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픽션]
우리는 왜 이곳에 서 있는가?
어느 가을 밤, 나연은 해변에 서 있었다. 바다의 물결은 검은 비단처럼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파도 소리는 멀고도 가깝게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울림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목소리들이 숨어 있었다. 나연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느껴야만 했다. 그녀는 그 목소리들을 듣기 위해 이곳에 와 서 있었다.
나연이 살고 있는 도시는 한때 번성한 항구였다. 그러나 그 아래엔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흔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전쟁, 식민지배, 억압, 수탈의 시대가 지나간 자리.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처였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그 상처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지배가 그들의 삶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 지배는 기억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연은 오래된 기록 보관소에서 우연히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는 도시에서 사라진 한 여인의 것이었다. 그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항구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왔다. 그녀의 기록은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의 삶에 개입하고, 과거의 억압이 지금도 여전히 그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잊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잊지 못한다." 나연은 일기 속 이 구절에 이끌렸다. 마치 그녀를 위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계속해서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연은 항상 같은 해변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나연은 그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어떤 비밀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연의 꿈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땀에 젖어 있었고,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터질 듯한 불안감이 자라났다. 그녀는 도시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무거운 그림자가 그녀를 따라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그 그림자는 마치 과거의 망령들이 그녀를 응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눈앞에 드리운 그늘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연은 그 해변에서 또다시 꿈에서 보았던 목소리들을 들었다. 이번에는 꿈이 아니었다. 파도 소리는 한결같았지만, 그 속에 섞인 목소리들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그 순간, 파도는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속삭였다.
"기억해줘, 우리를."
나연은 이 목소리들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목소리였다. 억압받고 상처 입은 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자신이 잊혀진 존재들이 아니라, 지금도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들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너머의 경계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연은 점점 더 깊이 그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정신은 육체의 경계를 넘어서, 바다 속 어딘가에 있는 무형의 세계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곳은 죽은 자들의 세계였고, 동시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세계이기도 했다. 시간은 그곳에서 더 이상 직선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점에서 서로 얽혀 있었다.
나연은 그곳에서 무수한 손들이 그녀를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손들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그러나 나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 질문이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억압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들은 기억되지 못했고, 그들의 고통은 잊혀졌으며,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기억되고, 이해받기를 원했다. 그들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 역시 하나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나연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전할 미래를 통해 다시 쓰여져야만 했다.
그날 밤, 나연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곳에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은 더 이상 나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이어졌고, 그 목소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영원히 지속되었다.
이 도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