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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하권 제 5편(11-12)
*5-11 중국 선비가 말한다:
이와 같다면 재계齋戒 드리고 소식小食하는 일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까?
*서양 선비가 말한다:
살생의 금계禁戒 때문에 재계齋戒를 하고 소식素食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작은 동정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재계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뜻을 알고 나면 (재계를) 더욱더 절실하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무릇 이 세상에는 지금은 현명하지만, 과거에는 못난 짓을 하지 않았던 사람은 진실로 적습니다. 오늘날은 도리(道)를 따르고 있으나 과거에 그 도리를 어기지 않은 사람은 적습니다.
그 도리는 천주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주신 것이요, 성현들에게 명하여 그것을 목판이나 서책에 (적어서 널리)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좇아서 지은 죄가 크면 클수록 죄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올바른 선비(君子)’들이 비록 이미 (참회를 하고서) 선행에로 마음을 쏟고 있으나 어찌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하여 범연泛然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지은 불선不善에 대하여 남들을 혹 용서해 주고 다시 캐묻지 않는다 해도, 자기는 때때로 그것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후회할 것입니다. 깊은 통회가 없다면 우리들이 이전에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어찌 나중에 면책免責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행하는 선善에 대하여 ‘올바른 선비(君子)’들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기의 단점 보기를 ‘이루’(중국 고대의 시력視力이 좋기로 유명한 사람)처럼 하며 자기의 장점을 보기를 장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되는 것은, (반드시) 정통하고 또한 후대厚待하여서, 남들이 비록 걸출한 인물로 칭찬한다 할지라도, 스스로는 부당한 대접인 것처럼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마음속에 병 (문젯거리)를 살피면 아주 치밀하고 자세해서, 남들이 비록 그 갖춤이 완전하다고 말해도 자신은 아직도 부족한 듯이 열심히 삼가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 그저 말로만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저 마음에서 후회만 하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행동을) 깊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면 어찌 희희락락 거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밥과 반찬을 적게 먹고 반찬 중에서 고기의 맛을 물리치고 오로지 담백한 채소만을 섭취할 뿐입니다.
무릇 한 몸에 소용되는 것은 스스로 거칠고 하잘 것 없는 것을 택하여 쓰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책망하여, 자기의 구악舊惡과 새로 지은 죄를 속죄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황공하게 천주의 대전 앞에서 이마를 땅에 대고 애련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잘못이 씻겨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감히 망령되이 스스로를 성인聖人이라 여기고 잘못 없음을 과시하면서, 망령 내 스스로 자기(의 잘못에는)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자기를 잘못을 심판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몸소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벌 주고 따져 물어서, 조금이라도 잠시나마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천주께서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죄를) 면제하고 사면하여 다시는 (더) 죄를 따져 물으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재齋를 올리고 소식素食을 하는 올바른 뜻의 첫째 설명입니다.
덕을 행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업本業입니다. 덕에 설명을 듣고서 기뻐하며 급히 그것을 실천하지 아니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욕私慾이 발동한 저들은 이미 먼저 사람의 (본) 마음을 빼앗아 그것을 멋대로 주재主宰하려 합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은) 반목하여 서로 억누르며 어렵게 만들어서는 흥분하여 서로 치고 받고 합니다. 대개 평생을 두고 한 일이라는 모두 사욕私慾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무릇 해 놓은 일이란 정의가 시키는 것에 말미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욕人慾이 즐거워하는 곳에 말미암은 것뿐입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사람인데, 그들의 행동을 보면 짐승들과 무슨 다른 점이 있습니까?
대게 사욕私慾의 즐거움이란 바로 의로움의 적適입니다. (그것은) 지능과 사려思慮를 막고 이성의 작용을 가리니, 덕德과 교감交感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질병 중에 이것보다 흉측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병들의 해는 몸이나 살갗에 그치나, 사욕私慾의 독기는 우리들의 마음의 골수에 통하여 본성(원성元性)을 크게 해칩니다.
