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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던 그 해 그 거리에는 갑자기
죄지은 자들로 붐볐다
창녀들은 죄지은 자들을 부르러 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방 앞에는 죄지은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짓을 오래하다 보니 이제 반은 짐승이 됐어요
껌을 짝짝 씹으며 여자는 아랫도리를 벗었다
사내가 발가벗고 미친듯이 날 뛰었다
아아 개가 되고 싶어! 사내는
작은 언덕 밑에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있었으리라
죽지 않기 위하여 죽일 수도 있었으리라
----송찬호, [좁디좁은 세월의 길목에서]({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부분
모든 전쟁의 기원은 영토싸움이며,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선량한 민족도 전쟁에서 패배를 하면 사악한 민족이 되고, 제아무리 사악한 민족도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선량한 민족이 된다.
강한 자의 힘이 곧 법이고, 이 강자의 힘에 의하여, 살인, 강도, 강간, 약탈 등, 온갖 무차별적인 만행들이 자행하게 된다.
전쟁은 죄를 짓는 일이고, 이 전쟁은 사내들의 일이 된다. 그들은 전쟁 중에 금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이 성에 굶주린 자들을 위하여 사창가가 들어서게 된다.
염세주의자는 지혜가 있고, 이 세상을 저주하고 물어뜯는다.
이짓을 오래하다 보니 이제 반은 짐승이 됐어요
껌을 짝짝 씹으며 여자는 아랫도리를 벗었다
사내가 발가벗고 미친듯이 날 뛰었다
아아 개가 되고 싶어! 사내는
작은 언덕 밑에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모든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 즉, ‘제로 섬 게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몇 마리의 돼지를 잡아넘겼다
옷에서 식기에서 손에서 돼지피 냄새가 났다
칼을 놓고 사람들은 며칠동안 밥맛을 잃었다
이상하다 죽은 고기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밥에 얼굴을 처박고 부비면 아직도 따스하고
뭉클한 식욕의 덩어리, 식욕은 고삐 없는
냄새의 끈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여기저기
냄새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냄새를
따라 제짝을 찾아가고 새끼를 낳고 냄새를
맡으며 집에 되돌아온다
죽은 고기를 만진 손은 씻어도 씻어도 죄의
냄새가 난다 늘 뒤를 쫓는 그림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냥개, 숨기려 해도 사냥개의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송찬호, [냄새]({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부분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먹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 육식동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 초식동물에 의하여 힘(에너지)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육식동물이 더 강한가, 아니면 초식동물이 더 강한가?
초식동물이 적어지면 육식동물이 살아가기가 힘들어지고, 육식동물이 많아지면 초식동물이 살아가기가 힘들어진다.
“이상하다 죽은 고기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은 고기는 다만 먹이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여기저기/ 냄새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냄새를/ 따라 제짝을 찾아가고 새끼를 낳고 냄새를/ 맡으며 집에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러나 ‘냄새’는 생명살해와 관련이 있고, 이 생명살해는 죄의식을 낳게 된다. 따라서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이 자연의 이치를 혐오하게 되면, “숨기려 해도 사냥개의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이 세상의 삶의 정당성을 부인하게 된다.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든 독 오른 뱀 앞에
개구리 홀로 얼어붙은 듯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비늘 돋친 이 독한 세상마저 잊어버리려는 듯
투명한 눈을 반쯤 내려 감은 채
마른 번개 널름거리는 캄캄한 아가리 속 꿈틀거리는
욕망이여, 온몸 징그러운 무늬의 삶이여
예서 길이 끝나는구나 벼랑 끝에 서고 보니
길없는 깊은 세상이 더 가까워 보이는구나
마지막 한걸음, 뒤에서 등을 밀어
그래, 가자 가자
신 한 켤레 놓여 있는 물가
멀리, 깁고 기운 물갈퀴 하나
또 한세상 힘겹게 건너고 있다
----송찬호, [門 앞에서]({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전문
과연 이 세상의 삶은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상처와 고통과 불행들 뿐인 것일까? 과연 이 세상의 삶은 부와 풍요와 건강과 희망과 기쁨과 행복들이 없는 것일까?
