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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보한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의 불안정성
1871년 빠리에 등장했던 세계최초의 노동자국가 빠리꼬뮨에서 노동자들은 고립된 빠리에서 71일간을 버티어 냈다. 노동자들은 프로이센 군대와 싸우고 노동자국가의 정치적 기초를 세우는데 너무 바빠서 노동을 조직할 겨를이 실제로 없었다. 그래서 노동을 조직한 최초의 경험은 러시아혁명후 71년 이상을 버티어낸 소비에트의 경험이다.
혁명이 일어나고 전대미문의 내전을 겪은 초기에 노동자들은 전시공산제 체제하에서 혁명적 열정 하나로 난관을 헤쳐 갔다. 혁명에 대한 사랑은 배고픔도 잊게 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내전이 끝나고 사회주의 건설시기가 오자 노동자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실망감이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지원할 것이라는 예언은 결과적으로 뻥이 되었다. 외부지원이 없는 가운데 궁핍이 몰려왔다. 러시아 국내에서 무엇이든 해결해야 했다.
그 와중에 노동자들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겪게 되었다. 혁명초기 노동자 자신들이 몰아낸 관리자, 경영자들을 전문가 부족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했다. 그리고 보다 강화된 노동규율이 도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의 주창으로 테일러 시스템이 공장에 도입되었다. 게다가 도급제(성과급)의 도입이 본격화되었다.
노동자국가에서 생산 합리화 방식이 가장 모멸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 어쨌든 낙후된 혁명러시아의 공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이런 방식은 옹호되었다. 그리고 소련, 중국, 북한, 동구 든 비슷한 조치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에서 노동자는 나름대로 앙갚음을 했다.
먼저 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과 노동강도가 적은 공장을 찾아 떠돌기 시작했다. 당연히 숙련도는 낮아지고, 노동생산성은 저하되었다. 잦은 이직을 막기 위해 사실상 거주이전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고, 식량배급권으로 협박을 했지만 이를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직이 힘들어지자 노동자들은 과도한 생산목표가 주어진 공장지배인들을 회유하는 수단을 발견했다. 하나는 목표량을 달성하는데 협조하는 조건으로 여러 혜택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소련에서는 전날 과음한 노동자들을 위한 숙취실이 설치될 정도로 노동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권리를 향유했다. 그리고 목표량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오면 벼락치기로 일을 하고, 그 전까지는 빈둥거려도 문제가 없었다. 공장 분위기는 목표 달성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전 공장이 이 모양이니 공장사이, 혹은 같은 공장에서 공정사이에 물류흐름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고, 툭하면 작업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늉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여러 조치가 취해졌다. 스타하노프(노력영웅)제도, 천리마 작업반 등의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시행초기에 반짝 효과가 나타났을 뿐 오히려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실제 스타하노프운동원이나 천리마 작업반에게 더 좋은 도구가 주어지고, 혜택이 주어지면서 다른 부분의 결핍이 오히려 심화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나 노동규율이 형편없이 떨어지게 된 것은 평등과 연대의 사회주의적 원리가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원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을 조장하는 물질적 인센티브에 의존하고, 목표달성을 이유로 노동자들의 자율성이 억압당하는 경제는 노동자가 주인의식을 갖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객관적인 조건, 즉 궁핍한 환경과 따라잡기 식의 무리한 목표설정, 그리고 생산파동(특정한 시기에 생산이 폭증하는 것)에 따른 원료, 반제품 공급의 불안정성에 의한 작업중단의 발생 등이 있었다. 이것이 사회주의권에서 노동자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노동규율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원인인 것이다.
노동의욕 고취는 경쟁만이 능사가 아니다.
경쟁이 배제되고 물질적 인센티브가 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열심히 하냐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체제에서 공장도 안가 본 사람이다. 시급을 받건, 월급을 받건 요즘 아무리 연봉제를 시해한다 하여도 예를 들어 자동차 콘베이어 생산공정에 경쟁을 도입할 수는 없다. 어떤 체제든 노동자들은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규범에 따라 일한다. 노동이 모욕적이거나 위험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체가 그러한 규범을 만드는 속성이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해고의 공포, 실업에 처했을 때 굶어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여기에 더해진다.
