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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이종화(1937년생) 전 기호농조 전무
2020.11.28
부친이 진위면 하북리에서 원평동으로 이주한 뒤 줄곧 살았다. 청소년기와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고, 한국전쟁 뒤 군대에서 전역한 뒤로는 기호농지개량조합에 입사하여 전무로 퇴직했다. 원평동의 학연, 지연을 바탕으로 지역사정에 정통하다. 원평동을 함께 답사하며 인터뷰했다.
어르신 반갑습니다. 간단히 소개 좀 해주시죠?
반가워요. 원평동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았고 기호농조에서 전무까지 하다가 정년퇴직했어요.
원평동을 돌아보며 말씀을 나눠보시죠. 평택역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예요?
(서부역 우측 AK백화점 주차장 올라가는 입구) 여기가 평택역 입구였다고. 역 광장도 조그만 했지. (주차장 입구에서 광신연탄공장 터 방향 모서리)여기가 버스정거장이었고. 버스가 요 앞에서 빙 돌아서 나갔다구.
혼마찌는 역 입구에서 서쪽으로 일직선이군요?
그렇지. 여기(옛 평택역 입구)에서 일직선으로 쭉 나가는 골목이 혼마찌였지. 여기가 45번 도로라고, 둔포하고 안정리 나가는.
그럼 용잔은 어디예요?
용잔? 이리 와봐. (서부역 광장) 여기에서 땡땡거리(통복지하도)까지 전부가 용잔이여. 대동연탄 있고 서울미용실 있는데까지. 여기가 옛날에는 넓었다구. (원평동 ‘평택역’ 팻말 있는 곳)여기가 금융조합 터였고. 6.25 후에도 금고가 있었잖어. 저 건너편 파리바게트 앞이 상업은행.
그럼 삼거리에서 서부역 앞까지가 모두 공터였다는 말이죠?
그렇지. 전부 공터였지. 김학영이라고 KBS국장 하던 사람. 그 사람집이 서울미용실이었다고.
단양여관은 어디예요?
단양여관, 허허 곧 갈 거야. 단양여관 자리가 김종국이라고 내 친구 김학영의 형이 살던 집인데 그 손자가 광명사 안경 2층에서 카페를 하지.
금융조합 자리는 어떤 모습이었어요?
금융조합 있던 데는 (지형이)불룩하게 올라왔더라고. 거기에 금융조합이 있었고 그 옆으로 길가에는 상점하고 회사들이 쭉 있었고. 그 옆으로는 웅덩이가 있고 습지야. 돋워서 그렇지. 6.25 후에 메웠다고. 여기가 깊었어. 우리 집이 세무서 자리야. 우리 집 앞에 옛날 세무서 댓돌이 있어서 남기려고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서 없어졌어. 내가 살던 곳을 팔고 저 군문초등학교 근처에 땅을 사둔 게 있어서 원룸을 지었지. 세무서 자리에는 3년 전에 건물을 지었고, 지금 사는 집은 5년 전에 건물 지었어.
단양여관은 어떤 모습이었어요?
단양여관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 여관은 단층이었고 ㄱ자 형태였어.
단양여관은 1980년대까지는 운영했나요?
1990년대까지는 운영했지. 지금도 간판만 뗐지 있을 거여. 간판만 뗐지 위치는 변화가 없어.
임사홍씨 살던 집터는 옛날 곡물검사소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임사홍 집터가 검사소였지.
(곡물검사소) 일제 강점기 다다미집을 고친 것 같아요?