송찬호 시인의 [門 앞에서]를 읽다가 보면 이 세상의 삶의 의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죽음의 신의 손짓만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의 신의 미소는 더없이 인자하고 친절하며, 그 어떠한 탕자마저도 다 받아들이고 있는 살인적인 미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탄생은 죽음의 첫걸음이고, 죽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다. 죽음의 세계는 이상낙원의 세계이며, 영원불멸의 세계이다.
좀 더 오래 살았거나 좀 더 덜 살았거나 그러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한국시문학사상 송찬호 시인의 [門 앞에서]는 ‘자살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송찬호,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부분
왜, 우리 인간들은 관을 둥굴게 짜지 않고, 왜, 우리 인간들은 무덤 속을 둥굴게 파지 않고 있는 것일까?
삶의 세계는 둥긂의 세계이며, 죽음의 세계는 사각의 세계이다.
사각은 차갑고 냉정하고 피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또한 사각은 어떠한 따스한 온기도, 어떠한 사랑의 씨앗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죽음의 신의 음산한 기운이 배어 있다.
요컨대 “미래는 죽었다 산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나, 과연, 우리 인간들의 삶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삶의 세계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
나는 송찬호 시인에게, 아니 우리 한국인들에게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가르쳐 준 바가 있다.
가설 속의 삶,
그것을 위한 정교한 말의 장치
내 이 결핍된 상상력이여
말의 화장술은 얼마나 놀라운가
교양있는 자들을 더욱 교양있게 하는
저 풍부한 표정 속에서
나는 문득 폐허를 본다
----송찬호, [옆에서 본 저 달은]({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부분
쇠로 만든 칼이 천하무적의 칼이라면 세 치 혀 속의 말은 천하무적의 지식인의 칼이다. 문인은 황금의 종족이고, 무사는 철의 종족이다.
모든 교육은 이 언어(말)를 획득하기 위한 지옥 속의 훈련과정이며, 이 언어를 획득한 자만이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이 세계를 지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느 때나 영원한 말도 없고, 또한 언제, 어느 때나 영원한 황제도 없다.
말의 세계는 “가설 속의 삶”이며, 오직 “교양있는 자들을 더욱 교양있게 하는” 뜬구름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말과 폐허----.
그러나 이 앞뒤가 꽉 막힌 염세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최고의 예술가들이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고은도 염세주의자이고, 신경림도 염세주의자이다. 김현도 염세주의자이고, 김윤식도 염세주의자이다. 황동규도 염세주의자이고, 정현종도 염세주의자이다.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기형도, 송찬호도 마찬가지이다.
오오, 이 세상을 더없이 혐오하고 헐뜯는 염세주의의 자식들이여!
만일 그렇다면 그대들의 명예와 명성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다친 개들이 아직도 울부짖고 있다
우리가 개가 아니라면
어찌 저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우리가 쓰는 지금 이 말도
이미 오래 전 개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을까
개들이 물어뜯던 말,
사육된 말
----송찬호, [말의 폐는 푸르다]({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부분
상처입은 개들은 고통스럽고, 그 개들은 그 고통 때문에 울부짖게 된다.
울음은 고통의 진수이자, 살아 있음의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울지 않지만, 살아 있는 자는 울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에는 상호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우리가 쓰는 지금 이 말도/ 이미 오래 전 개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을까”라고 상상을 하면서, “개들이 물어뜯던 말/ 사육된 말”이라는 송찬호 시인의 인식의 깊이는 가히 전율적이면서도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육된 말,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사육된 말을 물어뜯지 못한다.
이 꽃은 누구의 붉은 머리일까, 한 줄기 의혹처럼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붉은 말들
그렇게 붉게 물들었다, 말까지도
빨갱이로,
물들여 말을 처형하기 위하여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송이
꽃에 먹이를 던진다
꽃에서
사자로 덥석, 비약하는 말
말은 얼마나 먹고 싶은 욕망인가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마리
----송찬호,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마리]({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부분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은 상상의 힘이라고 한다. 이 상상의 힘에 의해서 자동차와 비행기가 탄생했고, 이 상상의 힘에 의해서 언어와 전지전능한 컴퓨터가 탄생했다.
꽃은 붉디 붉은 꽃이고, 붉디 붉은 꽃은 사자의 갈기머리를 연상시킨다.
