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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1858~1926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후작 중추원 부의장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이다. 자는 이고 호는 이다. 1867년 4월 당시 예방승지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흥선대원군과 친구이자 사돈간이다. 이윤용은 한일합병 직후 남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남 이항구의 장남 이병길이 일찍 사망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해, 이완용의 사자로서 호주를 상속하고 작위를 이어받았다. 이항구도 1924년 2월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1910년 10월 수작 이후 유일한 추가 수작자다. 일찍 사망한 장남 이승구는 자작 임선준의 조카 사위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영희는 이완용의 매형이다. 대한제국기 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이운용을 배경으로 관계에 진출한 인물이 많게는 60여 명 이상으로 확인된다.1882년 10월 증광별시 병과 18위로 합격해, 1886년 3월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 조선 정부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에 자원입학했다. 1887년 7월 새로 개설된 미국주재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되어 워싱턴에 부임했고, 1888년 5월에 병으로 귀국했다가 10월 말 다시 참찬관으로 부임한 후 12월부터 1890년 10월까지 대리공사를 지냈다. 1891년 3월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고 1892년 9월 이조참판을 거쳐 1893년 8월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생모의 상을 당해 모든 벼슬에서 물러났다. 1894년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면서 외무협판에 임명되었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에 학부대신으로 입각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주도해 파천 당일 외부대신에 임명되었고, 7월에 열린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897년 7월 러시아의 군사교관단 파견을 거부하다가 외부대신에서 학부대신으로 체임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안남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평안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같은 달 전라북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재임 중이던 1898년 7월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했다.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 외국에 만ㅇ흔 이권을 넘겨준 일 때문이었다. 1900년 7월에는 공금유용 혐의로 전라북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다. 1901년 4월 양부 이호준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떠나 있다가 1904년 1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5년 9월 학부대신에 임명되었고, 11월에 ‘을사늑약’체결에 찬성함으로써 박제순(외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과 함께 ‘을사5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07년 5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추천으로 참정대신에 올랐고, 6월에 관제 개편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황실을 보존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고종의 양위를 상주했고,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양위식 집행을 거부하자 18일자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를 맡아 양위식을 집행했다. 같은 달 24일 대한제국의 입법권 행정권 인사권 등 내정권을 통감에게 넘겨주는 정미조약(한일신협약)체결을 주도해 임선준(내부대신), 이재곤(학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조중응(법부대신), 이병무(군부대신) 송병준(농상공부대신)과 함께 ‘정미7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같은 날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해 언론통제의 근거를 제도적으로 마련했고, 27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공포했다. 같은 달 31일에는 순종에게서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을 받아내 황실을 호위하는 1개 대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동화장을 받았다.
1907년 10월 한국 시찰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한성부를 보조하는 비상설 단체로 조직된 대일본(제국)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 고문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황태자 태사 이토를 보좌하는 황태자 소사에 임명되었고, 12월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에 추대되었고, 8월 조선에 대한 자선구제와 복리증진을 명분으로 진출한 동양협회 취지에 찬성해 찬성금을 기부했다. 동양협회는 1907년 2월 조선과 타이완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되었다. 1908년 10월 일본적십자가사가 주는 유공장을 받았고, 11월에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대한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기사를 초빙해 산림사업을 주관했다. 1909년 1월 순종이 남한지역(대구.부산.마산 등)과 서쪽 지역을 순행할 때 통감 이토와 호종했다. 같은 7월 이토의 후임으로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와 함께 사법 및 감목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기유각서’와 한국중앙은행에 관한 각서에 조인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으로 추밀원 의장 이토가 사망하자 정부대표로 청국 대련에 가서 순종과 고종이 조문칙사로 보낸 시종원경 윤덕형, 숭녕부 총관 조민희등과 함께 조문했다. 