그러나 경쟁이 아닌 연대의 원리로 높은 근로의욕이 유지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동소유, 공동노동, 공동분배의 원리를 통해 1910년대 시작해 백여년 가까이 지속된 이스라엘의 키부츠다. 키부츠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토지는 국유, 생산 및 생활재는 공동소유로, 구성원의 전수입은 키부츠에 귀속된다. 키부츠의 재정에 의해서 부부단위로 주거가 할당되는데,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조리 ·제공되며, 의류는 계획적인 공동구입과 평등한 배포 등의 관리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18세까지 부모와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며, 자치적으로 결정된 방침에 따라서 집단교육된다. 키부츠에는 병원, 학교, 체육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구성원들은 이 시설을 모두 무상으로 이용한다. 이상의 조건에서 키부츠의 구성원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따라서 농업키부츠의 생산성이 세계최고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의욕고취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다.
노동자들에게 고용이 안정되고 기초생활이 보장된다면 물질적 인센티브보다 다양한 장려책이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더 많은 월급보다 더 많은 휴식과 낮은 노동강도가 큰 동기가 될 수 있는 예도 얼마든지 있다. 한 일본의 무인자동화 공장은 무인화에 필요했던 비용을 사장이 산출하지를 못한다. 그 이유는 자동화공장이 어느 하루 갑자기 비싼 로봇을 구매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작업자들의 혁신이 쌓이면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공장이 무인화 되었어도 직장을 잃지 않고 여타 부서로 자리를 옮겨 훨씬 편한 노동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렇듯 혁신의 성과가 구체적인 혜택으로 보장된다면 노동자들은 창의성을 드러낸다. 사회주의사회에서 노동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정치적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그 성과물이 일부의 승진이나 호칭 수여 등으로 귀결되면서 노동자 계급내부에 갈등만을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하에서도 공장에서 제안제도가 시행되지만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은 대부분 사업장에서 제안이 채택되면 적은 금전적 보상에 그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창의적 제안이 근로조건의 획기적 변화,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억눌렀던 노동자 대중의 창발성이 폭발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꿈이 아닐 것이다.
혹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술개발의 문제를 제기한다. 연구자들에게 금전적 보상, 즉 벤처기업의 스톡옵션같은 제도가 없는데, 연구개발에 힘을 쏟겠느냐는 걱정이다. 하지만 현재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가 개인에 귀속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연구자들의 노고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열망과 보람으로 충분히 보상되고, 지금도 많은 과학자, 기술자들이 그렇게 일하고 있다. 오히려 신자유시대 연구의욕을 떨어트리는 것은 연구자들의 불안정한 지위다. 한 예로 무궁화위성을 제작한 과학자들이 모두 비정규직으로 밝혀지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러다보니 두뇌유출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연구자들의 기초생활이 보장되고 개선된 연구환경이 조성된다면 기술개발의 성과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조금 게을러질 자유도 있다.
사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생산성문제는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된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생산력은 필요이상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너무 일하고 있다. 한해에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고, 40대 돌연사가 세계 최고수준이다. 그런가하면 한해에 600억달러씩 석유, LNG, 유연탄등을 태워 없애고 있고, 세계에서 제일 많은 모피를 수입해 토끼 수만마리를 떼죽음 시키고 있다. 우리는 조금 덜 일하고, 덜 파괴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덜 열심히 일하고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적당히 소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면 우리는 사람들의 노동강도에 그리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적당한 노동강도에 많은 휴식, 그리고 조금 게을러질 필요가 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 연대의식, 그리고 기초생활 및 문화생활에 대한 충족, 자발성을 고양시키는 세계관 등이 결합된다면 우리는 결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규율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떻게 경제에서 실현되는지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