고친 게 아니라 다시 지은 거여. 1.4후퇴 때 중공군이 밀려오니까. 진위에 가면 진위역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 본래 도로가 느티나무를 빙 둘러서 찻길이었거든. 거기가 우리 집안 아저씨 집이야. 내가 중학교 때 서울 회현동 형네 집에 있었다고. 신세계 있는데. 6.25 났는데 형 둘은 보국대 나가고 나는 4살 먹은 조카와 형수하고 셋이 있다가 (한강)다리가 끊겨서 못 건너서 정릉 친척집에 잠시 있다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 걸어서 수원을 지나 평택에 온 거야. 평택에 왔는데 역 주변이 다 불타고 없는 거야.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인민군이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수원 쪽 방어선이 무너지니까 급하니까 유엔군 비행기가 역 주변을 때린 거야. 그 때 길 가생이만 남고 다 부서졌어. 평화병원을 제외하고는 위쪽으로 다 부서졌어. 평택초등학교 입구에 평택상업조합이 있었고 소주공장 있었잖아, 방학소주. 우리어머니도 그렇고 거기 주식을 갖고 있었거든. 방학이 맞어. 이삼규씨가 주주를 모아서 할 때 여기(원평동 농협 부근)에 막걸리 공장(평택양조장)이 있었거든. 이따가 거기도 알려줄게. 내가 걸어서 성동학교 다니며 본 것도 있고, 중고등학교 하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지만 군대 갔다 와서는 여기서 쭉 살았으니까. (초등)학교 가려면 상업조합 지나서 역 마당을 지나서 철로 건너면 옛날 군청자리(비전동 군청) 옆에 전기회사도 있었다고. 거기를 지나서 다녔다고. 남선전기(주)였을 거여.
삼거리에 있었던 전기회사는요?
여기 땡땡거리는 평택전기(주)야. 그 옆에는 변전소가 있었고. 6.25 때 14명이 서울로 유학을 간 거야. 성동초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젤 많이 간 걸 꺼야. 유천형이도 함께 가고.
읍사무소 자리는 어디죠?
여기 프렌즈 pc방 자리 옆이 읍사무소야. 건너편이 한국전쟁 전까지 가구점인데 우리 작은아버지 이일제씨가 운영했어. 저기 라인통신이라고 그 건물 옆 골목 있잖아, 하얀 집 뒤 거기가 전석홍씨 집이고 그 딸이 전은희야. 6.25 후에 새로 지은 거지.
장똘뱅이 치킨 집이 곡물회관이라고 하던데요?
거기에 있었지. 어려서 기억은 많지 않아.
원평동이 본래 서부동이었죠. 어떻게 원평동으로 바뀌었죠?
유천형이한테 물어보슈. 그거 내가 주장해서 바뀌었어. 시청에 민원담당하던 박재혁이라고 있어. 내가 평택 라이온스클럽에서 30년 간 봉사하고 있고 유천형(전 도의원)과는 평생회원으로 있는데 우리가 바꾸자고 건의했지. 여기가 옛날 평택 중심이잖아.
종합불교사 자리가 한광고등공민학교 터죠?
맞아. 6.25 뒤에는 제제소가 됐고, 그 뒤로는 상여공장이었고, 지금은 불교사로 사용해.
소방서 자리는?
세무서 위쪽이 소방서지. 거기 모퉁이 있는 곳에 pc방 건물 있잖아. 1층에 편의점 있고. 저 건물이 소방서야. 규모는 크지 않았지.
소방서 아래쪽이 세무서 금고였고. 보일러 계량기 있는 데가 기록 보관서였지. 그걸 내가 왜 기억하냐면 인민군 치하에서 좌익하던 사람들이 유지나 대지주, 감투 쓰고 뭐 했다던가, 공직에 있다던가 하던 사람들 잡아다 벌주거나 죽였잖아. 그 사람들이 여성동맹위원장, 민청위원장 같은 걸 했어.
나도 6.25때 7월 28일인가 서울에서 내려왔더니 우리 부모님이 예산으로 피난가고 없었어. 그래서 안정리 가는 둑방, 옛날에는 사구라나무가 많았는데 그 둑방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 거야. 거지 왕초인데 지서방이라고하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 그래 ‘아이구 도련님 부모님이 피난 가면서 나보고 알려주라고 해서 기다렸어요’하는 거야. ‘도련님’ 어쩌고 하니까 그 소리를 지나가던 민청위원장이 들었어. 그래서 지서방과 경찰서(내무서)로 잡혀 들어갔지. 그 때가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고 14살인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 그래서 형님 둘이 보국단 나가고 형수님과 피난 내려온 것을 말했어.
결국 잡혀간 데서 밤중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 나왔어. 군문리 다리로 갔더니 다리는 끊어지고 시체가 강물에 가득해서 도저히 못 건너가겠는 거야. 어떤 사람이 그럽디다. 저기 망근다리(유천교) 쪽으로 가면 건너갈 수가 있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좀 얕은 데가 있어서 그리로 건넜어. 안성천을 건너서 노와리로 해서 예산으로 갔어요.
