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프토코스( πτωχός ) 가난에 대한 이해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 5:3)
가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토코스( πτωχός )와 페네스( πένης )가 있습니다.
프토코스(πτωχός)의 가난이 절대적 가난이라면 페네스( πένης )는 상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여기서(마5:3) 가난하다고 번역이 된 단어는 ‘프토코스( πτωχός )입니다. 그건 절대적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필요가 아니라, 이거 없으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숨 걸고 붙들게 되는 걸 ’프토코스( πτωχός = 절대적 가난)’ 라 그럽니다. 그 단어를 일부러 주님이 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가난(πτωχός)이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그것이 없는, 반드시 있어야 할 그것이 없는 상태로 생명,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61:1절에 보면 무엇에 대하여 가난한 것인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예수님이 인용해다 쓰신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 (사 61 : 1)
여기서 가난한 자,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프토코스( πτωχός =절대적 가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에 의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면 여기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가난한 자는 무엇에 대해서 가난한 자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소식!! Good New! 복음, 말씀, 그거 없으면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소식은 다만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에 의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의 그 프토코스( πτωχός = 절대적 가난), 심령의 가난은 그것 없으면 그 생명, 그 진리 없으면 곧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게‘프토코스( πτωχός = 절대적 가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심령이라는 이 말도 곧 성령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이 너무 너무 갈급 되어 그것만이 내 생명이야! 라고 그걸 자각하고 있는 자들을‘프토코스( πτωχός )’ 절대적 가난 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령(마5:3)이 가난한 자에서의 그 심령은 호 프뉴마 (ὁπνεῦμα ), 관사가 붙은 프뉴마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혹은 진리의 성령, 진리의 말씀,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냥 마음, 심령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을 떠 올리면서‘그래 그것만 있으면 살 수 있지, 이거만 해결 되면 살 수 있지’라고 많이 하는데, 반면에 그 프토코스( πτωχός = 절대적 가난 )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성령,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러한 프토코스( πτωχός =절대적 가난 )들은 페네스( πένης =상대적 가난)인 그것은 날 살릴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나를 살릴 수 있는 그거 없으면 나는 죽어요! 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들을 프토코스(πτωχός= 절대적 가난)라 그럽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진짜 살아나는데 필요한 그걸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하면 엘레모수네, 구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엘레모수네라는 단어 자체가 에이레네 (εἰρήνη), 평강, 평화라는 뜻의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엘레모수네가 되어서 그 프토코스(πτωχός =절대적 가난)의, 가난한 그에게 그가 원하는 그 진리의 말씀이 주어져서 그가 이제 살아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뜻, 그 뜻대로 한 방향을 향하여 하나님과 한 멍에를 지고 가면 그걸 에이레네, 평강, 평화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엘레모수네, 구제라는 것은 프토코스(πτωχός =절대적 가난)의 상태,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 성령 안에서 그 말씀에 갈급한 그 자에게 그 말씀을 주어서 그를 구제해 내는 게 엘레모수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한 방향으로 가니까 그걸 에이레네,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게 하나님과 반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면 이게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빠꾸어 말하면 그걸 하나님을 대적 한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에이레네, 평강, 평화를 이루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게 엘레모수네, 구제입니다.
그런데 그 엘레모수네, 그거를 그들이 필요한 그 진리가 아닌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표피적인 어떤 것으로 전해주면 그들을 먹이는 게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그들에게 독을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독극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기는 주는데 배나 더 지옥자식을 만든다고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입니다.(마23:15)
그렇게 성경의 올바른 진의도 담지 못한 소리, 하늘의 올바른 진의도 담지하지 못한 그냥 세상의 소리로 주게 되면 그게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니? 그러니까 주의하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엘레모수네 구제나, 프로슈코마이(기도)나 다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기도(프로슈코마이)도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그 뜻, 아가페 ἀγάπη 사랑이기 때문에 이걸 받아서 아! 그거이군요! 하나님 그거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다는 게 이것입니까? 라고 그걸 다른 이에게 흘려주고 또 나에게 그렇지! 하나님이 주시는 게 그거지! 하면서 고백했던 게 시편 기자들의 기도였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인들, 아니 신이 뭔지도 모르는 어떤 이가 정한 수 떠놓고 비는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이 다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에게도 기도하는 자기 암시라 것도, 긍정의 힘, 이런 게 나에게 기도하는 거니까, 모든 인간이 다 기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건 다 “나”의 힘이였고,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살리는 건 그 진리, 알레떼이아 (ἀλήθεια ), 그거 밖에 없다라는 것을, 페네스( πένης =상대적 가난)가 아닌 그 프토코스(πτωχός=절대적 가난)의 상태로 하나님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이 페네스( πένης=상대적 가난 )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이걸 예수님이 나에게서 칼로 오신 말씀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것도 좌우에 양날 선 검, 이걸로 끊어내는 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장소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천국의 통치, 하늘의 통치, 하늘의 섬김을 받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라고 했을 때에 그것도 프토코스(πτωχός=절대적 가난)이고,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너는 가서 네가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 라고 했을 때에도 그 가난한 자도 프토코스(πτωχός=절대적 가난)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 나라가 된 이들은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이 프토코스(πτωχός=절대적 가난)로 갈급해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말씀 그 진리를 갈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 땅의 존재들은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페네스( πένης=상대적 가난 )는 페노(peno)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로 생활에 불편 하지만 없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대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페네스는 진짜 돈이 없어서 먹을 게 없어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서 손수 일하여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페네스(pevnh")입니다. 그걸 상대적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가난인 프토코스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 상대적 가난은 그가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건 상대에 비해 가난한 나 때문에 상실감이나, 박탈감이나 이런 걸로 아파하는 것 뿐입니다. 그걸 페네스( πένης ), 상대적 가난 이라고 그럽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가난한 자를 부요케…등 가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페네스( πένης =상대적 가난)가 아니라 프토코스(πτωχός),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세상에서의 굶주림이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한 가난한 자 보다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없어 죽은 자, 프토코스(πτωχός)의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7 : 37,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생명의 말씀 되시는 예수님에게 와서 그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 생명의 말씀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닌, 자기주관적인 말이 아닌 참 진리로부터 생명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가 바로 예수를 믿는 자이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πτωχός=절대적 가난) 자가 되는 참 성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하는 프토코스(πτωχός =절대적 가난)의 가난한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생활의 필요에만 목말라하는 페네스( πένης = 상대적 가난)의 가난한 마음이 있는가?
이 둘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한 번 더 진정성 있게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