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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21 마음에 심어진 말씀 - 약 1: 24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약 1: 21 마음에 심어진 말씀 -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한다.
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하기에, 즉 우리가 거짓과 사악과 미움에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법적으로 죄 씻음을 받고 중생한 자들이 되었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은 죄를 버리고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내어 버리고'(아포데메노이)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 버려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고 부주의할 경우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뤼파리안)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였으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 등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Manton, Martin)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뤼파리안'을 떨쳐버려야 함을 권면한다.
'넘치는 악'(페릿세이안 카키아스)에 '페릿세이안'은 '충분한', '남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하며 '카키아스'는 '악한'의 뜻보다는 '위선', '더러운 욕망'을 의미한다(Calvin, Lenski, Lightfoot).
이것은 앞서 언급된 '뤼파리안'과 동의어로 중복된 표현을 통해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Martin).
2]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말씀(도. 道)'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이다.
* 행 13: 26 -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이 말씀은 구약 시대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
* 고전 15: 1-2 -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고후 3: 3 -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말하며 이것은 바른 믿음의 태도이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하고 거부하고 대항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을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본문은 구원의 수단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말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본 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 있게 말씀에 응답해야하며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Burdick, Martin).
3] 빛깔 나는 언어생활 : 김정남 목사
< 말에 관한 3가지 원리 >
야고보는 목회자로서 1-18절까지 네 가지 문제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시험의 문제(2-4절), 기도의 문제(5-8절), 가치관의 문제(9-15절), 신관의 문제입니다(16-18절). 오늘 본문부터는 신앙생활에서 구체적인 실천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말에 관한 원리입니다.
말은 인생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은 신앙생활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또한 말은 인격과 인간관계를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말 공부입니다. 말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 야고보의 주의사항 1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이 금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침묵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문제해결 자세입니다.침묵이 항상 금만은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말을 할 때는 해야 하고, 더 나아가 좋은 말은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말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침묵이 금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을 가지고 정말로 해야 할 좋은 말, 사랑의 말까지 닫아버리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과 격려가 담긴 말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사회는 풍요롭게 되고 인생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빛깔 나게 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빛깔 나는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에 관한 3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1. 가르치는 말보다는 동참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말로 인해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유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가장 관계를 틀어지는 하는 말은 가르치는 어투의 말, 설교하는 어투의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 경험이 많고 신앙이 깊은 것 같은 사람에게 나오는 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이 ‘가르치는 말’로 들리기 쉽습니다.그러므로 신앙적으로 말을 하기 즐겨 하는 분들은 자기의 말이 ‘훈계하는 어투의 말’로 들려지기 쉽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면 선의로 말을 했어도 “나는 기도하는데 너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르치는 어투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 그 동참하는 어투로 인해 더욱 큰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처지와 기분을 이해하고 그의 상황에 동참하려는 말의 성육신은 대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리입니다.
살다 보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도 눈치껏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대답하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말을 주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집에 심방을 갔는데 아이 문제로 속상해 하는 것 같으면 “지금 댁의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눈치를 보건대 자녀가 재수하는 것 같은 집에 가서 아이에 대해 물으면 “내 아이 지금 재수하고 있어요”라고 기분 좋게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눈치를 잘 살펴서 상대방을 세워 줄 만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상대방의 기분과 처지를 이해하려는 성육신의 말의 원리입니다.
2. 말의 단장과 마음의 단장을 함께 해야 합니다.
말과 마음은 아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겸손한 말이 나옵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아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인간 내부의 것(마음)을 통해서 외부의 것(말)이 나옵니다.
반대로 현대 심리학에서 발견한 한 가지 귀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것(마음)이 외적인 것(말)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외적인 것(말)이 내적인 것(마음)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중한 마음(내적인 것)의 영향을 받아 소중한 말(외적인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외적인 말의 훈련을 하다 보면 내적인 마음이 단장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복을 걸치는 것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많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신사복을 걸치면 신사다운 행동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라도 예비군복을 걸치면 행동이 아주 달라집니다. 남자들의 경우에 예비군 훈련장에 가 보십시오. 멀쩡한 사람이 예비군복을 입으면 하루아침에 개망나니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멋대로 행동하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조금 구석진 곳만 보이면 바지를 내리고 실례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이 걸친 의복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려면 의복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의복에 대한 시각부터 달리 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 얼마나 구체적이고,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마음 문제를 고치려면 어려운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이 울적합니까? 삶의 권태를 느낍니까? 짜증이 납니까? 그렇다면 울적한 의복, 권태로운 의복, 짜증스런 의복부터 고쳐보십시오. 사치가 아닐 정도로, 유혹을 주지 않을 정도로 짧은치마도 입어 보십시오.그러나 의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울적한 언어, 권태로운 언어, 그리고 짜증스런 언어부터 고치고 멀리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빛깔 있는 언어, 즐거운 언어를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샌가 마음에도 봄기운이 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울적한 얼굴, 권태로운 얼굴, 짜증스런 얼굴부터 고쳐보십시오. 여성의 경우에는 화장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키메라처럼 짙고 요사하게 화장하지는 않되 항상 최선을 다해 화장해서 맑고 화사한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사는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더욱 막습니다.
둘째, 너무 교만한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보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화장을 하면 삶의 자세가 조금 더 다듬어진다는 것입니다. 대개 화사하게 화장하는 사람이 화장을 안 한 우울한 얼굴을 한 사람보다 잘 삽니다. 그처럼 화장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얼굴 화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의 단장입니다.말의 단장은 마음을 단장시키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합니다.
