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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그날이 오면】 2024년 9월 29일(일) 10~12시
심훈 생가터(흑석동 성당) ― 심훈공원 ― 학도의용병현충비 ― 효사정
1. 시인 연보
1901년(1세)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珽)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우섭, 원섭, 명성)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 이름은 대섭(大燮), 호는 해풍(海風), 필명은 훈(熏). 아버지는 온로보통학교 교장, 신북면장이었다. 큰형 우섭은 희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와 경성방송국 과장이었다. 작은형 명섭은 동경 청신학원 졸업생으로 심훈의 미완성 소설 「불사조」를 완성했고,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했다.
1915년(16세)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입학하다.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박헌영 등이 동기생이다.
1917년(18세)
전주 이씨 해영(海暎)과 결혼. 일본인 수학 선생의 민족차별에 대한 항거로 백지 답안 제출로 낙제, 유급당했다.
1919년(20세, 4학년)
3·1운동에 참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학생 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 투옥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았다.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종결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11월 6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이미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1920년(21세)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 배움. 1921년 항주로 가서 지강(芝江)대학교 극문학과에 재입학했으나 1922년 중퇴했다. 베이징에서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감회를 받았다.
1923년(24세)
중국에서 돌아와 최승일, 이경손, 김영팔, 임남산, 안석주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연극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려는 의도였다.
1924년(25세)
이해영과 이혼.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번안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 번역을 맡았다.
1925년(26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의 후반부를 대역했다.
1926년(27세)
필명 ‘훈’으로『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26년(27세)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 사건으로『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 철필구락부는 1924년 11월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만든 언론운동단체. 1925년 4월 무명회(無明會) 언론운동단체와 공동으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5월 『조선일보』『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임금인상 투쟁으로 신문사 경영진의 비위를 거슬렀다. 1926년 일제의 언론 탄압에 항의하여 언론 옹호 연설회를 개최했다. 4월 26일 순종(융희황제)이 서거하자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고종의 서거가 3·1운동의 한 계기) 5월 16일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를 게재해 6·10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27년(28세)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고,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주연, 감독(제작사 계림영화협회) 10월 26일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11월 22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만났는데, 고문과 병으로 몰골이 상한 동창생의 얼굴을 보고 분노해 「박군의 얼굴」을 썼다.
1928년(29세)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중외일보』, 7. 11∼28) 등의 평론 발표했다.
1930년(31세)
3월 1일 시작품 「그날이 오면」 집필.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으로 중단되었다. 12월 24일 안정옥(安貞玉)과 재혼.
1931년(32세)
『조선일보』 사직.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으로 잠시 일하다가 사상 문제로 그만두었다. 8월부터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으로 중단되었다.
1932년(33세)
부모가 살고 있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해 창작 생활에 정진했다.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무산되었다.
1933년(34세)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를 집필해 7월 10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 『중앙』 창간호 편집을 맡았다.
1934년(35세)
1월 『조선중앙일보』학예부장 사임. 장편소설 「직녀성(織女星)」을 3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당진에 ‘필경사(筆耕舍)’라는 자택을 짓고 「상록수」의 집필에 매진했다.
1935년(36세)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창간 15주년을 맞아 장편소설을 공모하자 「상록수」를 응모해 당선되었다. 당시 부곡리에서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이 농촌 야학 운동을 운영하며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12명의 젊은이들이 공동경작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높게 평가해, 1935년 1월 경기도 반월면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펴다 요절한 최용신(崔容信)의 이야기를 연결해 완성한 작품이었다.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상금 500원 중 100원을 기부하여 상록학원(현 상록초등학교의 모체)을 설립해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도왔다.
1936년(37세)
1월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신동아』)를 발표했다. 8월 16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감격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마지막 글로 남겼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상경해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서 침식하며 집필에 몰두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렸다.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36세로 타계했다.
200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사진들
1) 심훈 생가터
2) 심훈 가계도
3) 심훈 조각상(심훈공원)
4) 심훈 시비(심훈공원)
5) 심훈의 집(필경사)
6) 시집 『그날이 오면』의 일제 검열 모습
3. 대표 시 읽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박 군(朴君)의 얼굴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 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병(甁)에 담가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 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사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社)에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뀌어져 까마귀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上海)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 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獄門)을 나섰구나.
박아 박 군아 ××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殘骸)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 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조선은 술을 먹인다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입을 어기고 독한 술잔으로 들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火葬)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처럼 공허하여
그 마음 그 생활에서 순간이라도 떠나고자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콜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시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러리스트'요,
파출소 문 앞에 오줌을 깔기는 주정꾼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자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한목(電桿木)을 붙안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志士)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腦]을 녹이려 한다.
