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궁리를 한다 - 유인규
오늘도 궁리를 한다. 정확하게는 놀 궁리.
생각해 보면 항상 똑같았다. 뭐하고 놀지.
철이 안 들었던 아주 오래 전에도, 철이 들었다고 착각했던 얼마 전에도, 철이 들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 지금도 항상 똑같았다. 뭐하고 놀지. 어떻게 더 잘 놀지.
"우리는 늙어서 놀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놀기를 멈추어서 늙어간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호르몬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근육량이 중요한 게 아니고, 놀기를 멈추는 것이 문제라니 격하게 공감한다. 나는 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 말에 따르자면 어쩌면 평생 늙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잘 놀았다.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방문을 빼꼼 열어보던 엄마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누가 봐도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놀고 있는, 그런 방법을 찾아내서 놀았다. 집에서도 집밖에서도 종종 지난한 인간 관계로 피곤할 때면, 혼자서 맘 편한 상태로 더 재밌는 방법을 찾아 창의적으로 놀았다. 게임을 극한으로 어렵게 설정해서 플레이를 한다거나 변형을 추가한 규칙으로 바둑을 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는 것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힘들어하거나 싫어한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결혼 후 18년이 넘게 육아와 양육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아내는 나를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으로 확실하게 오해한 듯했다. 아이보다 가정보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다 보면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생긴다. 몇 십분이나 몇 시간처럼 잠깐일수도 있고, 외로움이나 정서적인 관점에서 보면 꽤 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난 단지 혼자 남겨는 시간을 힘들지 않게 주어진 상황에 맞게 보내는 요령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누구이든 무엇이든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힘들지 않았을 뿐이다. 혼자 있는 시간도. 놀거리는 항상 존재하고 어떻게 더 잘 놀까 하는 궁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할 수 있었으니까.
아내는 원래 좀 쿨한 편이었다. 연상이기도 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씹한 것이 더 나쁘냐 안읽씹한 것이 더 나쁘냐가 한참 논란이었을 때, 아이에게 말했다. 늬 엄마는 듣씹이라고. “내가 몇백 번이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엄마는 듣고 씹어.”
아내는 시크하게 답했다. “나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좋아한 거면서 왜 그래.”
손을 잡고 가다가 내가 허리에 손이라도 감으면 매우 귀찮다는 내색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부부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남들이 불륜커플인 줄 알아. 아니면 재혼커플이거나. 게다가 당신 나이에 이러면 남들이 내가 무슨 절세미녀쯤 된다고 오해한다고."
지난 번에는 빠른 걸음으로 총총 앞질러간 사람이 얼마나 미인이길래 하는 눈빛으로 확인하듯 자기를 돌아보기까지 했다고 억울해했다.
"우리 정도 나이면 동료애로 사는 거야. 전우애 알지?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히 뒤를 지켜주는 전우애 말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타이른다. 싫은데? 나는 싫은데?
아내가 또 말했다. "그동안 혼자 잘 놀다가 왜 이 나이에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나는 언제나 항상 당신과 아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내가 진짜로 가족 생각도 안하고 미래 생각도 안하고 혼자서 잘 놀기만 할 거면 골프를 쳤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먹히지 않는다.
"거짓말하지마. 당신 골프치는 거 싫어하잖아."
아내는 특별히 궁리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가끔 나에게 ‘알고 그러는 것 같진 않은데 무의식이 못됐다’하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솔직히 가끔 뜨끔할 때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무의식은 건드리지 마라. 무의식을 어쩌란 말이고.
오늘도 궁리를 한다. 이제는 둘이 함께 오랫동안 잘 놀궁리.
올해는 특히 한국의 여름이 요상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요란한 여름이다. 은퇴하면 일본에 가서 몇 년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쏟아지듯 일본으로 놀러가던 여행인파가 급격히 꺾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100~400년을 주기로 발생하는 규모 8~9급의 거대지진인 난카이 해곡 대지진 주의보라니 꽤 어수선하다. 지구 한편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서 전쟁도 계속되고 있다. 기후변화에다 전쟁에다 뭔가 전 지구적 재앙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문제들이 궁리한다고 해결이 되려나 싶다. 내 궁리는 아직도 나와 내 가까운 삶의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를 향하고 인류를 향하는 고민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우린 답을 찾겠지 늘 그랬듯이.
그런데 아내님, 난 전쟁이 나더라도 내 뒤를 당신에게 맡기지는 않을 거야.
첫댓글 혼자 놀기에서 둘이 놀기를 궁리한다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듭니다. 저는 이제 그만 혼자 좀 놀아보고 싶기도 합니다만... 인규님 속에 즐거움을 찾는 개구쟁이 아이가 살고 있는 것 같아 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저도 가끔 그런 놀고 싶어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둘째와의 생활에서도 웃음을 찾으며 한 생을 버텨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통! 재미있는 글이다.' 제 감상평이네요. 과연 이 글을 읽고 배우자님은 어떤 말을 하실지 궁금합니다.(보여주셨나요? ㅎㅎ)
'혼자 놀 궁리'를 하는 저로서는 아주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다만, 마지막 문단에서 갑자기 전쟁 등의 글로벌한 이슈들이 적어주셨는데, 뭔가 저는 '갑자기? '하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문체가 달라진 듯 해서 갑자기 진지한 느낌으로 마무리가 된 듯 해요. 끝까지 유쾌한 톤으로 마무리 되었으면 더 좋아겠다 하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항상 인규님 글에는 유머코드가 담겨있어서 좋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