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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형식적인 종교에 대한 책망)
1. 제사장의 타락
1-1. 말라기와 시대적 배경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해 왔다. 말라기는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예언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의 개인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란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며,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원래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몇 몇 교부들은 말라기를 성육신 한 천사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제사장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라기가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요나단의 아람어 탈굼은 에스라가 말라기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박국과 오바댜처럼 말라기도 그 혈통과 출생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유대 전승은 말라기가(학개, 스가랴와 같이) 대회당에 속한 회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익명으로 전달된 선지서는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말라기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선지자는 느헤미야가 다스리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분명히 포로기가 끝난 후에 활동했다. 당시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제사장들을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다.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세기 정도 지난 후에 활동을 했다. 학개와 스가랴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말라기도 느헤미야를 격려하고 인도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전 5세기 말 경으로 볼 수 있다. 말라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죄의 선고와 책망이었다. 그 당시에 나타난 백성들의 정신은 후일 바리새주의나 사두개 종파로 발전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상태는 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영적 상태와 같았다. 여기에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영적 인식력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행위가 지적을 받을 때에도, 자기들이 왜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에게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느헤미야를 격노케 했던 이스라엘의 죄는 말라기를 분노케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말라기를 통해 보면 그들의 잘못은 1) 제사장들의 부패와, 2) 이스라엘 아내들과 이혼한 후에 이방 여인들과 재혼한 일과, 그리고 3) 십일조와 헌물을 소홀히 한 일 등이었다. 말라기는 그 백성 중에 있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위치와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은 연속되는 일련의 설교이다. 말라기는 직접적이며 강력하고 신랄한 산문 문체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후기 유대교에 널리 알려진 변증법적 형태의 가르침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여덟 번에 걸린 논쟁이 1:2,6,7, 2:14,17, 3:7,8,13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죄 때문에 비난을 받을때마다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그 증거를 대라고 도전하였다.
1-2.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3).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4),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5)."
이 예언의 표제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 말은 이 메시지가 격래나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책망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경고"라는 말은 이 구절과 (슥 9:1, 12:1)에서 사용되고 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즉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2지파 모두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사실을 지적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이며, 거룩한 말씀의 마지막 페이지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는 변덕스럽거나 독단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책임을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인내로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사랑하셨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미워한다"는 말을 비교급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예로 (창 29:30-31, 신 21:15-16, 잠 13:24, 마 6:24, 10:37, 눅 14:26)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책망하기 위해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에서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 때문에, 에서에 대한 미움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1:4에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예는 산들이 황폐해지고 그 산업이 황폐케 되어서 시랑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나바티안이 에돔을 정복한 것이나, 바사와 애굽이 전쟁한 일, 그리고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5년 후에 갈대아인들이 에돔을 침범했다. (사 13:22)과 같이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13:22에서 처럼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시랑"으로 번역된 말을 "거처"로 변혁할 수 없다. 이러한 번역은 이사야서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이는 '거처"라는 말의 어원이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교만하게 황폐해진 곳을 재건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이 건축한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재건하려는 모든 실행은 모두 실패하게 될 것이다. 1:4에서 하나님은 에돔이 그 지위를 되찾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에 에돔의 지경, 즉 에돔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곳을 사악한 지경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에돔의 황폐화된 상태가 죄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가 에돔의 이름을 완전히 없애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에돔의 쇠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진실로 은혜스러운 것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1-3. 더럽혀진 제사(6-8)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8)"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 이제 선지자는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자녀로 대하지 않고, 주인을 모신 종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렸는가? 이러한 경배는 제사장들의 신실치 못함으로 인해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돌리고 있다. 레위인들이 지은 첫 번째 죄는 성전에서의 직무 태만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음 절들에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제물을 드렸다. (신 15:21)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가 사용한 떡이라는 말은 제사 제물, 즉 동물의 고기를 의미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이것은 제단에 드려졌다. 2) 1:8의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3) (레 21:6,8,18)에서 제물을 상징하는 떡이 나옴. 말라기가 말한 떡이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면, 산은 제단이 아니라, 희생제물사를 드리는 제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를 멸시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 즉 눈 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을 진노케 만들었다. 그들은 항상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그들의 통치자, 즉 페르시아의 총독에게도 드릴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말라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예절 감각에 호소해서 설명하고 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칭찬보다 인간의 칭찬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1-4. 하나님의 불만(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얼핏 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불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부정한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한, 그들의 기도는 전혀 응답을 받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말라기는 특히 더욱 강력하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더러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헛되이"라는 말은 "값없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제사장들이 문을 열고 닫는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돈을 요구했다고 생각한다. 제사장들은 너무 게으르고 부주의해서 제 시간에 성전 문을 닫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그치게 하셨다는 설명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은 진심이 없는 제사장이나 제물, 그리고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1-5. 열납되는 예배(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하나님은 장차 이러한 예배에 대해서 온 세상에 계시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이러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장차 온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에스겔의 마지막 장(48장)을 보면, 재건된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예언이 이방인들이 온전한 예배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금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보다 더 세계적이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 알려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참된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열심히 없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은 만국 백성들로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1-6. 성전 모독(12-14)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13).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4)."