생재목(生材木)에 알콜을 끼얹어 태워 버리려 한다.
풀밭에 누워서
가을날 풀밭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 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오리까.
바라면 바라다볼수록
천리 만리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 벌에서는 몇 천 명이나 우리 동포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惡刑)까지 당하고
몇 십 명씩 묶여서 총을 맞고 거꾸러졌다는 소식!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안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이 명랑한 햇발을 쬐어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두렁에 버티고 선 허자비처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에 손톱 발톱 달리다가
풍년 든 벌판에서 총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날 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르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 하늘이외다
분한 생각 내뿜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이 들 듯하외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兩君)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4. 심훈 작품 세계
심훈의 삶과 문학창작 과정
심훈은 일제강점기에 문학․언론․영화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인이다. 그동안 심훈은 저항주의 작가, 농촌계몽주의 작가라 하여 단편적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생애와 그가 활약한 분야․작품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러한 평가는 극히 일부분일 뿐, 그것만으로 심훈을 정의내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동안 심훈에 대해서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를 구분하여 작가의식을 검토하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심훈은 온 생애동안 시와 소설, 시나리오, 수필 등을 다양하게 창작하였는데, 하나의 장르만으로 그 의식을 추론하는 것은 전체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연구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심훈의 생애를 되짚어 볼 때, 그의 문학적 출발은 3․1만세운동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9년에 있었던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탓으로 심훈은 일본 헌병에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그 안에서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이라는 편지글을 썼다. 그리고 출옥해서는 감방에서의 체험을 살려 <찬미가에 싸인 원혼>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전하는 심훈 작품들 중 최초의 소설이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라는 편지글에서 묘사된 노인의 임종 부분이 <찬미가에 싸인 원혼>에서는 중심 사건이 되어 소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은 심훈 문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것으로, 3․1만세운동의 경험은 이후 심훈이 추구한 예술 활동의 기본정신으로 작용한다.
심훈은 1920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북경을 거쳐 상해를 지나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는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을 비롯하여 여운형과 박헌영, 이동녕과 이시영 등 다양한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3․1만세운동과 더불어 중국 유학은 심훈이 의식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는데, 훗날 심훈은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의 소설을 창작하게 되었다. 귀국해서 심훈은 다양한 문학단체 활동을 하였다. 지강대학에서 극문학을 전공한 그는 극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극문회’를 조직해 가담하기도 했고, ‘염군사’에서 ‘카프’로 이어지는 조직에도 몸담았다. 또한 라디오방송극연구회에 가담하여 방송극을 연구하고 각색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면서 번안소설 <미인의 한>의 후반부 번역을 담당하였고, 1926년에는 영화소설 <탈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영화소설이란 영화와 소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심훈은 작품을 연재할 당시 등장인물에 당시 유명 배우들로 배역을 정해 놓고, 배우들의 실연 사진을 작품과 함께 실어 생생함을 더했다. 심훈은 <탈춤>을 실제로 영화화할 계획으로 이 작품을 시나리오로 각색하였는데, 제작 단계에서 재정난에 부딪혀 영화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심훈은 영화배우 강홍식과 함께 일본 교토의 나카츠촬영소로 영화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돌아와서는 직접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직접 쓰고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극’과 ‘영화’는 매우 대중적인 장르로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심훈이 점차적으로 대중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작가의식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는 한편 시도 꾸준히 창작하였다. 시에서는 시대에 대한 울분과 무력감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한편 현실을 떠나고자 하고 방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심훈의 이러한 작품의 행보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띤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는 감성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사조로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없는 세계를 동경함으로써 현실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곳이 되고 여기에서 현실에 대한 ‘저항’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훈의 작품들은 이러한 낭만주의적 특성에 잘 들어맞는다. 이러한 경향으로 심훈은 한설야, 임화 등 카프 계열 작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먼동이 틀 때>를 비판한 한설야와 심훈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대중에게 오락과 위안을 주는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예술관을 피력하였다. 또 그는 이후의 글들에서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영화는 쉽고 단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예술관은 영화뿐 아니라 문학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카프 계열 작가들과의 논쟁은 이후 심훈이 시대현실에 대해 성찰하고 문학적 형식을 정립해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중성과 낭만적 감수성을 발현하던 시기를 넘어서서, 이후부터는 낭만성과 역사의식을 조화시키려는 방향으로 작품을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현실극복의 의지와 도전의 미학을 그려냈다. 시에서 자연주의적 경향과 낭만적 정취도 보이지만 이것도 역시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과 당대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으로 연결된다. 심훈의 문학 창작과정의 특징으로는 우선 그의 작품이 대부분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심훈은 개인적 체험을 확장하여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과 느낀 것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하였는데, 가까운 인물을 호명하며 대화체 기법으로 표현하여 대상과 시적 화자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였다. 또 소설을 창작할 때도 주변 인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모델로 활용해 작품의 모델로 삼아 서사화하였다. 가까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이를 확대하여 시대적 공감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2. 심훈의 시 세계
심훈은 시․소설․평론․영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식민지의 현실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직접적으로 작품에 드러내었다. 그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경성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여 망명과 유학을 겸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의 작품 창작에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눈과 입의 역할을 하던 출판물에 대한 가혹한 검열을 자행하였다. 심훈은 1932년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검열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육필원고의 영인본으로 그의 시에 가해진 일제의 검열을 엿볼 수 있다. 육필원고의 표제에는 “治安妨害”와 “一部分削除”와 “主意”의 붉은 도장과 매 쪽마다 “檢閱”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나 독립의 의지를 표출한 그의 시에는 가혹한 검열이 이루어졌다.