같은 해 11월 4일 도쿄에서 열린 이토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대한제국정부.내각과 한성부민회 주최로 관민추도회를 열고 내각 대신들을 대표해 ‘고 태자태사 대훈위 문충공 공작 이등박문 전하’에게 올리는 조사를 읽었다. 같은 달 이토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동상을 세우고 표창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동아찬영회 총회에서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토 사망 후 내각 조문대표로 일본에 가 있는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시켜 일본의 대한정책을 탐문케 했고, 일진회가 성명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자 1909년 11월 탁지부 대신 고영희를 오사카의 조폐국 화폐시찰 명복으로 일본에 보내 수상 가쓰라 타로에게 ‘합방안 5개 조항’을 제출케 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해 12월에 일진회가 ‘합방청원서’를 발표하자 일진회의 ‘합방청원’을 저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측근인 이인직을 시켜 원로 정치인과 반일진회 세력을 규합해 국민연설회를 열게 하는 한펀 일진회가 황제와 내각에 보낸 상주문과 의견서를 돌려보냈다. 같은 달 22일 종현 천주교 성당에서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이재명의 칼에 찔려 왼쪽 폐를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 때 입은 상처는 만년에 해수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천식과 폐렴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0년 7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합병조약’체결 협상을 벌여 최종안을 확정 지은 후, 8월 22일 창덕궁에서 열린 ‘합병조약’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서 조약 체결 전권을 위임받아 조중응과 함께 통감 데라우치 관저에서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 양여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완용은 ‘합병조약’을 주도함으로써 황족대표로 참석한 이재면, 박제순(내부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고영희 민병석(궁내부대신), 윤덕영(시종원경), 이병무(시종무관장 겸 친위부 장관)와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총독부가 주는 퇴직금 1458원을 받았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연수당 1600원을 받았고, 1912년 8월부터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어 1926년 2월 사망할 때까지 14년여 동안 연임하면서 매년 2000원에서 3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조선 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명농회조직에 참여해 취지서와 규칙을 발간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15만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창립총회에서 백작 이사에 선출되었꼬, 1918년 5월에는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에는 임기가 만료된 조선귀족회 대표이사에 다시 선출되었다. 조선귀족회는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11년 10월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행사에 조선 귀족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일본을 정식 방문했다. 1912년 1월에는 요양을 위해 일본의 온천지 벳푸에 가서 두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3월에 조선귀족심사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경기도에서 농지 50정보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들로 결성된 농사장려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달에 천황 메이지의 병문안차 조선 귀족 대표로 도쿄에 갔다가 메이지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두 달 동안 머물다 돌아왔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에 종3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1월 조선귀족회 총회에 참석해 ①국어(일본어)보급을 위해 유치원 창설 ② 귀족 자제에 대한 정신교육을 통해 이들의 소행이 향상되었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인의도덕을 갖춘 유용한 재기로 양성 ③ 귀족의 재산보호를 위해 힘쓰고, 이를 위해 지방 소유 전토를 시찰하는 동시에 농업의 개량 장려를 주장하여 외지 농민에게 모범을 보일 것 등 3개 항을 의결했다. 같은 해 4월 메이지에 이어 등극한 다이쇼를 문안하기 위해 조선 귀족 대표로 도쿄를 방문했고, 7월에는 메이지의 1주기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도쿄를 방문했다. 이때부터 생일도 음력 6월 7일에서 양력 7월 17일로 바꿨다.
같은 해 7월 조선 귀족들의 식림사업.농장경영.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임업조합보식원창립총회에서 간사에 선출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자리가 비어 있던 원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10월 천황 다이쇼가 이완용의 필법을 직접 보기 위해 휘호를 써 보내라는 전갈과 함께 비단 한 필을 보내왔다. 이완용은 그 날로 ‘해저를 벗어나지 못하니 온 세상이 어두웠는데, 천중에 이르니 만국이 밝아지도다’라는 시를 그 비단에 써서 일본 궁내성에 바쳤다.
1914년 9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부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 총회에 참석해 상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 명예회원으로 기부금을 냈다. 1915년 8월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에 추대되었고 10월 초선총독부가 농업지도와 농민지배를 목적으로 후원해 조직한 조선농회의 회두에 선임되었다.
1915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천황 다이쇼즉위 대례식에 참석하고 처 조씨와 함께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6월 총독 데라우치의 일본 내각 총리대신 영전을 축하하고 후임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영접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같은 해 7월 조선인 문사와 인본인 문사들의 친목단체인 이문회의 회두에 선출되었다.