1:12에서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했다는 주제로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1:7에서 했던 책망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은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렵혔다. 여기에서"더럽힌다"는 말은 분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사로 상요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를 멸시하고 모독했다. 진실된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는 귀찮고 짐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을 무시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폭력으로 빼앗은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속임수와 모독이 담긴 제사를 받으실 분이 아니다. 그들이 좋은 제물을 드리지 못한 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에 탐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원을 할 때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제물을 드릴 때가 되면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한 영적 사기꾼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 병들고 허물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멸시받고(1:6), 그 이름이 더렵혀졌다(1:2). 그러나 위대하신 왕이신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일을 속히 버리고 신령과 진리로 위대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1-7.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선포이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하나님의 징계와 분노의 대상일 뿐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의 거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곱과 그의 후손, 즉 이스라엘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가장 값진 보화이신, 독생자, 즉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를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셨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독생자를 준비해 주셨다. 이러한 선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덮어주신다.
2. 결혼과 이혼 -성경적 결혼관-(2장)
2-1. 범죄한 제사장(1-3)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2).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3)."
말라기 2장에서는 1:6에서 시작된 제사장에 대한 책망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제사장들의 죄악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말라기는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 임할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명령은 2:2에서 포고, 선고, 또는 심판의 위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제사장들에게 저주가 선포되고 있다. 모세는 이미 오래 전에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었다(신 27:15-16, 28:15-68).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복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복은 제사장의 수입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 백성들에게 주어질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2:5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과 평강의 축복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이미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들을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그들의 종자를 견책하시겠다고 경고하신다. 여기에 언급된 종자는 땅에 뿌려지는 종자 씨앗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땅에 뿌리는 종자 씨앗을 저주하시면, 백성들의 수확량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제사장들 역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희생 제물의 똥을 제사장들의 얼굴에 바르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희생 제물의 똥을 얼굴에 뿌리는 것은 극한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면 그들이 극한 수치와 멸시를 받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제사장은 가증하게 간주되어 쓰레기처럼 될 것이며, 결국 쓰레기와 함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레위에게 주어진 평화의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레위와 맺은 언약이 파기되고 그들은 제사장직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하여 하나님께서 레위와 맺은 언약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했다.
2-2. 신실한 레위(4-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줄을 너희가 알리라(4).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5),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6)."