심훈의 시는 육필원고에 64편, 유고시집에 65편, 전집 1에 77편이 있다. 1978년《문학사상》에서 발굴한 시 4편이 있으나 시 <低唱三首>와 육필원고의 <짝 잃은기러기>는 동일한 작품이다. 일기에 수록된 3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심훈
의 시는 총 85편이다.
민족의식 고양과 항일 저항시는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 조국광복의 염원, 민족의식 고취로 형상화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말살을 위해 가혹한 식민 통치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통곡하는 심정으로 식민지의 현실을 시로 나타내었다. 시 <朴君의 얼굴>, <R氏의 肖像>에는 일제가 독립투사들에 가한 만행에 대한 강한 저항을드러낸다 <輓歌>와 <哭 曙海>에서는 장례식을 통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일제에 복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풀밭에 누워서>는 간도와 만주로 이주하여 살던 우리 동포에게 가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시 <내 故鄕>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훼손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었다. 심훈의 시에서 통곡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을 모순을 폭로하고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시 <痛哭 속에서>에서는 통곡을 통하여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시 <獨白>과 <밤>은 식민지의 울분을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 <玄海灘>과 <잘 잇거라 나의 서울이어>에서는 일제의 수탈로 조국을 떠나야 하는 식민지의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였으며, <近吟三首>에는 고통받는 식민지 농촌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국 광복의 염원은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확신을 시에 나타내었다. 시 <그날이 오면>, <生命의 한 토막>에서는 자기 신체의 파괴를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이루려는 간절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筆耕>은 붓을 쟁기에 비유하여 척박한 식민지의 현실을 갈아엎고 광복의 씨앗을 뿌리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광복에 대한 확신은 <너에게 무엇을 주랴>에서는 ‘너’로 상징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 시 <어린 것에게>, <어린이 날>은 광복된 조국을 어린것에게 물려주려는 시인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는 반드시 조국이 광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였다.
민족의식 고취에서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문화 민족의 긍지를 작품화하였다.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는 식민지의 현실에 좌절하였다. 시인은 이러한 좌절의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시 <오오, 朝鮮의 男兒여>에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가 우승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강인함을 노래하고 있으며,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염원과 의식의 개혁,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정과 신념을 시에 나타내었다. 시 <거리의 봄>, <가을>에서는 눈물과 탄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염원과 의식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마음의 烙印>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의식의 개혁을 요구한다. 시 <밤거리에 서서>에서는 이러한 식민지의 현실에 좌절하는 민중들에게 다시 일어날 희망을 주며, 지식인의 의식 개혁을 요구한다. 시 <朝鮮은 술을 마신다>에서는 술에 취해 희망도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정과 신념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며,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시 <봄의 序曲>과 <새해의 宣言>에서는 수미쌍관법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정과 신념을 드러내었다. <젊은이여>는 조국의 자연에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정을 느끼라고 한다.