1916년 9월 조선반도사 편찬 및 조선인명휘고 편찬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반도사 편찬은 조선사 편찬으로 이어졌고,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에 임명된 데 이어, 1925년 7월에는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임명되었다.. 1917년 10월 ‘조선불교를 옹호하고 더욱더 신앙적 수양을 쌓아 소질권면의 풍을 흥하고 충량한 신민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불교옹오회의 평의원장에 선출되었다. 1918년 4월 정3위로 승서되었고, 7월에 조선국세조사평의회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서화예술의 진흥 및 서화취미 보급을 목적으로 조직된 서화협회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때 어장주감제조 및 국장 고문과 장의괘 차장에 임명되어 장의를 주관하고, 고종의 생전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과 덕행을 칭송하는 시책문을 직접 썼다. 같은 해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고종 국장 이후 3.1운동이 격화되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세 차례나 ‘경고문’을 발표했다. 4월5일자 「의 경고」라는 제목의 제1차 ‘경고문’에서, “조선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설이며 망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각 지방에서 이를 듣고 뒤따라 치안을 방해하니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 진압하려면 못할 것도 없다. 근일 듣자하니 몸 처에서 다수 인민이 사상하였다 하니 그 중에는 주창한 자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뒤따른 자일 것으로 자신한다. 남을 따라 망동하면 다치거나 죽음이 앞에 있을 것이니 이야말로 살아서 죽음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안심 진정함이 일시라도도 늦으면 그만큼 해가 될 것이니 오호 동포여 내말을 잘 듣고 후외하지 말라. 나의 이런 권고에 대하여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본인과 만나 마음을 터놓고 의견 나누기를 바란다”고 했다.
4월9일자 「재차경고」에서는 “본인이 동포 제군에게 경고한 목적은 단순히 인민의 사상을 없게 하고자 함이다. 근일 각 신문지상으로 제군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처의 언론이 더욱 엄중하니 본인도 조선인이라 책임상으로나 인정상으로나 그 위험이 목전에 다가와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매국적의 경고라 하여 자신의 안위에까지 유관한 일을 듣지 않음은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지성이면 하늘도 감한다니 제군이 감하기까지 위협을 불원하고 다시 한 번 경고한다”는 호소조의 2차 경고문을 발표했다. 5월 30일자에는 「이백삼차경고」라는 제목의 경고문을 발표해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독립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앚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오늘날 구주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를 개조하려는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 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요”라고 하면서 조선독립의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병합 이래 근 10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참정권.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제군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받을 수 있다”고 회유하면서 “가장 급한 것은 실력양성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1919년 8월 자작 조중응이 사망하자 『매일신보』 8월 29일자에 「진취적 기상에 장한 동양민족주의자-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내선융화에 진력하여」라는 글을 실어 조선-일본-중국을 아우르는 ‘동양민족주의자’를 주장한 조중응의 뜻을 이어 내선융화에 힘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왕세자 의 결혼식이 확정되자 『매일신보』1916년 8월 4일자에 「일선영구의 친의-무상의 경사」를 발표해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통혼을 통해 내선융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4월 도쿄에서 치러진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마사코(이방자)의 결혼식에 조선 귀족을 대표해 참석했다. 같은 해 12월에 후작으로 특별히 승작되는 한편 임시교육조사위원에 임명되었다. 최초 수작자이면서 승작한 경우는 자작에서 백작이 된 송병준과 함께 두 명 밖에 없다. 이완용은 매일신보 1920년 12월 29일자 「우악한 성지에 감읍」에서, “천은의 감격하옵심을 깊이 느껴 폐하의 성지의 만일에 봉답코자 익익 노력코자 하며, 금후 내선 공존공영의 실을 거하여 선제폐하와 이태왕 전하께서의 일산병합의 본지를 진하며, 겸하여 동양평화를 함은 물론 내선 양족으로 합성된 대일본제국 국위가 세계에 표양됨을 깊이 축하하는 바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1921년 1월 대정친목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귀족.대지주.실업가들의 친목도모와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같은 해 8월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경성도시계획연구회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1925년 8월에는 실행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1922년 3월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에 위촉되어 1925년 5월 제4회 때까지 매년 서예부문 주임을 맡았다. 1924년 6월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용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고문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조선불교대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1920년 9월 설립된 조설불교대회가 1925년 5월 재단법인 조선불교단으로 바뀐 후에도 고문을 맡았다.
조선불교단은 불교를 통한 조선교화사업을 위해 조직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선불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 내선융화의 보조, 조선인의 사상 통제에 목적이 있었다. 같은 해 10월 종2위로 승서되었다.
1926년 2월 2일 사망했다. 사망 다음 날 특지로 정2위로 추서되면서 대훈위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같은 달 16일 이완용의 유언에 따라 아들 이항구가 사회사업기부금으로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3만원을 전달했다. 1925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300만원으로 조선귀족 가운데 6000만원을 소유한 민영휘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1935년 2월 경성부 공회당에서 이완용 사망 10주년을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1939년 11월 일본의 대륙낭인단체 흑룡회가 주최한 ‘일한합병’ 30주년 원훈 추도식에서 이용구.송병준.박영효 등과 함께 합병공로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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