사자는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송이”가 되고,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송이”는 사자가 된다. 반공주의자는 사자가 되고, 공산주의자는 꽃이 된다. 꽃은 빨갱이의 말이 되고, 사자는 그 빨갱이의 말을 물어뜯는다.
언어는 가치중립적이고, 언어는 좌우의 이념의 대립을 모른다.
이 가치중립적인 언어들을 적과 동지의 언어로 나눈 것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인 것이다. 그 결과, 말까지도 빨갱이로 물들여, 그 주체자들을 처형하는 반공주의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합니다
이름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송찬호,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전문
현실주의자는 화려한 명예와 명성을 쫓아가고, 이상주의자는 화려한 명예와 명성보다는 밤하늘의 별들의 세계를 쫓아간다. 현실주의자는 전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상주의자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앞세운다.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이 숙명적인 싸움에서, 그러나 언제나 승리를 움켜쥐는 것은 현실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주의자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하고, 어느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삼수갑산으로 은둔을 가게 된다.
은둔자는 패배자요, 병든 자이다. 이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없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러나 먼 훗날, 이 은둔자의 삶의 지혜가 우리 인간들의 현실주의를 극복하고, 만인들의 지상낙원을 연출해나가게 될 것이다.
부처와 예수처럼----.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인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송찬호, [구두]({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부분
인간의 콤플렉스는 비상콤플렉스이고, 이 비상콤플렉스 때문에 모든 새들이 동경의 대상이 된다.
새들에게는 국경도 없고, 도덕과 법률도 없다.
새들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상징이다.
송찬호 시인은 때로는 낭만주의자이지만, 그러나 그의 낭만주의는 그 날개가 부러진 새와도 같다.
낡디 낡은 헌구두를 버리고 그 새구두를 새에 비교하는 그의 상상력은 매우 신선하고 이채롭지만, 그러나 그의 비상의 꿈은 이내 사라져가 버리게 된다.
오오, 송찬호 시인이여!
두 발에 날개를 날고 높이높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나라로 날아가거라!
나는 멈칫하였다, 만지면
그 지팡이 금방 늙어버릴 것 같았다
삶이란 아주 짧은 것이다
----송찬호, [지팡이]({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부분
니체는 그의 책 {즐거운 지식}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 비참한 것, 늙은 것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결국 살인청부업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팡이는 늙은이의 의족義足이며, 늙은이는 지팡이가 없으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늙은이는 삶의 의지와 용기도 없고,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목표도 없다.
지팡이를 노인화시키고, “아주 짧은” 생을 바라보는 송찬호 시인의 시선은 영낙없는 염세주의자의 시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염세주의자는 이 세상에서 패배한 자들의 가장 매력적인 은신처이자 도피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고된 후 오랫동안 잠만 잤지요
등 밑이 따스했습니다
이른 봄날 아침, 모락모락
김 나는 땅을 파헤쳐보니
조그만 애벌레가
웅크리고 누워 있었습니다
날 풀리면 3공단에서 다시 만납시다
못다 이룬 잠을 위하여
흙을 도로 덮어주었습니다
----송찬호, [지하 생활자]({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부분
해고된 노동자는 밥그릇 싸움에서 패배를 한 자이며, 그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게 된다. 송찬호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이처럼 패배를 한 자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절망감과 상실감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받아들인 다소 기형적인 인물들로 나타나게 된다.
“해고된 후 오랫동안 잠만 잤지요/ 등 밑이 따스했습니다”라는 시구가 그렇고, “이른 봄날 아침, 모락모락/ 김 나는 땅을 파헤쳐보니/ 조그만 애벌레가/ 웅크리고 누워 있었습니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자포자기와 자기체념은 심리적(육체적)인 퇴행의 원인이 되고, 따라서 노동자는 [지하 생활자]의 애벌레가 된다.