예산에 연고가 있었나요?
우리 외할아버지가 거기 사셨어요. 발현리라고 전매소 있는데. 그러다가 수복 후 돌아왔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어. 서울로 갔는데 얼마 안 있다가 중공군한테 다시 밀렸잖아.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여기 세무서 창고하고 통복동(낙촌) 단위농협 창고에 좌익들을 몰아넣고 고문도 하고 그러더라고. 여기 갇혔던 사람들 (유엔군)폭격 맞아서 다 죽었어요. 좌익했다고 잡혀간 사람들이었는데. 여기 오니까 그 생각나요. 여기 세무서 서고 창고에도 사람들 가둬 뒀다가 죽었지. 1.4후퇴 때도 본 건물은 탔는데 서고하고 금고건물은 안탔어. 그 뒤로 금고하고 서고 자리를 내가 사가지고 집을 지은 거지. 휴전 뒤에 기호농조가 쓰다가 저쪽(비전동)으로 넘어 갔잖어.
기호농조는 언제 넘어갔어요?
세무서가 1937년, 기호농조는 1956년에 생겼잖어. 그 뒤지 뭐.
세무서 모양은?
단층인데 정문은 옆으로 들어가게 됐었어. 일본식으로 나무판을 겹쳐 붙여 놓은 형태였지. 군청도 그렇게 지었어.
성동학교가 비전동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 있었던 걸로 되어 있는데 혹 아는 게 있으세요?
여기(세무서 앞)에 성동학교가 있었다면 규모가 작았겠지. 나는 잘 몰라.
군청 뒤쪽으로 생각되는데요?
우리 작은아버지가 읍사무소 앞에 가구점을 했다고 말했잖아. 세무서 앞 냇가가 있는데 거기까지가 군청이었다고. 세무서 정문에서 군청 울타리 뒤쪽을 따라 좁은 길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개울 하고 큰 길(1번국도) 사이에 학교가 있었을 거야. 군청 울타리는 지팽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고. 세무서 옆으로는 소방서가 있었고. 세무서도 본 건물이 있고 부속건물도 있었고.
군청이 폭격으로 없어졌잖아요. 수복 후 세무서 건물이 임시군청으로 사용됐다고 하던데요?
그렇지. 폭격 뒤에 군청 건물로 썼어. 군청이 넘어간 뒤에는 기호농조가 썼고.
38번 국도는 어디였죠?
여기(농협 앞) 도로가 38번 국도여. 이 길로 쭉 가면 삼성아파트 지나서 안중으로 가잖어.
45번 도로는 혼마찌를 지나서 영단방앗간으로 지났잖아요. 그 도로가 원평동 둑방으로 바뀐 것은 언제죠?
난 그건 잘 모르겠네. 내가 군대 갔을 때라 잘 모르겠어.
군대를 언제 가신 거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논산육군훈련소에 근무했다고. 훈련소 조달참모본부에 근무하고 있었어. 축구 중계하던 최선희 아나운서라고 있었지. 그 친구는 인사처에 있었고. 내가 평택에서 온 사람들 훈련소 5단계 훈련하는데 많이 봐줬네. 우리 육촌 형이 조달참모부장이었어요. 그 때 중령이었는데. 병참사령관이 종만이 형이라고 그 분이었고. 조달참모부에 있는 바람에 최선희 하고 평택사람들 많이 봐줬네. 그래서 훈련소 역사도 잘 알아요. 박동근 소장 때 조달청에 있었으니까 별일 다 했지 뭐.
군대서 대대 보급계만 해도 빽이 좋은데 얼마나 힘 있었겠어요?
그런데 내가 기호농조에 왜 왔냐면, 우리 당숙이 큰형들 있고 내가 막내잖아요. 제대를 했는데 헌병대장하던 이철제 대령이 (기호농조)기관장으로 여기(평택)로 왔다고요. 그 때 이종세라고 보좌관을 데리고 왔어요. 그 뒤로 1년 뒤 4월 3일에 내가 제대했는데 같이 있던 김종덕이라는 친구는 김종필씨가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갔고 나도 종덕이가 그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우리 당숙이 ‘너 엄마도 살아 있고 평택을 떠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철제 대령에게 말해서 임시직으로 기호농조에 들어갔다고. 그게 공직생활 시작여. 36년 7개월을 근무했지 허허허.
