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20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후보작
강정이, 이순희, 이병일, 이병국, 유종인, 김언, 안상학, 장옥관, 김기택, 임봄
유령상념
강정이
나는 유령, 아니 유령의 집이다. 내 등 뒤엔 친정부모, 시부모, 처녀로 죽은 이모, 과부로 살다 간 이모, 사슴같은 외삼촌, 전쟁터의 아주버니, 내 꿈 속에서 울던 두 모자가 비둘기 떼처럼 앉아있다. 때리고 침 뱉는 욕설을 온전히 받으면 내 몸이 아프다. 유령의 집에는 억울하거나 슬퍼하거나 외로운 영혼이 산다. 내 몸은 그래서 넓어야 한다. 유령들은 제 몸의 불로 쓰나미 산불도 거뜬히 견딘다. 저 울타리가 넉넉한 대숲이어서 부자다. 아파트분양, 땅투기, 주식, 코인 등 세상을 몰라도 된다. 유령인 내 몸은 종잇장처럼 가볍다. 호젓할 땐 넋두리도 구수하다. 내가 달빛 같은 유령일 때, 시냇물 흐르는 풍경 속에 내 몸을 누이고 새소리 풀잎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내가 유령인 줄 모르고 사람 취급한다
그래서 나는 유령과의 유토피아를 쌓기 위해 소나무처럼 단단해야 한다
----애지, 2021년 겨울호에서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
이순희
그는 글 동냥하며 근근이 살았다
언어에 굶주려 극심한 눌변에도 시달렸다
어쩌다 곳간이 찼다 싶어 열어보면
가득 들어찬 망상과 허상들.
어느 새벽 그는 길을 떠났다
詩는 말과 절이 합쳐졌으니
말의 신전으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말씀을 확인해 보리라 작정했다
험준한 산길 올라 들어선 산사에는
아무리 찾아도 말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바람 고요해지자
가부좌 틀고 면벽한 말씀의 뒷모습,
묵언 수행 중인 듯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다
그 염주 다 닳아 한 점으로 남게 될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을 듯 꼿꼿하다
......
----애지, 2021년 겨울호에서
함박
이병국
스테이크를 떠올린다면 하루가 고픈 일이지
눅진한 몸을 식혀 단단한 생활로 이끄는 함바 말고
겹겹이 쌓인 둥근 잎 안쪽 노란 망울 맺는 미나리아재비, 함박
폭신폭신하게 안겨 한잠 푹 잘 수 있으리라는, 함박
짙어 해맑게 주름 맺힌, 함박
수줍게, 함박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바가지로 함박을 떠
동글납작한 그릇에 담아 내어놓으면
아무래도 넘칠 수밖에
기울여 붙잡은, 함박
자주 비워둔다 해도 가파른 몸을 어쩌지 못해
다보록한 아침을 오래 바라보다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어내도 되겠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악기 도서관
이병일
해 지는 순간에 나가서 해 뜨는 순간에 돌아오는 무역선이 있었다. 어느 섣달 서양악기를 가득 싣고 북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얼어붙더니 바다와 눈보라는 엇갈린 빙하로 벽을 세웠다. 더 이상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원들은 악기를 태워 불을 피우자고 했다. 하룻밤 사이 발가락과 손가락이 새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차가운 불에 덴 것이다. 오므라들고 오그라드는 얼음구멍 속에서 바다표범이 얼굴을 비추는 밤, 오로라만이 땅거죽을 밀어 올리는 봄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소년은 낮에 본 어떤 악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꽁꽁 헝겊으로 감싸놓은 것을 풀어헤치고 침발롬*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신왕에게 바쳐질 악기였지만, 소년은 궁전에 가닿기 전에 얼어 죽을 순 없다고 가느다랗고 질긴 자작 나뭇가지로 선율을 켜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불의 깃털을 가진 음표들이 북극성에 가닿자 별자리가 흐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북두에서 튕겨나간 빛이 빙판에 금을 내자 일각고래 한 무리가 흰빛을 뱉어냈다.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듣지 못했던 음악이 목마른 것에 푸른빛을 내주었다. 흰빛과 붉은빛과 푸른빛이 뱃길 사이로 난 길을 보여주었다. 뼈와 관절 가진 것이 되살아나 한바탕 춤을 추었다. 진물과 피 냄새와 새까맣게 물든 상처가 신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새의 부리에서 나오는 휘파람소리가 신들이 주고받은 술잔이었지만 소년은 아직도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소년은 해가 부지런히 구름떼를 몰아가라고 마지막 악장을 헤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의 흥과 운명은 뒷문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눈을 뜨자 소년은 해빙 같은 꿈에서 빠져나온 듯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침을 흘리고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악기 없는 난파선에서 책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빳빳하게 박힌 책의 표지들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소리의 뼈가 이곳에서 채굴되었다.