여기에서 말라기는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의 불경한 행위와 그들의 조상 레위의 신실한 행동을 대조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황금 송아지를 섬겼을 때에, 레위 족속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위와 그 후손들에게 제사장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의 본질은 생명과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했던 레위 족속을 통해서 온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레위와 그 족속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하기를 원하셨다. 레위 족속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때에 레위 족속은 편견이나 사심없이 진실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레위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여기에서 "동행했다"고 번역된 말은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족속의 사역을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2-3. 신실치 못한 레위인들(7-9)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7),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8).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9)."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임명된 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불리우고 있다(학 1:3을 보면 학개도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말은 보통 천사를 언급할 때에 사용된 말이었지만, 여기에서는 이 말이 제사장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의 입술은 진리의 지식을 지켜야만 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진리의 율법의 말씀이 흘러나오기를 구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초기 시대의 레위와 말라기 시대의 경솔한 제사장들 사이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2:6-7에 개괄된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했으며, 악한 행실의 본을 보임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벗어나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언약의 규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그 효력을 상실케 만들어서 레위의 언약을 더렵혔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를 경멸했으며, 이로 인해(1:7,12)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백성들에게 천시받게 만드셨다. 백성들이 볼 때에 그들의 타락은 일종의 징계였다. 그들은 편파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율법을 올바로 시행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을 처리했다.
2-4. 가증스러운 결혼(10-12)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10)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11),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12)."
제사장들의 죄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들만으로도 징계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자기 동족인 아내에게 가혹한 일을 자행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부정한 결혼을 했다. 말라기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같은 아버지를 둔 한 형제이며 자매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들은 같은 기원을 가진 가족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 여자인 아내와 이혼을 했다. 이러한 잡혼에 대해서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11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욕되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거룩하게 구별된 부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들은 유대 아내들을 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보다 더 못하게 간주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러한 죄는 크게 가증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가족을 모두 멸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 즉 모든 자를 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는 자와 응답하는 자"는 밤에 성전을 지키면서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레위인들이나 교사, 또는 학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은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이 말은 심판의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제물을 통해서 자기 아내에게 잘못 행한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언약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 이혼죄(13-16)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13),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14).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16)."
이스라엘 남자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여인들과의 결혼은 또 다른 죄악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여인들과의 재혼은 유대 여인들과의 이혼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대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유대 부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므로 전 남편들이 제물을 가지고 제단이 나아올 때에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가슴 아파서 울부짖는 유대 부인들의 아픔을 돌아보셨으며, 악한 일을 행한 유대 남자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구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이혼죄에 대해서 이처럼 강하게 언급한 적이 없다. 이러한 언급은 이혼이 만연한 오늘날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혼죄를 범하면 이혼 당한 자가 울며 부르짖는 애통이 제단에 메아리를 치기 때문에, 그가 드리는 모든 제물과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서 왜 자기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셨냐고 물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합법적인 결혼의 증인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버린 유대 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고, 젊었을 때부터 어려운 일을 함께 겪어온 친구요 동반자였다.
2:15은 이혼에 대한 강력한 논쟁으로서, 말라기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고 있다. 이 구절은 유대교 해석자나 기독교 해석자들에게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이 구절의 상반절은 비교적 해석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반절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말라기는 유대 남자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유대 부인들을 잘못 대우한 일이 큰 잘못이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의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의 나머지를 가진 자는 아무도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 남자들이 하나님의 영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무자비하게 유대 부인과 이혼하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반절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탈굼과 대부분의 랍비들은 "하나"를 첫 부인 외에 다른 부인을 취한 아브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에 다시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 하려고 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기적인 쾌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을 얻기 위해서 하갈을 취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아브라함에게 머물러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말라기 시대 유대 남자들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아니라 자기 정욕을 위해서 유대 부인들을 버리고 이방여인들과 재혼을 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아브라함에게 적용하여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지자 말라기가 이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의 언래적인 제도가 언급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창 2:24)에 나오는 "한 몸"과 여기에 있는 "하나"를 비교하라! 