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교에 후라빠가 많았지? C 여고에 많았지, 아마. H 여고 아니에요? 아니지, 거긴 너무 수준 이하라 후라빠라 할 수 없어. 아니, 그럼 후라빠가 좋은 거예요? - 인일여고 총동창회 댓글의 내용을 재구성함 - | ▲1978년의 인천여고 학생들. 뒤에 보이는 송도가 매우 인상적이다.(출처: 인천여고 총동창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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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머리에, 딱 달라붙고 짧게 입은 교복 상의, 무릎이 드러나는 플레어스커트에 돌돌 말아 신은 흰 양말, 1960~70년대에도 늘 시대를 앞서 가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자 했던 인천의 ‘후라빠’들은 존재했다. 영어의 ‘flapper(플래퍼)’를 뜻했던 ‘후라빠’는 ‘건달 아가씨’, ‘왈가닥’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여성의 조신함을 강조하던 당시에도 이렇게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던 여학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주변의 남학교 학생들은 한편으로는 조신한 여학생들의 옷매무새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몸매가 드러나는 후라빠들을 본능적으로 선호했다.
| ▲예전 제물포고등학교 교복. 제물포고 8회 잡초그룹 학생들. 뒤에 보이는 것은 1908년에 만들어진 폭 4.5m, 높이 13m의 홍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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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소중한 추억을 담고 있는 교복 전동 1번지와 전동 25번지에 자리했던 인천의 대표적인 두 공립 여학교인 인천여고와 인일여고(인천여고는 1998년 연수동으로 이전했고 현재는 인일여고만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가면 당시 여고생들에게 교복이 얼마나 학창 시절의 추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교복, 누구나 십대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같이 떠오르는 것이 교복이 아닐까. 그만큼 교복은 우리들의 그리움의 한 편에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교복의 역사는 구한말 배재학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으나, 해방 이후부터 1982년 교복자유화 조치가 단행되기 이전까지는(시행은 1년 유보되어 1983년부터) 대체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왔던 권상우와 한가인이 입었던 교복을 생각하면 쉽게 연상할 수 있다.그 시절 전국의 남학생들의 교복은 검은색 일색의 제복 형태였으며, 중∙고등학교를 막론하고 교표를 제외하고는 전학을 가더라도 어느 지역에서든 그대로 입을 수 있는 통일된 복장이었다. 여고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학교별로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당시에는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중∙고등학교가 병설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보통 중학교에 입학할 때 입었던 교복을 고등학교 때까지(특히 치마가 그러했다.), 심지어는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이 6년 넘게 입던 교복을 수선하여 물려 입는 경우들도 많았다.
| 만국공원 앞에서의 기념촬영. 자로 잰 듯한 치마 길이, 하얀 운동화에 양말을 곱게 접어 신은 단발머리의 아리따운 여학생들. 어느 학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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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3년, 길게는 6년까지 입을 생각에 큰 옷 선호한창 멋을 부리는 데에 관심이 많은 여고생들에게는 교복과 관련된 참 가슴 아프고도 애틋한 사연들이 많다. 1960년대에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친 여성들이라면 특히 더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어렵고 못 살던 시절이었고, 뭐 하나 넉넉한 것이 없던 때가 아니던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교복이라는 걸 처음 입어보게 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배다리 중앙시장 양장점에 동복을 맞추러 가지만, 들고 오는 옷은 자신의 체구와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을 입어야 하다 보니 워낙에 넉넉한 크기로 산 까닭이다. 스커트는 허리를 몇 번이나 접어서 입어야 했고 상의는 어깨가 팔뚝까지 흘러내려 소매를 걷어도 도무지 맵시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정도는 나은 편이다. 동생들은 한술 더 떠 일명 ‘우라까이’라고, 옷을 뒤집어 다시 만들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우라까이(맛을 살리기 위해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쓴다.)를 거친 옷들은 아무리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성에 차지 않기 마련이다. 옷감이 거친 데다 겉과 속의 색이 달라 아무리 좋게 보아도 뒤집어 수선한 것이 눈에 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이 무서워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입고 나서지만 등굣길에 마주치는 친구들과, 근처에 위치한 남학교의 학생들의 시선 때문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가장 억울한 경우는 언니가 3년 터울일 때이다. 언니의 졸업과 동시에 입학을 하는 동생들은 새 옷은 언감생심, 언니의 옷을 그대로 물려 입곤 했다. 첫째의 경우도 형편이 어려우면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졸업한 사람의 교복을 빌려 입는 일도 종종 있었고, 새 옷을 맞추더라도 그 교복이 닳아 빠져서 색도 낡고 보풀이 일어도 새로 맞춰 달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낼 생각도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 교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많은 학생들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찌감치 등교하곤 했다. 조금이라도 학생들이 드문 시간에 서둘러 학교에 간 것이다.
1983년 교복자유화 이후 사회상과 문화 바꿔놔 검은색 일변도의 교복 문화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알다시피 1980년대이다. 1981년 10월 중순, 당시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확정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개혁 조치를 감행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학생들의 두발자유화, 교복자유화 조치였다. 이 정책들은 모두 1982년에 초에 발표되어 시행됐는데, 교복자유화 조치는 교복 업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 해 유보된 뒤 1983년부터 시행되었다. 신군부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단행된 교복자유화 조치는 1980년대 사회상과 학교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시행 이후 약 3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사복 착용에 따른 빈부격차의 갈등이라든지, 아침마다 입고 갈 옷을 정하느라 학생과 학부모가 모두 불편해 했다든지, 학생들의 교외 지도가 너무 힘들다는 학교 현장의 목소리가 컸다는 점 등이다.
| ▲1972년 인일여고 1학년 학생들. 검은색 스웨터의 교복을 당시 여학생들은 몹시나 어색해 했다고 한다. (출처: 인일여고 총동창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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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85년부터 교복자유화 조치는 학교장의 재량 하에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바뀌게 되었다. 1989년에는 약 13%, 1991년에는 절반가량, 1993년에는 83.5%, 1998년에는 전국 중∙고등학교의 95.5%(교육부 통계)에 달하는 학교가 교복 착용을 택하면서 사실상 교복자유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교복은 과거의 검은색 제복 형태가 아닌, 학교별로 다양화된 정장 차림이었다. 오늘날 과거의 교복 세대들은 그 시절의 교복에 대한 향수가 더 진한 듯하다. 특히 그 어렵던 시절 학교에 다니던 여고생들에겐 아직도 옷장 서랍 안에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해 둔 교복이 세월의 무게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십대의 시절을 계속 붙잡아 두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리운 학창 시절, 빛바랜 추억의 옛 고교 시절 졸업 앨범을 꺼내면 꿈을 꾸듯 생생하게 떠오르던 그리운 얼굴들, 애틋했던 순간들, 그리고 교복.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십대. 누구의 말마따나 지나간 것은 온통 그립기만 하다.
글· 사진 이동구 인천광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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