, 간음, 불효 등 어떤 죄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이 사람에 대해서 죄에 대한 노함도 푸시고 심판의 칼도 휘두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벌도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함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받을 벌도 사라집니다.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식을 죽이는 낙태의 죄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가 극에 달하고 복음이 모든 나라 족속에 전해지면 하나님께서 더 죄에 대해서 간과가 없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분노의 심판을 견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경험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죄에 대해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 계시는 것이 즉 간과하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을 드리고 이를 극복하고 사랑까지 하는 일은 더욱 쉽지가 않은 일임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정의로우시고 제가 생각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게 사랑이 크시고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작은 유한한 저 같은 인간과 하나님을 절대로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을 통해서 그분이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악을 보시면서도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이 땅에서 정의를 세우려고 악을 미워하고 그래서 정도를 넘어서 비판하고 정죄하고 살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혼나고 돌이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은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하게 율법이 이 땅에 지켜지는 나라인데 이를 모르고 늘 죄를 짓고 천국에 갈 수가 있다고 외치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고 계시기가 어렵겠습니까? 그렇지만 성도도 성도가 아닌 분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면서 참고 계십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는 일이 좋아서 참고 계심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이시기에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고, 믿는 우리를 참으시면서 올바른 길로 가기만을 간절히 바라시기에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정의를 품고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돌이키게 하심을 통해서 과거와 달리 비판을 삼가고 그냥 볼 것은 보고 있는 그대로 마음이 아파도 보고, 그리고 복음도 전하고 성경도 읽고 정리하고 이 내용도 전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땅에 속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하박국의 정의로운 인내의 삶을 생각하며 견뎌야 할 것입니다. 제 삶을 지지해 주시고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저도 실상은 예수님을 믿고 너무나 큰 죄도 지었던 실로 별 볼일 없는 신앙인임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용납해 주시고 용서 하시지 않았으면 벌써 여러 번 죽었을 사람입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이렇게 살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용서받은 자로 자비롭게 모든 사람을 용납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아니 되는 모습이 너무 강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의를 행하느냐 잘못을 말하고 바로 잡느냐 아니면 모른 채 참고 기다리느냐 이는 참으로 분별이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 속에 불의에 대한 미움도 있고 사랑 속에 듣기 싫은 말도 해야 됨이 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비판과 비난과 정죄는 절대로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로마 병사가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병사의 귀를 자르자 예수님께서 잘려진 귀를 그 병사에게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칼로 시작하면 칼로 망한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바로 잡아준 내용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분이 나도 심판은 내가 행하면 되지 않고 인내하면서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실천해야 될 줄로 굳게 믿습니다.
제 글들은 이제 모두 그대로 둡니다. 제가 얼마나 악이 싫어서 불의에 광분했고 그리고 이렇게 제가 바뀌게 된 내용과 사연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제는 비판과 비난과 정죄를 절대로 피하겠지만 제 눈에 보이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정죄한 것은 제 잘못이 분명하게 맞습니다.
저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성경에 호세아 선지자가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분과 비교를 할 수가 없는데 저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지었습니다. 첫 번 결혼 생활은 제가 너무나 능력이 없고 못 했습니다. 그리고 전처와의 헤어짐을 통해서 큰 고난을 겪고 분리의 고통을 뼈가 시리도록 맛을 보았습니다. 최근에 또 수 년에 걸쳐서 다양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첫 고난으로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제가 겪은 고난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직 전도하고 성경을 읽고 정리하고, 그리고 새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도 성실하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새로운 내용을 알면서 도를 넘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과열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징계를 받았고 아직도 그 고난이 지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선 분리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단절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난과 비판과 정죄는 분리와 단절의 선봉입니다. 비난과 비판과 정죄가 아니면 무엇입니다. 그냥 그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내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 나와 다르더라도 다른 그분이 도리어 올바를 수도 있고, 또 그분들을 품고 기도하면 분명하게 그분들께서 좋아질 수가 있다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분들에 대해서 참고 계시는데 사람이 나서서 설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방관도 아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인정도 아닙니다. 참는 것이고 품는 것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섬기라고 제게 보내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제가 할 일임이 보입니다. 저는 세상에 대해서도 교회에 대해서도 교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저와 달리 이미 이렇게 온갖 성도와 세상을 품고 사랑하며 목회로 멋지신 성도를 키워내는 목자들을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견디면서 살다 보면 저도 언젠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그리고 세상도 제가 품고 기도하는 대상도 올바르게 바뀔 것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되는 도구입니다. 도구가 너무 하나님 하시고자 하는 일에 말이 많으면 되지 않습니다. 빗자루는 자신이 망가지도록 주인이 쓸고자 하는 데로 땅의 쓰레기를 쓸면 되는 일입니다. 모든 세상의 도구는 주인에게 말이 없습니다. 저는 말이 많고 제 마음대로 하고자 했던 도구입니다. 모든 분이 저를 위해서 제가 정말로 능력이 있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적재 적소에 잘 쓸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구인 제게 하나님께서는 고시 공부, 대학 대학원 8년 공부만 하도록 내버려 두셨고, 그리고 결혼도 두 번이나 허락하셨고, 그리고 제가 하고픈 세상일을 많이 하도록 하셨으니, 저는 하나님께 별로 좋은 도구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그냥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이런 저를 위해서 그렇게 살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분이 하나님의 좋은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늘 성경을 읽고, 늘 기도하고,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주변을 사랑하고 경건하고 멋있는 도구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같이 죄를 짓지 않고 일생을 주님의 신부로서 성결하게 거룩하게 멋있게 사시는 모든 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힘을 내시기 바라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와 같이 나약한 인생을 언제나 품고 사랑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늘 인도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소서! 주여!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