원평동에는 언제부터 살았어요?
나는 여기서 태어났지.
부모님 고향은요?
하북, 하북에서 평화병원 했던 이인제씨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왔지. 우리 아버지는 구장을 하고 이인제씨는 병원을 하고.
이인제씨는 정식 교육을 받은 분인가요?
그럼. 그 양반 서울대학교 의대 나온 분이여. 왜정 때 서울대 나왔으면 대단한 거여.
왜정 때 평화병원 의사 김병룡은 기억나세요?
그 분은 우리 당숙 직전 분이여. 어려서 기억은 안 나고. 당숙은 1968년 2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전까지는 운영했지.
이인제씨 사망 뒤 평화병원 건물은 누가 소유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거지.
용진부동산 하던 분도 소유했다고 하던데요?
지금 하잖아. 이용진은 용진부동산하고 부인은 슈퍼하고. 그 친구 형은 시장에서 포목장사 했잖아. 지금 사는 사람은 두 번째야.
어르신 아버님도 많이 배우신 분인가 봐요?
그러니까 그 덕에 상업조합에 주주로도 들어갔지. 상업조합은 이삼규씨 뿐 아니라 조행규씨도 있었고, 유진씨라고 납북된 안재홍씨 국회의원 선거할 때 6.25직전 선거할 때 말여 유진씨 양조장에 선거사무실을 냈었다고. 수원옥하던 이석훈씨도 가까웠고, 그 양반들 다 괜찮은 분들이지. 8분인가 9분인가 그분들이 다 (상업조합)주주로 들어갔어. 상업조합은 일종의 주식회사 형태인데 땅은 이삼규씨 것이었지. 그 안에 방학소주공장이 있었고.
현대목욕탕하고 성환연립 있는 곳에 있던 소주공장이죠?
그렇지.
이삼규씨가 지역일도 많이 했나요?
했었죠. 6.25 후에 다 어렵고 다 불타버리고 할 때 소방서 건너편에 계란집이 있었는데 차관영씨하고 재혼했던 분(이귀임) 딸이 거기서 어려운 사람들 국을 끊여주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했다고. 우리가 서울에서 학교 다니다가 완전 수복 전에 임시학도호국단을 할 때 여기 단양여관하던 김병국씨, 내 친구 학영이는 그 집이 처가인데, 그 때 거기 학도호국단을 만들어가지고 학생들 모임을 가졌어요. 김병국씨하고 봉oo 우리보다 위 고등학교 학생들하고.
학도호국단은 어떤 일을 했어요?
아니 전쟁통이라 학생들이 학교를 못가고 하니까... 여기 조선관이라고 있어요. 조선관에서 평택중학교가 시작됐어요.
최경환, 이민훤씨 등이 만들 때 말이죠?
그럼, 거기서 만든 거여.
거기가 기생집이었죠?
그럼. (원평동에)기생집이 세 집이 있었어. 수원옥, 조선옥, 충북옥 역 앞에 또 하나 있었는데... 지체 있는 분들 놀고 했는데 커서 보니까 기생집이야. 허허
차관영씨도 거기서 많이 활동했다는데요?
그럼. 그분이 기호농조 총무과장까지 했지. 자유당인가 자유한국당인가 시절에 내가 주사할 때인데 사무관 되기 전 나를 좋게 봤는지 자꾸 나보고 정치하자고 그러셔. 그래서 ‘내가 정치 안해요’라고 거절했지. 퇴직한 후 내가 조용히 살아도 1999년부터 11년 동안 우리 광주 이씨 대종회가 재산이 100억이 넘는데, 거기서 11년 동안 경기도지사 하던 이해구씨가 대종회장 할 때 거기 끌려가서 재산관리를 11년이나 했어요. 그 때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문화재도 많이 만들고. 강남구 암사동 같은데도 그렇고, 이수성씨 고향이 경상도인데 거기도 문화재 만들고 종중일은 다 하고 다녔다니까요.
어르신 형제는 어떻게 되요?
위에 형이 두 분 있었고 누님도 두 분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그래서 내가 중앙정보부 갈 건데 이인제씨가 이철제 대령한테 말해서 일생을 집안하고 연결되는 삶을 살게 됐어요. 그래도 일생을 정치하는 사람들하고는 가까이 안 했어요.