*헝가리의 민속악기.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유종인
백발의 저 노인은 백 년 전도 백발 같아
앞서 가 뒤돌아보니 자작나무 풍채인 게
거뭇한 옹이 마디에
웅숭깊은 눈을 떴네
공중의 어느 좌표에 화장실을 세워놓고
새들은 꼭 그 자리서 뒷일을 보는갑다
흰 새똥 뒤집어쓴 바위가
천년 가는 혼수(婚需)같네
잎새가 죽은 난과 새 촉이 돋는 난(蘭)은
한 바람에 다른 결로 햇빛 속을 갈마들며
터 잡은 고요의 심지에
수결(手決)하듯 꽃을 버네
남녘의 섬 한 귀퉁이 나를 번질 터가 있어
독필(禿筆)의 그 날까지 번민을 받자 하니
툇마루 볕 바른 자리에
선지(宣紙) 펴는 댓잎 소리
야자수와 소나무가 쪽동백을 아우 삼듯
까마귀와 갈매기가 청보리밭 답청하듯
숨탄것 지상의 한 걸음씩
몸을 내는 얼이 있네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5월호에서
마포의 큰사랑
김언
마포의 큰사랑을 찾으러 갔지요.
마포의 큰사랑은 마포의 큰사랑에만 있는 것인데
거기가 어딘지는 물어 물어 찾아가야겠지요.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마포의 큰사랑.
찾아가면 데리고 올 수도 있을까요? 마포의 큰사랑이라는 분.
사람이 아니면 물건일 텐데 물건이 아니면
어떤 증표 같은 말이기도 할 텐데
마포의 큰사랑은 아직 만나지도 못했고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찾으러 갑니다.
그래서 만나러 갑니다. 그래서 데려올 요량으로
마포의 큰사랑을 마포의 큰사랑답게 아주 큰 곳에서
아주 크게 들리는 소리라도 들리면 그곳이
마포의 큰사랑일까요? 마포의 큰사랑이 있는 곳일까요?
마포의 큰사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다만 아랫집 여자가 집이 떠나갈 정도로 아이를 다그치는 소리는 잘 들립니다.
성가실 정도로 잘 들립니다. 무어 그리 다그칠 것이 있다고
아침부터 시끄럽게 몰아붙이는지 묻고 싶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사랑도 아니겠지요.
다만 참고 있습니다. 저 소리를 다 인내하고 나면
들릴까요? 마포의 큰사랑이 내는 소리.
마포의 큰사랑이 참고 있는 소리.
마포의 큰사랑이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그 소리를
찾아서 오늘도 집을 나서야 합니다.
몇 시에 나갈까요? 마포에 해가 지면 나갈 생각입니다.
오늘은 일곱 시를 훌쩍 넘겨서 날이 어두워집니다.
몇 달 전에는 여섯 시도 안 되어 날이 어두웠습니다.
마포의 큰사랑은 해가 지면 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마포의 큰사랑은 낮에도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포의 큰사랑은
넓으니까요. 넓은 곳에서 넓게 있을 테니까요.
너무 넓어서 멀리 가지 않고서도 만날 것 같은데
일단은 나가야겠습니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나를 집 밖으로 내쫓는 소리는 아랫집의 아이가 내는 소리입니다.
집이 떠나가도록 울어제끼고 있습니다.