만약 올바름(의義)을 원수로 대하고 (사욕私慾이) 한 마음의 전횡專橫을 일삼게 되면, 도리(道)는 거의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 높은 덕성이 자리 잡을 여지가 아직 남아 있겠습니까?
아아! 사욕私慾의 쾌락은 미천한 것이요, (허망하게도)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마음에 오래도록 후회를 남겨 줍니다.
비속하고 짧은 쾌락으로 영속적인 근심을 사는 일은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욕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힘을 빌려서 그 용맹을 떨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사욕을 막으려면 마땅히 먼저 자기 자신의 혈기(기氣)를 제약制約해야 합니다.
‘도道’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욕심을 줄이고자 하면서 육체를 풍요롭게 기르고자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불을 약하게 하고자 하면서, 더욱더 땔감을 보태고 있는 것과 같으니, 될 법한 일이겠습니까?
‘올바른 선비(君子)’들이 음식을 드는 것은 다만 생명을 보전하려는 일 때문이나, 소인小人들이 생명을 보장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먹고 마시고자 하는 일 때문입니다.
진실로 ‘도道’의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육신을 도적盜賊이나 원수처럼 노엽게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만둘 수 없어서 잠시 그것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왜 “그만둘 수 없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까?
우리들이 비록 본래는 육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육신이 없으면 또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식사는 배에 허기를 (해결하는) 약이요, 물을 마시면 입에 갈증을 (해소하는) 약일 뿐입니다. 약을 복용하는데 자기의 병 (치료)에 소요되는 것만을 분량으로 삼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본성(性)에서 좋아하는 것이 적으면, 쉽게 처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진미珍味들은 (다) 좋은 것들이긴 해도, (모두 만족하게) 먹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욕구가 바라는 것은, 그것으로써 사람을 봉양하는 일이나, (탐욕이) 도리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렇다면 먹고 마시는 일로 사람들이 죽는 일이, 칼이나 병기보다 더 많다고 말할 만합니다.
지금은 (탐욕이) 몸을 해치는 점은 논의하지 않고, 단지 마음을 해치는 점만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종從이 너무 긴장하면 아마도 자기 주인에게 거슬러 대항할 수 있습니다. 혈기가 지나치게 강하면 반드시 (마음의) 의지를 위태롭게 합니다. 의지가 위태롭게 되면 곧 오욕五慾이 그 해독들을 발동시킵니다. (그 가운데) 색욕(성욕性慾)이 가장 심합니다. 진미가 배(복腹)에 질펀하고 풍성하게 채워지지 않았다면, 성욕이 어떻게 발동할 수 있겠습니까? 마시는 것이 담백하고 먹는 것이 소략하면, 성욕은 잠잠해지고 쇠할 것입니다. 한 몸이 일단 합리적으로 제약制約되면 다른 욕망들도 스스로 도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식素食을 하고 재齋를 지키는 올바른 뜻의 두 번째 설명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고난의 세상이지, 즐기며 노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은 아닙니다. 천주께서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신 것은 천주의 도리를 닦기에 힘을 쓰고, 한가한 짬이 없기를 재촉하고 계신 것이요, 이 육체적 감각을 받들어 즐기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쾌락들을 필경 다 좌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청정한 즐거움이 없다면 반드시 음탕한 것을 찾을 것이며, 올바른 즐거움을 모르면 반드시 비뚤어진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얻게 되면 저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선(君子)’들은 언제나 스스로 자기 마음을 잘 배워서 도덕을 (닦는) 일로써 쾌락을 느끼고 근심과 답답함을 마음속에 품어서 (도덕성) 밖으로 마음을 쓰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적 쾌락을 수시로 쇠략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마음에까지 침투하여서 마음 본래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무릇 덕을 실천하는 즐거움은 바로 영혼의 본래의 즐거움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으로써 ‘하늘의 천사들(天神)’과 같아지는 것이겠습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바로 육신이 몰래 훔쳐서 하는 쾌락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즐거움으로써 짐승들과 같아지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덕행의 즐거움을 보태면 보탤수록, 더욱 ‘하늘의 천사들’에 더욱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먹고 마시는 쾌락을 적게 하면 할수록 짐승들과는 더욱더 멀리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아!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의仁義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 주나, 오미五味는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합니다. 착한 일을 쌓아가는 즐거움이 커지면, 곧 마음에 크게 이로우면서도 육신에는 헤害 됨이 없습니다.