이철제씨가 광주 이씨인가요?
그렇죠. 팽성 사람인데.
학교는 어디를 다녔어요?
중앙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중학교는 한양중학교를 나오고. 중앙출신이 법조계나 의사, 학계에 많이 있죠. 우리가 (평택)중앙모임을 했었는데 강정환 법무사 있잖아요 그 친구하고 동문회를 했었는데 삼오정 있을 때까지 했어요. 지금은 하나 둘씩 사망하고 흩어지고 할 의욕이 안 나고 해서 모임이 없어졌어요. 우리 지역에 양정, 배재 모임도 있었는데....허허허
그 시절은 서울로 유학을 가야하니까 동문모임도 많았겠죠?
그렇죠. 서울도 유학이죠.
대학은 진학 안 했어요?
연세대학교 갔지요. 군대 가고 나서 혁명(5.16 군사정변) 나고 기호농조 들어갔지. 그래서 한을 못 푼 게 너무 많아.
전공은 뭐 했어요?
법외과.
외교관이나 법관을 꿈 꿨네요?
그 때는 법관이나 교육계를 꿈꿨는데 6.25 되니까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말야. 공부했다고 할 수가 없어. 한양대학교도 산 위에다 판자집 짓고 학교 다니고 그랬지.
평택중학교 있을 땐데 그 쪽은 생각을 안 했어요?
안 갔지. 김학영이나 박재학은 평택중학교 출신이고, 유천형이는 경기공업 나왔다고. 옛날 경성공업. 공부 꽤 잘했다고. 정약국은 동성고 나왔고. 이종흥이라고 충혼탑 뒤에 부잣집 아들은 휘문 나오고.
초등학교 친구 14명이 다 잘 됐네요?
그래서 형제모임이라고 해서 성우회라는 모임을 했지 성동학교 친구들이라고. 부인들은 성심회. 부부끼리 50년은 모였는데 지금은 늙어서 안 하지. 정약국, 구세약국, 유천형이, 유창농원하던 종욱이, 철도국 다니던 종성이. 그래도 괜찮은 친구들이었고 (평택사회에서)제 역할을 하던 친구들 중에 서울로 유학 갔던 친구들끼리 모임이었지. 성동 33회에서 성우회하면 점잖고 가장 모범적인 부부모임으로 소문났어요. 지금 평택에 덕동회라고 있어요. 그 이름 내가 지었는데 단양여관하던 김종국씨 정진모, 유천형이, 시(市)에 있던 박재학이 24명이 시작했어요. 1982년에 평택관광호텔 커피숍에서 시작했지. 24명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74명인가. 여기서 나서 평택에서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나오고 하는 사람들 모임이예요.
덕동루 건립과도 관련 있나요?
그것은 상관없어요. 6.25 때 폭격으로 죽은 101용사가 있잖아요 그 분들하고, 평택에 있는 대한청년단 등 청년단 인사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이 백 몇 십 명이 있어요. 6.25 후에 그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죽은 분들 57명을 심사위원들이 선정해서 101용사 탑에 함께 모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101용사 탑이라고 하다가 1968년도에 박정희대통령이 국군보상법을 만들며 군인 경찰과 민간인을 분리해야 한다고 해서 민간인들만 따로 모시게 됐어요. 신한고등학교가 처음에는 안씨가 운영했는데 거기에서 300평을 기증받아 차관영씨하고 여러 분들이 팽성비행장 라이온스클럽 처음에 하시던 분들 후원을 받아서 (매봉산)위령탑을 만들었다구요. 이은상씨가 시를 지은 것을 새겨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원호보상 받는 사람은 101용사 탑을 충혼탑으로 하고 세우고, 57명만 매봉산에 모신 거죠.