심훈은 거친 언어로 정화되지 않은 감정을 직설적으로 시에 표출하지만 당시 낭만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몽환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식민지의 현실을 리얼하게 형상화하였다 그의 시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겠다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과 복수의 의지를 담고 있으므로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로 이어지는 항일 저항시의 맥을 잇는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모습과 일제의 만행을 인체 이미지의 가학적인 파괴로 시에 나타내었다. 식민지 시대의 모순과 울분을 철저한 자기희생으로 극복하고 있으며, 조국광복의 염원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러므로 심훈은 우리 문학사에서 민족주의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3. 심훈의 『상록수』 세계
「상록수」(『동아일보』, 1935. 9. 10 ~ 1936. 2. 15)
고등농림학교 학생인 박동혁(朴東赫)과 여자신학교 학생인 채영신(蔡永信)은 모 신문사가 주최한 학생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계몽 대원 중 우수 대원으로 선정되어 체험담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동지가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농촌을 지키려고 내려간다. 박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채영신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특파로 경기도 반월면 천용리(샘골)로 가 농촌사업의 기초적인 작업에 임한다. (『상록수』에서는 천용리가 청석골로 바뀐다.) 박동혁은 농우회관 완성, 부인 근로회 조직, 공동답 설치, 소작권 이동 금지, 고리대금업의 금지, 진흥회 운영, 반상타파론 계몽 등을 추진한다. 채영신은 강습소 운영, 청석학원 건립 등으로 사람들로부터 판사, 의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온갖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렇지만 채영신은 박동혁과 달리 경제 투쟁이나 정치 투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업 진행을 편지로 알리며 의논하고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면서도 동지 의식이 견고해 3년 뒤 후진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때가 되면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던 중 채영신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점차 몸이 쇠약해진다. 학원 낙성식장에서 하객으로 초대된 박동혁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박동혁은 맹장염 수술을 한 영신을 정성껏 간호한다. 박동혁이 학산리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역경이 놓였다. 동네의 악덕 지주이자 고리 대금업자인 강기천(姜基千)이 농우회 회원들을 매수하는 등 박동혁의 농민운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화가 난 박동혁의 동생 동화가 회관에 불을 지르는데, 박동혁은 동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투옥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채영신은 서울연합회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정양 겸 유학을 떠난다. 그렇지만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채영신은 다시 일에 몰두하는데, 과로와 각기병과 맹장염의 재발로 숨을 거두고 만다. 채영신의 유언대로 청석학원이 보이는 곳에 묻힌다. 감옥에서 풀려난 박동혁이 청석골에 갔을 때 채영신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동혁은 비탄에 잠기지만, 두 사람 몫을 해낼 것을 다짐하며 한곡리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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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 그리고 이기영의 《고향》은 30년대 전반에 나온 신문 연재소설로, 지식인 주인공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계몽운동을 벌인다는 표면적인 내용면에서 공통점은 갖고 있으나 각각 상이한 이념지향과 표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특색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흙》은 이광수의 점진론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이기영의 《고향》은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상록수》는 사상면으로 볼 때 이 두 작품의 중간위치에 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흙》의 허숭이나 《상록수》의 박동혁이나 그리고 《고향》의 김희준은 모두 당시로는 교육받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허숭은 변호사로 사회적 명예나 재산을 확보한 인물이다. 또한 희준 역시 동경유학을 갔다 온 인텔리이다. 이들은 식민지치하에서도 안락을 누릴 수 있는 형편이지만 고향의 농촌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다.
《흙》과 《고향》에 비해 《상록수》의 박동혁과 채영신의 귀농 과정은 보다 자연스럽고 분명하다. 이들도 농촌 출신으로 도시에 나와 공부를 하지만 그처럼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농촌의 가난한 부모에게 학비를 타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졸업을 하여도 생계유지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런 점으로 해서 주인공들의 귀농이 도피적인 성격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동혁과 영신의 농촌에 대한 인식이나 사명감을 ‘선구자 의식’임을 그들의 입을 통해 강하게 부각시켜 놓고 있다. 《상록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식인의 생활이 농민과 유리된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고, 농민 속에 들어가서 농민의 실상을 체험을 통해 알아내는 한편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농민 위에 군림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농민 속의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식인의 농민화를 뜻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농촌봉사활동을 하는 지식인은 농촌운동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은 소수의 특혜 받은 계층으로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욕망을 버리고 농민 속으로 들어가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 즉 농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흙》에 드러난 농촌의 모습이나 농민의 삶은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가난하며 더럽고 무지한 삶의 모습이다. 농촌의 피상적인 모습만 보여 줄뿐 그들이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혹은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황기수와 한갑의 싸움 장면에서 농촌의 구조적인 모순, 즉 식민치하에서 농민들이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여 지주와 말단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정이 암시되고 있으나 이러한 사건이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데까지는 못 미치고 있다. 이기영의 《고향》에는 원터라는 충청도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당시 수탈당하고 있는 농민의 실상을 여러 가지의 현상을 동원해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형상화해 놓고 있다. 일본 상업자본의 침투로 빚어진 농촌의 갑작스러운 근대화와 농민들의 값싼 노동력의 착취, 또는 계속 떨어지는 쌀값, 고리대금업, 가혹한 소작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촌의 궁핍화 과정에서 계층분해 양상 등 당시 농민의 실상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다. 특히 농민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던 마름의 횡포를 안승학이라는 인물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농민들은 수동적인 입장으로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역사 변혁의 잠재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방개나 인동은 바로 그러한 예이다. 등장하는 다양한 감정과 의식의 표현을 통해서 그들의 풍속과 심리를 그려내고 있는 점에서, 《고향》은 이 세 작품 중에서 당시 농민의 삶을 객관적 현실에 의거해서 반영한 작품이다.
