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36편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서론(序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란 무엇인가 ?
선가(禪家 선종)에는
《일전어(一轉語)》라고
하는 말이 있다.
선사(禪師, 佛祖師,
또는 선종의 큰 스승)가
거두절미(巨頭絶尾)하고
단 한마디
말(화두, 공안)로써
미혹(迷惑,
망령된 유혹)을 깨부수고
심기(心氣 마음의 기운)를
일전(一轉 하나로 전환)시켜서
전미개오(轉迷開悟,
미혹된 마음을 깨우침)하도록
하는 법문(法問)을
바로
화두(話頭, 본참화두,
또는 공안(空案))라고
말(언급)한다.
이러한
옛 선사(禪師),
또는 불조사(佛, 祖師)들의
선문답(禪問答 묻고 답함)과
가르침(敎義)들이
공안(空案)
화두(話頭)로
하나 둘 모아지고 이루어져
쌓이고 또 쌓여져서(累積)
편집(編集)되었다.
바로 그 것이
선어록(禪語錄 선종)의
가장 백미(白眉 최고봉)로서
손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이다.
이렇듯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는
다시 한번 우리들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그러므로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이던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가
아니던
누구나 한 번씩은
《벽암록(碧巖錄)》의
일독(一讀)을 권(勸勉)하며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을
여기에
풀어서 해석(解釋)하고
자세히 설명(說明)하며
나와 함께
공부(功夫)를 하고저
기록(記錄)하고
올려 본다.
본론(本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 의심덩어리)를
들더라도(참구, 궁리)
단순히
염화두(念話頭 관념 몰두)만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疑心, 의정덩어리,
즉,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일으킬(初發心) 때는
반드시
먼저 분노심(噴努心,
간절한 땀과 노력을 내뿜어
내어야 한다는 뜻)을 내어
"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께서는
왜 어째서
단 한 글자로《무(無) !》
없다고 했을까 ?
"
하고
의심(疑心, 의정덩어리,
궁리, 명상, 참선, 참구)을
해야 한다.
이러한
분노심(噴努心,
간절한 땀과 노력을 내뿜어
내어야 한다는 뜻)은
소리(聲)를 내거나(포효)
내지 않거나(無嚆) 하는 것은
학인(學人 수행자)들이
스스로 가려서 선택(選擇)할
문제이지만
중요(重要點)한 것은
이러한
하나의《무(無)》자(字)를
"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께서는
왜 어째서
단 한 글자로《무(無) !》
없다고 했을까 ?
"
하는
의심(疑心,
의정덩어리 話頭, 公案)을
스스로 거듭 끊임없이
의심(疑心)하고
스스로
참구(參究, 궁리,
명상, 참선, 수행정진)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조주(趙州從諗, 778~897)
대선사 화상(大禪師 和尙)의
《무(無)》자(字)를
무조건적으로
간(看 참구, 궁리)하는 것이
아니다.
조주(趙州從諗,
778~897) 대선사(大禪師)의
《무(無)》자(字)를
단지
생각(觀念, 看, 참구)만 하라고
말(說法)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오묘(奧妙)하고도
신통묘용 기막힌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 의심덩어리)를
드는(참구)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정(疑正, 의심덩어리,
즉,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반드시
일으켜야(發心) 내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주지(周知, 두루 여러 사람이
대부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의
사실이다.
앞서,
대오지심(待悟之心,
막연히 큰 깨달음을 노력없이
기다리는 마음,
즉,
게으름, 태만, 안일함)을
경계(驚戒)하여
쓸데없는(無用)
알음알이(知識, 번뇌 망상)를
짓지(作造) 말라.
한 것도
그러한
알음알이(知識, 번뇌 망상)가
참되고
참 된 옳고 바른
의정(疑正, 의심덩어리,
즉,
화두(話頭)
공안(公案))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정(疑正, 의심덩어리,
즉,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조금이라도
빨리 앞당겨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 의심덩어리)를
드는 요령參求要伶)을
잘 배움(修行)하고
숙지(熟知, 숙련, 단련)해야 할
필요(必要)가 있다.
더러는
이러한 요령(중요한 방법)을
정확히 터득(攄得, 익힘)하지
못함으로써
공력(功力,
시간, 공간, 기운, 힘)을
헛되이 흘려
낭비(浪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의
《무(無)》자(字)
단 한글자를 간(看, 참구)할 때
그저 무(無) !
무(無) ! 라고만
되풀이하여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 의심덩어리)를
드는(참구) 경우가 있다.
이야말로
잘못(오판) 되어도
한참 잘못된 방법(誤謬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갈 때도
오직 무(無) !
앉을 때도
오로지 무(無) !
옷(衣)을 입거나
밥(食飮)을 먹을 때도
무(無) !
언제나
항상심(恒常心) 무(無) !
라고 하며
혹은
천천히 하기도 하고
혹은
호흡(呼吸,
들숨 날숨)과 관련지어
급(急急)하게 하기도 하는 것
등(etc)은
일체(一切)
모두 잘못(誤認, 왜곡)된 것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조주(趙州從諗, 778~897)
대선사 화상(大禪師 和尙)의
그《무(無)》라는 말에
참되고 참 된 뜻과 의미를 찾아
의정(疑精, 의심덩어리,
즉,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일으켜야지
헛깨비
부목정령(附木精靈)처럼
무작정 달라붙어서
(고정, 집착)
"
그저 무(無) !
오직 무(無) !
"
라고
입(口說, 妄言)으로
머리(頭, 관념, 생각, 두뇌)로만
떠들며
말(妄口,妄說)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코
이렇게 잘못(誤認, 왜곡) 된
방법(方法)으로는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일으켜(初發心)
이루어 냄(성불, 열반,
Nirvana, 해탈 )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
옛 경전(經典)에
기록(記錄)하여 전하기를
어떤 스님(僧)이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에게 묻되
“
구자유불성
(狗子有佛性)
개(狗)에게도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이
있습니까 ?
”
물음(問)하니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께서
답(答)하시되
“
없다(無,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
하였으니
바로
이《무(無)》자(字)
단 한 글자(文章 화두)는
문득
이 모든 고해(苦海)
생사(生死 윤회, 삶과 죽음)의
의심(疑心 의구심, 번뇌)을
깨뜨리고 부숴내는
칼(지혜의 칼,
취모검(吹毛劍))인
것이다.
―《서장(書狀)》―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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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