하나님은 결혼 관계 속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부인을 주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많은 여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지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한 여인만을 만들어 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손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경건한 후손들이 태어나기를 원하셨다. 일부 다처제와 이혼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동은 약속된 메시아의 혈통을 유지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경건한 자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유대 남자들의 이방 여인과의 잡혼으로 인해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유대 남자들에게 자기 행위를 부지런히 살펴보고, 옳지 못한 행동을 삼가라고 촉구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아내를 버리는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 말씀은 이혼을 허락한 (신 24:1)과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워낙 완악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혼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사람들도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한 여인을 자기 아내로 주장하기 위해서 그 여인에게 옷을 던지던 당시의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아내를 위해서 옷을 펼치지 않고, 오히려 폭력으로 그 옷을 가리웠다. 옷은 결혼과 신뢰와 보호를 상징한다. 선지자는 다시 한 번 이러한 중요한 일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2-6. 하나님을 괴롭힘(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17)."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세 번째 악한 일은 "회의주의"였다. 그들은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괴롭혔으며, 그들의 계속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참고 바라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부정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냈으며, 그 후에도 많은 시련을 받았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형통하게 하시며, 이교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번영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고, 악인을 엄격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날마다 회당에서 전파되는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했다. 이러한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3:1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 대답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2-7. 축복이 저주로 변하다
인간의 심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다. 불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누릴 줄 몰랐다. 그들의 축복은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축복은 점차 저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은 어느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들이 받은 축복은 저주로 변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성령과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이 일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은 그 축복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우리가 축복을 상실한 후에 후회하지 말고, 그 축복이 주어져 있을 때에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하신 축복을 체험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3. 메시아와 그의 선구자(3장)
3-1. 하나님의 두 사자(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1)"
말라기 3-4장은 1-2장보다 우리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말라기 3-4장에는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들로 가득하다.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처럼, 이 부분도 초림과 재림 사상이 혼합되어 나온다. 3장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원문은 개역성경과는 달리 "보라!"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하나님은 장차 자기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2:17에 기록된 회의적인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 히브리어로 "내 사자"라는 말은 "말라기"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자기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자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은 4:5을 근거로 해서 이 사람이 엘리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전체적인 내용이 매우 불확실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 사자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거의 받아들일 수 없다.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여기에 언급된 사자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올 사람을 가르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여기에 언급된 사자는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와서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고는 (사 40:3-5)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근동의 왕들은 왕이 가기 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서 그 길에 있는 장애물이나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그 길을 예비하게 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그는 요단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그들이 메시아를 영접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했다.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장차 그들이 사모하던 언약의 사자가 갑자기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언약의 사자는 예정된 시간이 되면 홀연히 임하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재림 때에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언급된 "언약의 사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이 사람은 3:1에 나오는 사자와 동일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구약 성경을 비교 연구해 보면, 이 사람은 (출 23:20-23, 33:15, 사 63:9)에 언급된 언약의 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천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현으로 나타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이다. 아브네즈라(Abenezra)와 킴치(Kimchi)와 같은 유대 학자들은 이 사자를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킴치는 이 사자는 메시아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의 신성에 관한 세 가지 명백한 증거를 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2) 그는 성전의 주인으로 불리우고 있다(그 전에..."). 3) 그는 그들이 구하는 바 "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면 언약의 사자라는 말에서 언급된 "언약"은 어떤 언약을 의미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이 (히 9:15)에 언급된 새 언약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언약은 오랜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나타난 것이며, 구약 성경에서 이미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언약이다.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다. 말라기 시대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시적인 구원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주실 구원자는 영원한 구원자이다. 구원의 언약에서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그 핵심에 놓여 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이스라엘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재림 때에도 이스라엘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예전에는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 언약에 모든 이방인이 포함되게 되었다.
3-2. 연단하는 자이신 메시아(2-4)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2)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3)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4)..."
