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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중평원 설명도
중국 최초의 농경문화가 6천년 전에 시안 근처에서 시작되었다니 시안은 정말 대단한 곳이다. 위쪽엔 황하의 지류인 위하가 흐르고 아래쪽엔 원시삼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냥이 가능한 곳이기에 인류가 처음 문명을 꽃피우기는 천혜의 조건인 것 같다. 이 지역을 중국에선 관중평원이라 한다. 따라서 도읍으로써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방어가 용이하기에 일찍 나라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시안은 참 오랜 역사를 지닌 반듯하고 매력적인 도시다. 성곽도시로 계획적으로 지어졌고 그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로마, 아테네 그리고 카이로와 더불어 서안은 세계 4대 고도 중 한 곳으로 알려졌다. 오랜 세월 도읍으로 있다 보니 도시 규모도 제법 클 뿐 아니라 반듯하게 도시를 만들었다. 지금보면 시안은 중국의 수도로는 부족하지만 또 세월이 지나면 예전처럼 다시 수도로 발돋음 할지도 모르겠다.
▶ 조양문
▶ 조양문 근처 해자
오늘은 시안 성벽을 둘러보고 이슬람 거리의 낮 풍경을 본 다음 대자은사를 둘러 보려한다. 아침 먹기 전 동쪽 성곽을 둘러보려 숙소를 나선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동쪽으로 걸으니 거대한 성벽과 함께 조양문(朝陽門)이 보이는데 누각이 없는 통행문인 이 문 안으로 차량과 사람들이 분주하게 통행한다. 조양문 밖으로 나가니 폭이 10m는 넘을 듯한 해자가 보이고 높고 웅장한 시안 성벽 위엔 당나라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 안정문에 있는 시안 성벽 설명도
시안 성은 중국 고성 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성이다. 전체 길이가 13.7km 정도고 높이는 12m이며 폭은 사다리꼴로 아래가 조금 넓어 15-18m 정도이고 위는 12-14m 라 한다. 시안이 중국의 역사여행지가 된 건 역사적인 관광지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시안 자체에서 풍기는 테마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시안은 서부 내륙에서 가장 상업화되고 발달한 도시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시 내부에서 역사적인 향수를 맡을 수 있는데, 그 정점에 시안성벽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시안 기차역 부근 북문
시안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이곳이 범상치 않은 도시임을 느낄 수 있다. 역 바로 앞에 보이는 커다란 성벽에 압도당해 많은 관광객들은 시안 성벽을 보면서 고대 도시에 왔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대부분 도시들은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도시의 테마가 없어 어느 도시를 가도 그 도시가 그 도시 같고 그 도시만의 정체성이 없는데 반해 시안은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이렇게 높은 성벽이 있으니 시안은 역사도시라는 아이덴티티가 확실하게 각인된다.
▶ 시안 성벽 안내도
▶ 시안 성벽
시안의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벽 구간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중국어로 시안성벽은 시안구청치앙(서안고성장, 西安古城墙)이라고 한다. 古 한자를 쓴 건 당연히 오래되었다는 뜻이고, 성벽을 뜻하는 중국어가 城墙이다.
▶ 바깥쪽이 당나라 때 성벽이고 안쪽 파란선이 현재 성벽
시안성벽은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 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안은 당나라 때 화려한 국제도시였고, 웅장한 성벽으로 조성해야함이 당연했으니까. 과거 당나라 때의 모형을 보면 실제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은 굉장히 크다 그에 비해 지금의 시안 성벽은 규모면에서 당나라 때 보다 작다. 당나라 말기 도읍을 뤄양(낙양, 洛阳)으로 옮기고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수도 장안은 사실상 황폐화되었고 자연스레 성벽은 허물어졌다. 현재 시안성벽은 명나라 때 당나라 때 장안 황궁성을 따라 새롭게 성을 쌓았는데 그게 지금의 시안성벽의 골격이다. 예를 들면 서울 도성이 있고 경복궁 성벽이 있는데 명나라 때 서울 도성은 놔두고 경복궁 성벽에 새로이 성벽을 쌓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현재의 시안 성벽은 상당한 규모다. 명나라는 성 쌓기에 목숨을 건 나라였다. 만리장성 대부분이 명나라 때 보수되고 새로 지어졌다. 이유는 명나라 6대 황제 정통제 영종이 몽골계 부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중원의 황제가 오랑캐라고 비웃었던 민족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 성벽을 쌓는데 국력을 모두 쏟는다.