거기(매봉산 위령탑)에는 유족들하고 청년 사회단체들이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평택시가 송탄시와 분리되고 나중에 통합운동하게 되는데, 광명사안경 위 라이온스클럽 사무실에서 송탄·평택 통합운동을 준비했어요. 그 때 인사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데, 처음에는 청년단체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대한민국에 건국회라고 있어요. 건국회가 생겼을 때 유족들이나 청년들이 돈이 없어가지고 평택시에다가 (매봉산 위령탑 위령제)상 차리는 거나 좀 도와줄 수 없냐 하고 건의했어요. 그래서 시(市)에서 처음에는 20만원을 주었는데 지금은 100만원이 나와요. 전에는 충혼탑이 11시에 하면 매봉산은 10시에 (제사)했어요. 지금은 충혼탑에서 하고 난 뒤에 매봉산에서 제사지내요. 제사지낼 때는 시장, 국회의원들이 꼭 왔어요.
그런데 김대중대통령 이후 반공사상이 약해지고 하면서 학생들도 찾아오지 않고 호응이 적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중단되고 그랬는데, 나 있을 때 (유)천형이하고 건국회 전국회장을 정진모가 했어요. 그런데 진모가 돈도 안 모아지고 제사도 못 지내니까 유가족들도 불평을 하고 그랬는데, 한 번은 진모를 만났더니 나한테 그래. ‘아이구 부담 되서 더 이상 못 하겠어요’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천형이와 내가 2004년에 라이온스클럽에 맡아줄 것을 부탁했어요. 지금은 평택시에서 150만원인가 나오는 돈하고 라이온스클럽에서 지원해서 지내죠. 유족들이 한 50여 명 모이거든요 그 분들하고. 제사지낼 때는 3075부대 군악대에서 와서 연주해주고 그래요. 평택에서는 의미 있는 기념탑인데 고향을 지키려다 죽은 분들이니까. 그래서 라이온스에서 제사지내고 있어요.
그러면 6.25 때 내무서를 경찰서에다 배치했나요?
맞어, 경찰서에 내무서를 설치했지. 경찰서나 군청은 1.4후퇴 때까지 남아 있다가 중공군 내려오면서 폭격 맞아서 없어졌지. (원평동 5통사무실 앞에서) 여기가 경찰서 정문이야.
(경찰서 정문 뒤)이곳에 계명학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계명학교가 여기 있었지. 진청학원은 삼성아파트 옆에 있었고. (단위농협 좌측)여기가 홍행원이라는 유명한 중국집이 있었고 (건너편 사거리 편의점)이곳에는 소락천 아버지가 중국집을 했고. 홍행원 옆에 나사렛교회가 있었지. 그러고는 경찰서 정문 옆에 작은 집들이 있었다고. 그 때는 평택장이라는 게 군청 앞이 시작이었다구. 내가 생각하기는 미장원하고 캐슬공인중개사 아이 골목이 군청하고 경찰서 경계였어. 경계에는 지팽나무 담장이 있었고. 군청 뒤쪽에는 또랑이 흘렀고. 우측으로는 넓은 골목이 형성되는데 거기가 시장통이야. 옛날에 동아병원이 있었는데 동아병원 자리가 시장통 안에 있었다고.
대동병원은 기억 안 나세요?
대동병원은 모르겠는데.
원평동에 양조장도 있었죠?
(단위농협에서 큰 길 만나는 지점 좌측 모서리)여기가 양조장 자리야. 유진씨가 운영했지. 성균관대학교 세운 사람(김창숙) 외가가 이 집이야. 약국 옆에 해장국집이 대동병원이었고. 유진씨는 안재홍씨하고 친척이었고. 6.25전까지는 있었는데 그 후에는 불에 탔으니까 없어졌지.
평화병원은 언제 지었어요?
왜정 때 지었지.
평택병원은 어디예요?
평화병원 전에 평택병원이라고 했을 거야. 해방될 때 우리 당숙이 운영했는데 6.25 때 경찰서가 파괴되니까 임시경찰서로 사용했지. 병원은 본래 경찰서 터 옆으로 임시 이사 가고. 경찰서가 반대편으로 넘어간 뒤에 다시 원래 병원으로 돌아갔지.
시장통은 주로 뭘 팔았어요?
거기는 싸전이고 그 아래는 진전이라고 생선을 팔았고. 경찰서 가는 길은 버스가 다녔으니까 시장은 설 수 없었고 장날에만 난전이 섰지. 철물점, 그릇전 같은 상설시장도 있었고.
백화점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시장통에는 백화점 같은 것은 없었어.