우리는 3:1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혼합되어 나타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사 61:1-3)과 같은 구약 성경의 예언에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특징은 3:2에도 나타나고 있다. 3:2에는 메시아께서 자기 백성에게 임하실 두 가지 양상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왔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께서 오시면 그들은 그 임재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신실치 못한 자들은 크게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말라기 시대에도 적용되고,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적용되는 예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세상에 다시 오실 그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심판 주로 재림하실 때에, 주님은 경건한 자들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모든 찌꺼기들(거짓 신자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메시아는 세상에 오셔서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용광로의 불처럼 강한 불이 되어 자기 백성들로부터 부정하고 더러운 찌꺼기들을 제거하여 순수한 금과 은처럼 만드실 것이다. 또한 그때에 메시아께서는 표백하는 자의 잿물이 되실 것이다. 양잿물은 더럽고 변색된 옷감들을 눈처럼 하얗게 만든다. 이와 같이 메시아는 자기 피로 붉은 피와 같은 자기 백성의 죄를 흰 눈과 양털처럼 하얗고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 세상을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러한 연단은 레위 자손들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백성들에게 확산될 것이다. 말라기가 레위 자손의 정결을 언급한 것은 말라기 당시에 레위인들이 크게 부정케 되어서 그들이 드리는 제물이 열남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은 부정해진 레위인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정결하고 의로운 제물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이 신약의 성만찬을 예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일은 메시아께서 다시 오셔서 이루실 천년 왕국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화되고 회복될 때에,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의로운 것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만찬을 통해서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념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신약의 성도들이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리는 경건한 예배를 열납해 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열납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는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순결한 예배를 열납해 주실 것이다. 그때에 유대인들은자신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3-3. 심판의 예고(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5)"
3:5에서 말라기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행악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심판 선언 역시 거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항의(2:17)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될 첫 번째 대상은 마법사들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후에 이스라엘에는 마술이 횡행했다. 아마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아내 때문에 이러한 죄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신약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간음하는 여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분노의 막대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간음하는 자"는 2;16에 언급된 히브리 여자들과 이혼하고, 이방인 여자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거짓 증거를 하는 거짓 맹세자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위증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비난을 하고 있는 범죄이다(출 20:23, 레 19:12, 신 19:16-20, 렘 29:23, 잠 19:5 참조). 또한 품꾼들의 삯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자들도 행악자의 무리로 분류되어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을 받는 자드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시고 사랑하시는-을 압제하던 자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불법을 자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참아주시면서 계속해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회개하거나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할 때에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야곱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불리운다. 이스라엘이 마땅히 멸망당할 죄를 수없이 지었지만, 그들이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맺은 언약을 지키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은혜가 없었다면 그들은 벌써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포함한 열방 역시 멸망받아 마땅한 일들을 수없이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열방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 주셨다.
3-4.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다(6-9)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7)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8).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9)."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악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줄곧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서 살아왔으며, 수없이 많은 악을 자행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을 욕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오랫 동안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있었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기꺼이 그들을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방종한 삶에 만족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미약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을 자행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다. 아마 그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줄여서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제물은 처음 익은 곡식, 즉 옥수수, 포도주, 기름의 1/60 이상을 드려야 했다. 또한 그들이 드렸던 십일조에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1) 첫 곡식을 수확한 후, 남은 것의 1/10을 드렸는데, 이것은 레위인의 생계비로 사용되었다(레 27:30-33). 2) 레위인들은 자신이 받은 생활비 중에서 다시 1/10을 제사장에게 드렸다(민 18:26-28). 3) 레위인들과 그 가족들이 장막에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위해 회중이 드리는 제 2의 십일조(신 12:18), 4) 매 3년 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린 십일조(신 14:28-29).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들을 잘 돌보아 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방의 3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지방에 있는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다.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만큼 그들의 소유에서 제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이 심고 많이 일했지만 적은 것만 거둘 수 있었다. 그들은 말라기가 이 말을 할 때에도 계속해서 이러한 죄를 짓고 있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이 악행은 일부 사람들만 행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백성들이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살 속에도 저주가 임해서 수확과 소출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구별해 드려랴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실 것이다. 이러한 권면은 다음에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다.
3-5. 축복의 길(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11),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그러나 이스라엘의 미래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헌신하는 심령을 축복으로 받아주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축복의 창고를 열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우리 창고를 열어야 한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권고한다. 여기에 언급된 창고는 십일조를 쌓아놓은 성전의 방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시험을 당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자처해서 인간에게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요구하신다(대하 31:10). 하나님은 온전히 헌신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축복의 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축복해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때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을 짓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축복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해 땅이 가뭄이 들고 갈라질 때에, 순종하기만 하면 다시 그 땅이 비옥해지고 윤택한 곳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해로운 것들, 즉 메뚜기나 그와 비슷한 것들을 통해 오는 재앙들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여기에서 메뚜기는 만족할줄 모르고 먹는 탐욕 때문에 (게걸스럽게) "먹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제 때에 비를 내려 주실 것이며, 재앙이 그들을 덮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히 헌신한 자녀들을 위해서, 그들이 심은 밭에서 곡식이나 과실이 추수 전에 떨어지는 일이 없게 지켜주실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해서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황페하던 땅이 다시 아름답게 될 것이며, 열방이 이를 보고 그들을 복되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말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이다.