▶ 시안 성벽
시안 성벽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600여 년간 이어지고 있다.”라는 말이 있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그렇지 않다. 현재의 골격이 명나라 때 축성된 것은 맞지만 지금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명나라 이후 청나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시안성벽은 사실상 그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문화대혁명과 급격한 도시화로 그 형체가 많이 사라졌다. 1966년~197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이후 개혁개방정책에 의한 급격한 도시화는 중국의 많은 문화유물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 예로 시안성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했던 베이징성은 문화대혁명 때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왕복 8차선도로와 지하철 2호선을 만들었다. 베이징에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문'이 들어가는 역명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문들이 과거 베이징성의 성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문 역에 내려서 어디를 둘러봐도 성문은 보이지 않는다. 시안의 성벽 역시 문화 대혁명과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상당부분 훼손되어 1984년 이후 명나라 때 축성된 성을 기초로 대대적으로 복원공사에 들어가 지금의 시안성은 사실상 1984년 이후 복원 된 모습이다. 결국 지금 보는 성은 지어진지 20여년 된 성이라고 볼 수 있다.
▶ 새벽거리를 거니는 시민들
▶ 중산문
▶ 동문인 장락문
해자 옆을 따라 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벚꽃과 라일락꽃이 활짝 핀 공원에는 시민들이 모여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스모그 안개로 공기가 상쾌하진 않지만 성벽을 따라 중산문(中山門)을 거쳐 동문인 장락문(長樂門)까지 걷는다. 굉장히 넓고 웅장하며 멋있는데 이 웅장한 성벽이 더욱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옛 유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명나라 때 이렇게 거대한 성을 쌓았다는 것이 대단하고 신기하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장락문은 누각이 있는 문이지만 성벽 위로 오르는 곳을 발견할 수 없어 올라가 보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 옥양문
▶ 옥양문 옆 성곽
▶ 옥양문 앞에 있는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장군 상
▶ 공원으로 운동나온 시민들
▶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시민들
▶ 공원에서 나물캐는 아주머니들
성벽 밖으로는 해자를 만들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쉽게 함락되지 않도록 대비했고 문은 동서남북으로 큰 대문을 만들고 사이에 또 작은 문을 만들어 사통팔달이 되도록 했다. 성문 위엔 성루를 만들어 외부의 동태를 살피기 쉽게 하였으며 유사 시 지휘부로도 쓸 수 있도록 했다. 드나드는 성문 밖으로 반달모양 월성을 만들어 외부로부터 성문이 쉽게 노출되지 않을뿐더러 침입한 적은 그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전쟁이 잦았던 나라의 성벽 외곽은 일본이나 이곳처럼 해자를 파서 전쟁에 대비했지만, 신의 도시란 앙코르 와트의 해자는 같은 해자라도 의미가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를 가르는 구분 선이라는 게 다르다.
▶ 안정문 옆 해자
숙소 앞 오구로(五口路) 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소문인 옥상문(玉祥門) 역에서 내려 서문인 안정문(安定門)으로 걸어 갈 계획으로 지하철을 탄다. 오구로 역에서 옥상문 역까지는 세 정거장이라 5분 정도 걸린다.(1人/2元) 옥상문 역에 내려 해자 안쪽으로 조성된 공원은 제법 넓은데다 숲이 적당히 조성되어 있고 휴식장소가 마련돼 있어 시민들이 곳곳에 모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무술연습도 할 뿐만 아니라 나물을 캐는 아주머니들도 볼 수 있어 걷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 실크로드 출발점을 알리는 낙타상
▶ 안정문 전경
▶ 실크로드 시작점 안내판
서문인 안정문 앞엔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라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낙타를 몰고 있는 상인들의 조각상이 보인다. 시안성벽에서 가장 의미있는 곳이 안정문이다.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란 상징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시안성벽에서 명나라 때 누각이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에 있는 누각들은 다 복원된 것이다.
시안성벽은 외부에서 조망하는 것은 물론 위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남문과 서문에서 각각 표를 사야 올라갈 수 있다. 시안 성벽 서문 주위는 서울의 남대문처럼 교통의 요충지이고 남문 주위의 건물들은 성벽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고전풍의 인테리어로 되어있다.