《흙》에 보이는 도시인의 농촌사업은 말 그대로 시혜적인 것이다. 농민을 동정하여 경제적인 자선에 의해 그들을 도와주려는 행위는 농민의 지엽적인 생활의 문제는 해결해 줄 뿐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춘원은 이러한 해결책의 제시는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체제와의 대결은 피하면서 비정치적인 것만을 주장하였다. 농촌계발의 내용을 보면: 농촌의 계몽은 문맹 퇴치, 위생 생활, 협동심 교육, 이조적 유교 사상 청산 교육 등등이 있다. 《흙》에 나타난 농촌운동은 이러한 춘원의 평소 지론 즉 현 체제 내에서의 문화 계몽 운동을 소설화한 것이다.
《상록수》의 농민운동은 《흙》에 비해서는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자보급이라는 단순한 계몽을 넘어서서 농민들의 자립과 단결을 위해 무장시키며 또한 이러한 문화운동을 경제운동으로 전개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농촌의 문제점과 대응책을 주인공의 입을 빌어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반봉건 반체제적인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고향》에서는 보다 더 정치적인 성격의 농민운동이 나타난다. 김희준은 청년회를 지도하기도 하고 야학 활동에도 정열을 다하지만 자신은 실제적인 농촌개발에는 별 성과가 없음을 자책한다. 이것은 작가가 당시의 문화적인 농촌계몽의 한계를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는 농민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응책으로 계급투쟁을 바탕으로 하는 농민운동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김희준과 소작인들이 마름 안승학을 상대로 소작쟁의를 벌이는 것이 그려져 있으며 또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첫째, 심훈은 식민지 현실, 훼손된 세계를 극복하고자 한 투철한 작가의식의 소지자이다. 심훈이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은 프로문학의 당위성을 인정한, 이데올로기를 구실로 한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사회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을 강조한 문학이었고, 언어 민족주의적 신념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은 그의 작가의식은 일관되어 그의 작품을 꿰뚫고 있으며, 그의 작가적 성숙에 따라 보다 성숙된 의식으로 그의 장편소설에 계기적으로 표출되며, 드디어 심훈 소설의 정점이며 1930년대 이광수의 《흙》과 이기영의 《고향》과 함께 한국 농민소설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상록수》를 창작하게 된다.
셋째, 심훈의 예술세계에 있어서 시, 영화소설, 영화, 평론, 수필, 장․단편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였다. 삶의 집중적 체험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작가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가 문학의 표현 방식으로 소설을 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 현실의 훼손된 현실을 기정사실로 수용하고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방향을 모색하고, 마침내 구체적인 방향과 방안을 제시하는 성숙된 작가의식을 보여준다.
다섯째, 《상록수》는 식민지 시대의 훼손된 현실에서 농민의 각성이 없이는 식민지 현실극복이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지식인의 사회구조적 위치를 의식하여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훈이 작품에서 형상화하려 한 민족에 대한 봉사를 이상으로 삼고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지식인의 삶의 의식을 작품화한 《상록수》는 남녀 지식인의 농촌운동을 중심으로, 농촌을 개발하고 계몽하려는 193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농촌계몽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의 극복을 전망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여섯째, 《상록수》의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은 소수 특혜 받은 계층으로 가질 수 있는 욕망을 버리고 농민 속으로 들어가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 즉 농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흙》의 시혜적인 계몽운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농민의 현실대책으로 소작쟁의와 같은 농민운동은 주인공에 의해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작품에는 극화되어 있지는 않다. 농민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응책으로 계급투쟁을 바탕으로 하는 농민운동을 제시하고 소작쟁의를 벌이는 것이 그려져 있으며 또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가 나타나 있는 《고향》의 중간위치에 있다.
이제까지 심훈의 인식과 평가를 달리 필요를 느낀다. 심훈은 각 분야에 거친 다양한 활동과 짧은 문학 생애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자신의 의지와 사회적 욕구를 극대화한 작가이다. 《상록수》는 그 결말 처리에 있어서 현실의 냉엄함을 무시한 채 낭만적인 열정으로 낙관주의적 색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염원을 형상화함으로써 어두운 시대의 독자들에게 희망과 이상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