어린놈이 참으로 큰 소리를 냅니다.
엄마보다도 더 크게 울어제끼고 있습니다.
저 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갑니다.
마포의 큰사랑은 밖에 있습니다. 조용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문비 나무
안상학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가도
몸이 따라 아프면 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겨울이 길어야겠습니다.
고통을 새기려면 거센 바람에 오래 흔들려야겠습니다
슬픔을 아로새기려면 거친 눈보라가 제격이겠습니다
슬픔의 소리가 노랫말을 얻을 때까지
고통의 소리가 선율을 얻을 때까지
마음에 지지 않으려면 몸에 울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몸에 지지 않으려면 마음에 신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길고 긴 밤의 시간을 건너고 건너서
수없이 많은 겨울의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거짓말같이 봄이 오고 믿을 수 없는 여름이 오고
도둑같이, 다시 겨울을 부르는 가을이 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던지겠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잘라서 고통을 보자 하면 선율을 내놓겠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쪼아서 슬픔을 보자 하면 노래를 내놓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소리를 아픈 몸이 노래합니다
아픈 몸의 소리를 아픈 마음이 노래합니다
마음이 못내 아파서 죽을 생각을 하다가도
몸이 못내 아파서 다시 살 마음을 내었습니다
---창작과비평, 2022 여름호에서
어안이 벙벙하다
장옥관
‘어안’이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혀 안’에서 왔고 ‘벙벙하다’는 ‘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에서 왔다는데, 무심코 찾아온 이 말이 정작 어디서 온 건지 왜 떠올랐는지 마냥 얼떨떨한 순간이여
내 낡은 수첩 갈피에 어안이 벙벙한 순간 얼마나 빼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내 속은 또 얼마나 뒤집혀졌던가 넙치 눈알처럼 벙벙한 눈빛 감추고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모면한 일은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무참하고 참담한 날들의 차마 담아내지 못한 말들 늘 입 안에 맴돌고 뱉지 못한 말 누런 가래로 목에 들러붙어 내 어눌한 쉰 목소리로 삐져나오나니
예순 몇 해를 지금 소환해 물어보거니와
生,
그 한 마디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애지 봄호에서
경북 선산 출생―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시집『황금 연못』 외 다수.
매몰지
김기택
풀이 땅에 구멍을 뚫고 있다
땅속에 숨통을 심고 있다
수백 개의 콧구멍이 흙덩어리 숨을 들이쉬다가 멈춰 있는 곳 놀란 순간이 떨어지고 있는 흙으로 덮인 채 눈 뜨고 있는 곳 뒤틀리는 살덩어리와 흙 먹은 비명이 막힌 숨을 뚫고 나가려다 굳어있는 곳 필사적인 꿈틀거림이 두꺼운 살갗에 숨구멍을 뚫다가 부러져있는 곳 다 썩지 못한 가죽과 팔다리가 검은 핏물과 악취 가스가 되어 땅속을 발버둥으로 긁어대는 곳 한 삽 흙을 뜨면 두개골과 다리뼈가 뿌리처럼 우두둑 뜯겨 나올 것 같은 곳 봄이 되면 땅속을 긁는 발톱들 때문에 땅거죽에 소름이 돋는 곳 바람도 부스럼이 생겨 가려운 등을 나무와 바위에 비벼대는 곳 진저리치던 뿌리가 맹렬하게 말라 죽어 가는 곳
풀이 썩은 어둠에 푸른 파이프를 박고
여린 숨을 퍼 올리고 있다
----애지 봄호에서
* 김기택 약력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주고 개는 어디로 갔나』 등을 출간하였으며 김수영문학상 외에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풀
임봄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
드러낸 송곳니 휘날리는 갈기
완벽하게 전투태세를 갖춘
굶주린 초록의 호랑이들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낮게 몸을 웅크려
은밀하게 눈알을 굴리다
구름에서 스미는 피 냄새에
두 팔 벌려 뛰어오르며
포효하는 소리
사방 들썩이는 땅에
화단에 모인 꽃들
일시에 숨을 멈춘다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 2022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