3-6. 내게로 돌아오라!
이 말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죄로 인해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부르심이다. 그들이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다시 그들을 안아 주시고 축복의 은혜로 덮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동안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고, 다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3-7. 하나님을 거스리는 완악한 말들(13-15)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13).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14)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15)."
2:17에서 신실하지 못한 제사장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회의주의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확산되었다(13). 그들이 한 말은 하나님께서 참기 어려운 완악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했느냐?"고 항의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슬프게 행한 일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근본 태도가 잘못 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업적인 태도로,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동기와 생각을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진정한 회개를 위해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서 슬퍼하는 척했다(참된 예배에 대해서는 사 58:3-8을 참고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들은 불행한 반면, 교만한 자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눈에는 교만한 자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교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본문에 언급된 교만한 자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잘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 보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하고 외람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을 괴롭게 했으며, 참기 어렵게 만들었다.
3-8.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16-18)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17),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18)."
악인들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거스려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면 이러한 때에 경건한 자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타락할 때에도 항상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인다. 이러한 목적으로 가지고 함께 모인 경건한 사람들은 진리와 경건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더욱 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깊게 들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순수한 영적인 교제와 그들이 한 일을 기념책에 기록하신다. 사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를 책에 기록하실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의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을 인정해 주식, 또 그들이 계속해서 그 경건을 지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다.
바사(페르시아)에서는 왕을 섬긴 사람들의 이름과 그가 왕을 섬긴 일을 기록해서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다(에 6:1-
2).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기념책이 이러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된 시편 103:13과 단 12:1에도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신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자기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나의 것, 나의 소유"이라고 부르신다(3:17). 이 말은 (출 19:5, 신 7:6, 14:2, 26:1)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행하기로 결정한 날,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억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완수한 아들처럼 그들을 대해주실 것이다. 그 날에 그들에게는 악인에게 임할 심판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분명히 구별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3:12에 나오는 "너희"가 불평하며 원망하는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말이 의인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까지 경건한 사람들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의의 길을 따랐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을 반드시 기억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그들이 가진 믿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실 것이다.
4. 의로운 해(4:1-6)
4-1. 타오르는 진노의 날(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1)..."
대부분의 히브리 구약 성경 원본과 사본들을 보면 (말 4:1-6)은 3장에 포함되어 있다. 모든 번역본들은 영어 성경과 같은 구분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말씀을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다. 말라기 4장은 우리들에게 구약의 선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있은 후에,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할 때까지 약 4세기 동안 하늘의 계시는 침묵하고 있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날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크게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날이다. 또한 이 날은 신약에 언급된 어린 양의 진노의 날이다. 이 구절의 문체는 짧고 갑작스러우며, 무서운 실체를 예고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불에 비교되곤 한다. 말라기 선지자도 마지막 심판의 날이 풀무불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임할 때, 악인들은 그루터기처럼 뿌리와 가지까지 그 불에 완전히 타버리고 말 것이다. "격렬한 풀부불"은 심판의 강도가 얼마나 강열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만한 자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 지 주목해보라. 그것은 3:15에 표현된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여기에서 가지와 뿌리는 나무의 양 끝부분으로 나무 전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무와 가지가 불에 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에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을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멸종주의자들은 (말 4:1)을 중요시하여, 악인들이 완전히 그 실체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이 구절은 악인들의 육체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 악인의 영혼은 계속 남아서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백보좌 앞심판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신실한 사람들은 영원한 축복에 거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저주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4-2. 의로운 태양(2-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
(말 4:1)은 악인에게 임할 엄중한 심판이 묘사되고 있지만, (말 4:2-3)은 의인에게 임할 큰 축복을 보여주고 있다. (말 4:1-3)은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악인과 의인의 운명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신자와 불신자의 마지막 운명이 얼마나 대조되며, 또한 다를 것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3;16에 언급된 사람들)은 그들에게 배정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심판의 풀무불 대신에,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태양은 의인들을 위해 온화하고 따뜻한 열기와 치료의 광선을 발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의로운 해"는 하나님, 즉히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태양으로 묘사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해에는 영적인 치료가 있다. 태양 광선이 식물의 성장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 빛과 열을 주듯이, 의로운 해는 의인들이 받고 견딘 상처를 치유하실 것이다. 여기에는 태양 광선이 세상에 퍼지는 속력도 함축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새벽별이다. 새벽을 맞아들이는 새벽별과 밝은 날을 가져오는 의로운 해의 차이에 주의하라! 구원자의 구속 행위를 통하여 신실한 사람들은 행악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벗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외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생명력, 기쁨이 너무나 커서 그들은 마치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뛰어놀며, 악인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악인들 사이에 있던 평소의 상태를 역전시켜 주실 것이다.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의 결과로 재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날에 어김 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4-3. 모세와 엘리야(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4).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5),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6)."