자녀들이 정말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말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어른들에게 경어를 쓰는 훈련을 시키면 윗사람을 존중하게 되고,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말 훈련은 다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훈련된 자녀는 한때의 실수로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절대로 전체적인 인격이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3. 성내지 않고 온유하게 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면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 사도는 성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왜 사람들이 성을 낼까요? 심리학적으로 보면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온전히 그리고 끝까지 듣지 않는데서 성내게 됩니다. 사정을 끝까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판부터 하려 들기에 문제가 됩니다.
둘째,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됩니다. 말로 인한 상처의 대부분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셋째, 그 말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 내키는 대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오히려 신음하며 괴로워합니다. 성내는 것에 대한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논리 부족으로 성내게 됩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니까 큰 소리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서적도 많이 읽고, 무엇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온유함으로 진리의 도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오늘날 많은 상처와 갈등이 말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영혼과 인격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아름답고 빛깔 나는 언어를 쓰는 데에 더욱 힘써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축복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4] 말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 김정남 목사
< 사람들이 성을 내는 이유 >
본문 19절 말씀에 나오는 야고보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면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말의 절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3치 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생겨납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말을 가끔 듣습니다. “어떻게 교인이 교회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생각해 볼 때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교인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해야 하겠지만, 지나친 기대를 통해 실망으로 빠져드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교인들을 가장 실망스럽게 만드는 일이 무엇일까요? 말하는 태도, 성내는 태도가 가장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을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합니다. 지난 시간에 성내는 것의 심리적 원인을 간단히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그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성을 내게 될까요?
1. 끝까지 다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끝까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상 이해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판부터 하려 들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생활을 돌아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녀에게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고 자녀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 못한다고 화를 내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기막힐 일입니다. 누구는 공부를 못하고 싶어서 못합니까? 하고 싶은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고, 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구박하고, 친구들도 따돌리는 마당에 집에 오면 부모까지 “공부 못하면 나가 죽으라!”고 하니까 우리 아이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구 몰아치면 그것이 죽으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배우자에게는 또 어떻게 합니까? 나의 영원한 배우자이지만 교양과 겸양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해야 하는데 자기중심적으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들어보려 하고, 이해해보려 하는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2.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 인해 생기는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겠다는 각오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상처가 대부분입니다.말로 인한 상처의 대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가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며 판단하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말의 결과를 너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 내키는 대로 말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 말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가 오히려 신음하며 괴로워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그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의 잘못을 깨닫고 신음하는 사람은 오히려 낫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말의 잘못에 대해 괴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뒤끝이 없는 것을 자랑합니다.
뒤끝이 없는 사람임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런 자랑을 하는 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들입니다.중요한 것은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지 상처를 주고 난 다음에 자기 혼자 뒤끝이 없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4. 지식과 논리의 부족 때문입니다.
지식과 논리가 부족하면 억지를 부리는 방편으로 성을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증대를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하되,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위 네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려고 하고, 훈계하는 스타일의 말을 하며, 듣기보다는 말하고 주장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입술을 잘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 축복은 언어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
축복은 “입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와 상당히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이삭이, 야곱, 모세가 다 입의 고백으로 축복 받았습니다. 다윗이 입의 고백으로 축복 받았고, 신약성경의 성도들도 다 입의 고백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백부장이 입의 고백으로 은혜 받았고, 죄 많은 여인도 입의 고백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입의 고백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잠언서 6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입을 잘못 놀리면 입이 우리의 축복을 얽어매고 우리의 행복을 잡아간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좋은 분위기를 무엇이 깹니까? 밥상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도 말 한마디 잘못 나가면 그곳의 분위기는 깨집니다. 아무리 행복한 집을 만들려고 해도 입이 잘못하면 그 행복은 날아갑니다. 요즘은 정치인들이 망하는 이유를 보십시오. 거의 대부분 입 때문에 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물론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잘 행동해야 됩니다. 그러나 입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리 행동을 잘해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반대로 입을 잘 관리하면 부족한 행동을 상당 부분 커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행동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입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면 지혜롭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입이 팔자를 고치게 하는 도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면서 신앙심을 가진 사람처럼 말을 잘해서 그 가족이 살아났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나오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입이 팔자를 고친 것입니다.
국가가 발전하려고 해도 무엇보다 언어문화가 발전해야 됩니다. 언어가 부드러우면 민족 정서도 부드럽고, 언어가 발전하면 민족도 발전합니다. 미개한 나라를 보십시오. 언어가 있긴 하지만 단어가 몇 마디 없습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혼도 성숙하고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언어문화를 성숙시켜야 합니다.항상 온유한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약 1: 22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
원문에는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데)이 있다.
복음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함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니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증언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 예컨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게 성급히 화를 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1] 너희는 말씀을(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 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
'행하는 자'(포이에타이)는 '아사'(행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언하는 자를 의미한다(Calvin, Adamson).
* 롬 2: 13 -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도를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2]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 마 7: 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레 18: 29 -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 요삼 1: 11 -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약 1: 23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야고보는 본 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 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보는'(카타노운티)는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Adamson).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Mayor).
약 1: 24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본 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 마치 희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1]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보고'(카타노에센), '가서'(아펠렐뤼덴), '잊어버리거니와'(에펠라데토)의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희미하게 듣고 나서 실행치 않는 자가 곧 말씀을 잊어버리고 다시 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말씀은 거울과 같다.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고 사는 자와 같다.
그러나 거울은 단지 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 후에 더러운 것을 씻으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실천할 것은 실천하라고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