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등장한 트윈폴리오는 공식적으로 국내 남성 포크듀오의 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트윈폴리오는 듀오가 아닌 트리오였다. 1967년에 결성된 세시봉 트리오가 전신이다. 거의 모든 남성 보컬팀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이 있다. 피해갈 수 없었던 멤버의 군 입대다. 세시봉 트리오도 그랬다. 멤버였던 이익근의 군 입대로 인해 짧은 활동을 마감하고 1968년 2월 송창식, 윤형주는 듀오로 개편했다.
창작곡이 아닌 번안곡 위주의 활동에 머문 음악적 한계는 분명하지만 한국 포크사에 있어 트윈폴리오의 존재감은 강력하다. 송창식과 윤형주가 펼쳐낸 감미로운 화음은 학생층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오며 포크송의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 트윈폴리오는 이후 수많은 남성듀오의 탄생까지 불러왔다.
60년대 말 서울 무교동의 유명 음악 감상실 세시봉은 통기타 붐을 주도했던 포크가수들의 메카였다. 당시 홍익대 도안과 2학년 학생이었고 한동안 방송진행자로 활약하다 최근 사진작가로 거듭난 이상벽은 세시봉에서 대학의 숨은 재주꾼들을 위한 <대학생의 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기 학생진행자였다. 그는 홍대 교정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허름한 차림의 송창식을 세시봉에 진출시킨 공로자다. 윤형주는 “처음 포크의 기본곡이라 할 수 있는 ‘에브리 브라더스의 LET IT BE ME'도 모르고 성악곡인 오페라 ’남 몰래 흐르는 눈물‘같은 노래만 부르는 송창식이 달갑지 않아 처음엔 팀 결성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달콤한 외국 팝송 번안 곡을 주 레퍼토리로 활동을 했던 이들에게 정식 음반 취입의 기회가 왔다. 당시 이들의 노래에 관심을 가졌던 성음제작소의 녹음부장에 이끌려 첫 녹음을 했던 것. 그때가 1968년 3월. 하지만 이들의 노래가 세상에 나온 것은 시간이 한 참 흐른 12월 10일 년 말에 발매된 성음사의 시리즈음반인 ‘흘러간 외국가요 추억의 히트송 12집’을 통해서다. 트윈폴리오의 사진 한 장 실리지 않은 컴필레이션음반이다. A면 4번째 트랙에 수록된 데뷔곡은 아이러니하게도 윤형주가 송창식에게 질문했을 때 몰랐던 ‘LET IT BE ME'다. 또한 1번 트랙인 조용남의 ‘고향의 푸른 잔디’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그동안 트윈폴리오의 데뷔음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이 있어왔다.
이후 간헐적으로 한 두 곡 씩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에 참여한 트윈폴리오가 젊은 층에 열띤 호응을 얻게 된 것은 TBC TV의 심야음악프로그램 ‘한밤의 멜로디’‘청춘 잼버리’등에 출연해 팝송과 정훈희의 ‘안개’등을 노래하면서부터.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한 이들은 그해 12월, 드라마센터에서 첫 리사이틀 개최했다. 포크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공연으로 평가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후 1969년 12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트윈폴리오는 느닷없이 드라마센터에서 고별공연을 통해 팀 해체를 선언했다. 해체 소식에 경악한 팬들은 이들이 해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대중적 수요를 확인한 지구레코드는 1970년 1월 이들의 독집을 발매했다. 번안 곡 12곡이 수록된 <튄폴리오 리사이틀>이다. 흥미로운 것은 트윈폴리오의 첫 독집이 팀 해체기념앨범이라는 사실이다. 윤형주의 개인사정으로 팀은 해체했지만 이들의 인기는 꺼질 줄 몰랐다. 포크송의 열풍을 타고 이 앨범은 1976년, 1980년에 이어 수차례 CD로도 재발매될 정도로 포크 팬들의 필청 앨범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수많은 재발매 버전이 존재하는 이 앨범의 1970년 초판은 희귀하다. 비매품으로만 한정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포크의 대중화와 남성듀오시대를 연 트윈폴리오. 비록 감미로운 번안 곡 발표에만 그친 음악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하얀 손수건><웨딩케익><축제의 노래><고별><사랑의 기쁨><행복한 아침> 등 주옥같은 번안 포크송 레퍼토리는 당대의 뉴웨이브 음악이었다. 변화를 갈망하는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낸 그들의 노래는 이제는 한국 포크의 고전이 되어 애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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