해고된 후, 김장독에서 오랫동안 그 기나긴 동면의 잠을 자고 있는 애벌레들----. 요즈음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이 바로 이 애벌레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송찬호, [채송화]({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전문
나는 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이 [채송화]에 대하여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송찬호 시인의 [채송화]는 그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상징주의자이듯이, 모든 수사법들의 경연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 번째는 점층법이며, 그 점층법을 통해서 소인국의 이야기를 더욱 더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게 전개시켜 나간다.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라는 시구에 이어서,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고 그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그리고 그 두번째 시구에 이어서,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이라고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또, 그리고, 그 세 번째 시구에 이어서 그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면, 그 다음,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 이어져 나가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라고 그 대단원의 결말을 내리게 된다. 두 번째는 상징적인 수사법인데, 상징이란 언어를 단순한 기호로 보지 않고 그 기호에 의미를 부여한 어떤 것을 말한다. 예컨대 ‘채송화=작은 꽃’은 일차적인 의미에 불과하지만 '채송화= 난장이“는 이차적 의미가 되고, 또, 그리고 ‘난장이= 소인국’은 삼차적 의미가 된다. 이때에 ‘채송화=작은 꽃’은 말(기호)과 사물(지시대상)이 일치하는 것을 뜻하지만, ‘채송화=난장이’와 ‘난장이=소인국’은 말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고, 다만, 우리 인간들이 그 지시대상(채송화)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아버지인 태양’, ‘어머니인 대지’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그 의미부여자들(상징주의자들)의 천국이 되고 있는 것이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대단히 세련되고도 정교한 상징주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수사학자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은유법이고, 그 다음 네 번째는 환유법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제유법이다. 은유법은 유사성의 법칙으로 되어 있으며, ‘책=소인국 이야기’,‘배=버려진 구두’, ‘채송화꽃밭=소인국’이 바로 그것이다. 환유법은 인접성의 법칙으로 되어 있으며, 그 환유법에 따르면 채송화 곁에 버려진 구두가 있고, 버려진 구두 옆에 깨진 거울 조각이 있고, 깨진 거울 조각 옆에 고양이수염이 있고, 고양이수염 옆에 비둘기 똥이 있다. 제유법은 부분을 전체로 설명하거나 전체를 부분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왕관을 왕으로 설명하고, 왕을 왕관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송찬호 시인은 고양이수염으로 고양이를 설명하고, 비둘기똥으로 비둘기를 설명하는 제유법의 대가이다. 송찬호 시인이 상징주의자가 된 것은 이처럼 언어학에 민감하고 더욱더 정교하고 세련된 수사법을 구사할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찬호 시인은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내 알고 있는 시인 중에서 가장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이고, 언제, 어느 때나 모든 약속을 제멋대로 파기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송찬호 시인인 것이다. 그 싸가지 없음이 그의 시적 토대이고, 그 싸가지 없음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채송화]가 꽃 피어난다.
오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상징주의자들이여!
오오, 이 세상에서 가장 싸가지가 없고 또 없는 보들레르, 랭보, 송찬호 시인들이여!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송찬호, [고래의 꿈]({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부분
아름답다는 것은 크고 장대하다는 것을 말하지, 작고 왜소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새우는 아름답지 않다.
고래는 아름답다.
고래의 물보라는 고래가 피워올리는 꽃이다.
송찬호 시인이여,
부디 부디 바다의 왕자인 고래의 꿈을 간직하거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송찬호, [코스모스]({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부분
근면은 광기가 되고 성실은 맹목이 된다.
궁티의 한때를 벗어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그 궁티를 벗어나는 순간, 그의 육체는 그 부유함을 향유할 수 있는 건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생의 오후----.
오직,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아왔던 젊은 날만이 아름다울 뿐인 것이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송찬호, [만년필]({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부분
시인은 창백한 지식인이고, 이 창백한 지식인은 수많은 굴욕과 굴종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장군의 수염을 그린 만년필, 재벌의 자서전을 써준 만년필, 공원묘지의 비명을 써준 만년필,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게 된 만년필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시인의 만년필은 그의 궁티를 벗어나게 해준 만년필이며,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만년필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만년필을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나게 시적으로 표한할 수가 있는 것일까?
시의 아름다움은 기교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이처럼 정직한 자의 자기 반성의 아름다움이다.
기교는 아름다움을 질식시키지만, 정직함은 아름다움을 개화시킨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부분
송찬호 시인은 이제 명예와 명성도 얻었고, 따라서 그를 그처럼 괴롭혔던 궁티도 벗어나게 되었다. 그의 시는 제법 운치가 있고, 여유가 있게 되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라는 시구도 아름다운 거짓말이고,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라는 시구도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에 깜짝 놀라고, 그 콩알에 의해서 피를 흘리는 새와 짐승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거짓말이 이 [가을]의 시를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거짓말의 아버지이자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