▶ 월성과 월성내 우물
성벽 위에 올라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 그런데 입장료가 꽤 비싸다.(1人/54元) 아내는 입장료를 보더니 커피숍에서 쉬고 있을테니 나만 올라갔다 오라고 한다. 아내를 인근 커피숍에 데려다 주고 입장권을 사 안정문 안으로 들어가니 반달모양의 월성이 보인다. 월성은 외부로부터 성문이 쉽게 노출되지 않을뿐더러 침입한 적은 그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월성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정양무궁(井養無窮)이란 우물이 있는데 과거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이 갈증을 달래 주던 당나라 때부터 있던 우물이란다.
▶ 성벽길
월성 양쪽에 마련된 돌계단을 따라 성벽 위에 오르면 커다란 전각 두 채가 월성 서쪽 끝과 동쪽에 마주 바라보고 있고 널따란 성벽 길이 나타난다. 성벽 위는 제법 넓어 4차선 도로는 될 듯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온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 망루
▶ 옹성에서 바라 본 안정문
▶ 성가퀴
일정한 간격으로 옹성과 망루를 세웠고 전쟁에 대비해 여장이라는 성가퀴가 보인다. 성가퀴라는 것은 적의 공격에 몸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담장과도 같은 것이다. 성 밖으로는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워 공성전에서 무척 유리한 입장에서 싸웠을 것 같다.
2004년부터 시안 성벽을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역사문화탐방구로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수원화성 역시 복원된 성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지만 시안 성벽의 경우 인위적인 느낌을 많이 든다. 중국에서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자연스레 입장료가 올라가고 그 주변이 상업화되는 걸 다른 관광지에서 많이 보았다. 만약 이 시안 성벽이 명나라 때부터 쭉 이어진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지만 대대적인 복원공사로(사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복원됐는지도 의문이다.) 어떻게든 인위적으로 관광지를 조성하려는 것을 보면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시안성벽 역시 본연의 모습을 지켰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벽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어 다시 이슬람거리로 간다. 낮의 이슬람 거리 풍경을 보기 위해서다.
▶ 고가대원 안내판
▶ 고가대원 현판
이슬람거리를 걸어가다 보니 주마문(走馬門)이란 문이 보인다. 말을 타고 문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한때 이 집 주인은 세상에 부러운 게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문 위엔 방안급제라는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지방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해도 성공한 사람이었을 텐데 방안급제라는 말은 장원급제 다음 차석이라는 말이다. 편액 가장자리로 벌써 용이 꿈틀거리는 장식이 있다. 3등은 탐화 또는 랑이라고 했는데 탐화라는 말은 3등급제자가 황제로부터 어사화를 받아 나머지 등외 급제자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해 탐화라 불렀다 한다. 그러니 임금은 3등까지만, 직접 챙겼나 보다. 고악송(高岳松)이 아홉 살인가 열두 살 때 과거시험에서 2등을 해 황제로부터 이 저택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방안급제라는 현판을 자랑스럽게 걸어두었나 보다.
▶ 고가대원 사당
▶ 고씨 3대 영정
고악송은 후에 재상까지 지냈다고 하니 무척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다. 원래 장사를 해 돈을 벌었던 집안으로 공부로 성공해 재력에 권력을 더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살았을 것이다. 입구에는 고부(高府)라는 등을 걸어놓았다. 고 씨네 집이라는 뜻이니 이 집은 청나라 건륭제 때 과거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고 씨네 집이다.
▶ 고가 대원 내부
▶ 주인방 침대
▶ 주인방
▶ 고악송의 딸 방에 있는 침대
▶ 고악송의 딸 방에 있는 초상화 :고악송의 딸(?)
400여 년 된 원래 80칸 정도의 집이었다 한다. 이 집은 중국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사합원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면 무척 답답하다. 그가 잘 때 베고 자던 목침이 금고니 돈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돌아 보다 보니 어느 방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악송의 딸이 자던 방이라는데 난방시설이 없어 겨울에는 무척 추웠을 것 같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를 안고 잤나 보다.
그런데 왜 햇볕조차 비치지 않을 정도로 건물을 붙여지었을까? 정원도 좁고 담장은 왜 이리 높게 쳤을까? 이런 집에서의 느낌은 높은 담장, 좁은 공간,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실내 그리고 음침한 느낌뿐이다. 사합원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이웃과 등을 돌리고 사는 폐쇄적인 그들의 성격을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