풍성한 음식의 쾌락이 번다해지면 몸과 마음 모두가 크게 상처를 입는 것이겠습니다. 배(복腹)가 고기 반찬으로 가득 차면, 반드시 아래로 쳐져서 자기의 의지를 더럽고 천한 것으로 떨어뜨려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마음을 (세속의) 더러운 먼지 구덩이에서 어떻게 뽑아내어서 고상하고 넓은 사려思慮를 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심보 나쁜 사람들은 남들이 즐기는 것을 보고서, 자기들이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하는 그들을 싫어하고 질투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보게 되면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자기 스스로를 채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더럽고 천한 일을 좇는 것은 오히려 (가련하지만), 이토록 좋아하고 이토록 간구하고 있구나! 나는 일단 높이 오르려는 데에 뜻을 두고서도, 그 (경지의 참) 맛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것을 소략하게라도 갖추지 못했는데, 또한 이처럼 나태하다면, 어찌 (수도修道에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재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이 들어 덕행이 아름다운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맛을 느낄 수 있다면 기름진 밥도 오히려 가볍게 보면서 스스로 저 덕행의 즐거움을 얻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맛 (덕행의 정신과 맛과, 기름진 밥에 감각적인 맛)은 사람의 마음에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드나드니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다른 것은 내보내야 합니다.
옛날 어떤 이가, 우리 서방의 나라에 사냥개 두 마리를 조공朝貢하였습니다. 모두 좋은 종자鍾子였습니다. 임금은 한 마리는 도성 안에 세력 있는 신하의 집에 기탁하였고, 그 다른 하나는 성 밖의 농가에 기탁하여, 동시에 사육을 시켰습니다.
(이 개들이) 다 성장하니 왕은 사냥을 나가서 시험을 해 보기 위해 이 두 마리 개를 사냥터에 풀어 놓았습니다.
농가農家에서 사육된 개는 몸이 마르고 체중이 가벼웠습니다. (그 개는) 달려나가 날짐승이 한쪽을 냄새 맡고 재빠르게 쫓아가니 새들을 잡는 것이 다 셀 수 없었습니다. 대가大家에서 양육된 개는 비록 깨끗하고 아름다움은 볼만하였으나, 고기를 먹어 배 채우는데 익숙하여서, 사지가 느른하여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 개는) 날짐승을 보고서도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우연히 길가에서 썩은 뼈다귀를 만나서는 곧 달려가 그것을 물어뜯었습니다. 물어뜯기를 끝내고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냥 나간 사람들은, 개들이 원래는 같은 의미에서 나왔으나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 이것을 이상해 할 것 없노라. 오직 어찌 오직 짐승들만 이러하겠느냐? 사람들 또한 이와 같지 않은 이가 없도다. 모두 양육에 달려 있을 뿐이로다. (사람을) 편안하게 즐기게 하고 실컷 배불리 먹이면서 양육한다면, (그는) 반드시 좋은 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잡다한 일로 수고롭게 하고 근검 절약해 가며 키우면, 반드시 그네들의 기대를 그르치지 않을 것이로다!”
만약 “사람들이 좋은 요리와 풍성한 반찬을 (들기에) 익숙해졌다.”고 한다면, 예의禮儀 같은 일은 거들떠 볼 여가가 없고, 힘쓰는 것을 오직 먹으려는 일뿐일 것입니다.