(평택초등학교 뒤쪽 골목 반대편을 가리키며)여기부터가 상업조합이야. 저기 교회(주민교회)와 현대목욕탕, 성환연립 있는데 까지가 상업조합하고 소주공장이었어. 윤응구씨 방앗간보다 좀 작았지만 여기도 무척 컸지. 방학소주 건물 옆에 상업조합 사무실이 있었지.
(평택초등학교 뒤쪽 골목)요 앞에 지하로 또랑이 흘렀어. 방앗간하고 우시장이 또랑이 경계였어?
우시장이 6.25 후에도 운영됐나요?
그럼 조그마하게 운영됐지.
(골목 좌측) 여기가 우시장 입구야. 학교부지 절반쯤 사용했지. 담장 뒤쪽에는 우리 집하고 4집이 있었지. 우리하고, 양조장 아들하고, 힘 좀 쓰는 사람들 살았지. (이종화씨 옛집 건너편)여기가 수원옥 자리야.
한옥인가요?
한옥이지. 그 옆으로 초가집이 있었고.
수원옥은 우시장 소장수들 대상으로 장사했네요?
그렇지. 우시장 정문에서 시장통 방면으로는 진전이라고 생선 파는 가게가 있었고, 모서리에 있던 요정은 충주옥이고. 진전에서는 난전이 열렸지. 생선장수들이 파는 난전.
여기가 술집이 두 개였네요. 수원옥은 누가 운영했어요?
시장에 미성건재사를 운영하는 이석훈씨가 운영했지. 지금은 팔아서 여러 사람이 소유하는데.
충주옥은요?
이oo 누군가 하는 분이 운영했는데 여기에서 떠났지. 수원옥은 기생이 20명, 30명이나 있었어. 충주옥은 좀 작았고. 충주옥에서 이다바(심부름꾼)를 하던 사람이 인민군 끄나풀이었는데 내가 내무서에 잡혀갔을 때도 거기 있었다고. 기생은 술집 작부하고 달라. 가야금도 잘 켜고 노래도 잘하고 다르지.
원평동에서 좌익 하던 사람들 중에는 누가 유명했어요?
내가 14살밖에 안 돼서 잘 모르지.
김석봉같은 사람들 유명하던데요?
그렇지. 청북에 많았잖아. 청북에 여성동맹위원장 하던 사람한테 잡혔는데 김일성 그림 그리라고 하고. 양조장은 나중에 유진씨가 팔고 서울로 갔는데 그러고 이영수씨가 유진씨가 하던 양조장과 집까지 다 사서 들어와 살았지. 어디서 농사를 많이 짓던 분인데. 평택초등학교 유치에 앞장섰던 분. 여기 우리 집 건너편이 거기야. 우시장하고 상업조합 주변에 쟁쟁하던 분들이 많이 살았지.
조선옥은 어디였죠?
(상업조합에서 본정통으로 연결된 골목 끝)여기가 조선옥이야. 역 앞에는 보성옥이라고 있었고. 지금 생각나네. 조선옥은 2층집이었어. 목조 다다미집. 유지급들이 여기서 모임을 많이 했어. 평택중학교가 임시로 여기에 있었거든.
6.25 후에는 문을 닫았나요?
그렇지. 문을 닫았지. 그러니까 평택중학교가 있었던 거지.
윤응구씨 방앗간은 어디였어요. 방앗간을 운영한 것은 해방 전인가요?
해방 전일 거야. 저기 군문주공아파트 106동 있는 곳이 방앗간 자리야. 군문초등학교 가기 전 둑방이 있잖아. 거기가 둑방이지. 원평동을 둘러쌌던 둑방.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당숙집(평화병원)에서 뒤로 논둑을 걸어오면 여기가 약간 높은 언덕이야. 여기 초등학교 후문 쪽으로 도살장이 있었다고. 그건 기억나. 여기에서 방앗간 사이에 고물상이 있었고. 고물상 있는 쪽의 골목은 옛날하고 똑같아.
(군문교 입구) 6.25전에는 다리가 지금 있는 데서 아래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폭격 맞아서 부서지고 다시 만든 거지. 그 때 다리 입구에 송장 천지였어. 6.25 때 여기를 건너려는데 송장이 많고 다리가 없어서 못 건너고. 유천리에 망근다리로 건너려는데 거기도 송장 천지야. 바닷물에 송장이 떠다녔는지... 어째든 아이구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