말라기 시대로부터 메시아의 선구자가 나타날 때까지, 선지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시키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처럼, 이 곳에서도(4:5) 엘리야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또한 그는 최후 심판 때에도 엘리야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4:5에는 말라기 예언의 후반부 중에서 세 번째 "보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다.이 절이 시작되는 말을 3:1과 비교해 보자.
여기에 언급된 "엘리야"가 엘리야 자신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세레 요한을 상징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제기되어 왔다. 여기에 언급된 엘리야를 세례 요한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마 11:14)과, (눅 1:17)을 제시한다. 이 구절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물을 때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능력으로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7:12-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12-13)."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기에 언급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디셉사람 엘리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약 성경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요 1:20-23)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 엘리야, 또는 모세가 말한 선지자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0-23)."
둘째로 성경에서 장차 엘리야가 다시 오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세례 요한이 부분적으로 (말 4:5)의 예언을 성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왔으며, 마지막 선지자로서 엘리야와 같은 사역을 성취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말 4:5)에 언급된 모든 예언을 완성하지는 않았다. 이 예언의 모든 조건과 요구가 이루어지는 날은 미래가 될 것이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대화를 하신 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부분적으로 엘리야의 예언을 충족시켰지만, 이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는 일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마 17:10-11)."
세례 요한은 메시아보다 앞서 와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했다. 이로써 그는 메시아의 초림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엘리야는 다시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을 것이다. 엘리야가 할 일은 배교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계 11장)에 기록된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두 증인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그리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저주로 이 땅을 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어떤 유대인들은 (말 4:6)을 읽은 후에, 다시 (말 4:5)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말라기의 마지막이 저주로 끝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학자들은 구약 성경 중에서 네 권의 책은 이와 같이 마지막 절의 앞 절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네 책은 이사야, 소선지서(히브리 성경은 12소선지서가 한 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 소선지서는 말라기로 끝나고 있다), 예레미야 애가, 그리고 전도서이다. 이 네 권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보면, 왜 일부 유대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4-4. 저주를 치료하는 방법
구약 성경의 시작과 끝은 죄인에 대한 저주로 일관되어 있다. 창세기는 어떻게 완전한 환경에 살던 인류에게 저주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라기는 이러한 저주가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작되고 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인류에게 내려진 모든 저주가 제거되고 영생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릭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저주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영생을 누릴 영원한 세계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저주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저주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빋고 영생을 얻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어떤 길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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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라기의 메시지와 현대적인 적용
1.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2. 우리는 종종 가치 없는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기도 한다.
3. 하나님은 남편이 아내와 가족에게 해야 할 의무를 온전히 이행하기를 원하신다. 남편이 이 의무를 오바르게 이행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다.
4.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5.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교만한 자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존귀하게 해주실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와 메시야를 보내어 부정한 사람들을 정결케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정결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러한 점에서 메시야께서 보내신 성령은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불리운다.
7. 그러나 메시야를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를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출처: 설교전문학교 글쓴이: 새생명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