훌륭한 예禮와 ‘미묘한 뜻(징의徵意)’에 익숙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만날 겨를이 또한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깊이) 사고하며 ’도리의 뜻(리의理義)‘을 쫓을 뿐입니다.
이것이 재齋와 소식素食을 드리는 바른 뜻의 세 번째 설명입니다.
무릇 재계齋戒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 저는 세상이 여러 나라를 두루 거치면서 그것들을 이미 갖추어 들었습니다.
어느 것은 반찬과 맛에는 제한받지 않습니다. 단지 낮 동안에는 먹지 않으나 별이 나온 밤이 되면 여러 맛을 잡식雜食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재계(시제時齋)‘입니다.
어느 것은 시간과 식사는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기름진) 고기 음식을 금하나, 수시로 채소를 먹으니 이것이 ’맛의 재계(미제味齋)‘입니다.
어느 것은 맛이나 시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에 한 끼니만 먹습니다. 이것이 ’식사 재계齋戒‘입니다.
어느 것은 식사 시간 모두를 제한합니다. 오직 정오의 소식素食 한 끼만 먹으며 오직 양陽 속하는 고기는 금지하나, 음陰에 속하는 생선의 맛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일반적인 재계‘(公齋)입니다.
어느 것은 ’불을 써서 요리한 음식(화식火食)‘을 금지하며 평생 산 속에 혈거穴居에 살면서 오로지 야생의 뿌리로만 살아갑니다. 이런 사례는 유럽의 산 중에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특수한 재계(私齋)‘입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재계齋戒들을 모두 본인 자신을 따져 묻고 단속함에 있는 것이니, 요점은 그 사람의 형편을 보고서, 그 사람의 몸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부귀한 사람이 기름진 음식을 취함에, 그 정성치보다 적게 취한다면 역시 재齋가 되는 것입니다. 저들 천민들이 수시로 거친 음식에 익숙하다 해서 재齋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지들이 지극히 재齋를 잘 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모름지기 본인의 체력이 어떠한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쇠약하고 병든 사람을 때때로 좋은 맛으로 몸을 보양保養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노역勞役하는 사람은 그의 사지를 수고롭게 할 것이니, 오랫동안 허기져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천주의 가톨릭 교회는, 60세 이상의 노인, 20세 미만의 젊은이, 병약자, 아이에게 젖 물리는 여인, 체력을 쓰는 하인들을 모두 재계의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교정하고 있습니다.
입맛을 (단속하는) 재계齋戒는 진정한 재계齋戒가 아니니 재계齋戒 중에서도 제일 못한 것입니다.
재계齋戒를 드리는 뜻을 따지자면, 요컨데 사욕私慾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돈독하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재계齋戒를 지키는데 경건하게 드리는 계율戒律을 버리는 것은, 비유하면 (다듬지 않은) 옥돌(玉石)은 잘 간수하나, (진짜 잘 다듬은 보석인) 옥玉은 허술하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일입니다.
* 5-12: 중국 선비가 말한다:
진정한 재계齋戒의 바른 뜻을 설법하여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좋습니다.
우리 (중국)의 세속에서 재齋를 올리는 자들은, (진정으로 생활을) 가난하게 하고 궁핍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재계齋戒를 드림으로써 그럭저럭 먹고 살면서, (재개齋戒를 빌미로) 반드시 자신들의 좋은 명성을 훔쳐내어 음陰으로는 남들을 속이려는 자들입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죄를 지키지만 으쓱하여 혼자만 있고 아무도 없으면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며, 재물을 옳지 못하게 취득하고, 현자賢者를 모함하고, 선인善人을 헐뜯는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아아! 저들은 사람의 눈도 피할 수 없는데, 하느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높으신 가르침을 받게 되어 다행입니다. 아직 더 끝까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천주의) 도리는 깊고도 넓습니다. 넓게 묻지 않으면 요점적으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상세하게 물으심은 곧 성의誠意의 표시입니다. 무슨 걱정이십니까?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29/AM:9:14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