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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는 태산까지 답사기를 썼습니다. (4)부에서는 우리 전북문화광해설사님들의 전북을 알리는 홍보활동 사항과 대성공자님이 활동한 지역인 노(魯)나라 옛 수도였던 곡부와 공자님이 살았던 마을과 공자님의 무덤이 있는 공림, 공자님의 일생 등에 대하여, 다시 제나라 지역 적산법화원, 적산법화원을 답사 후 바로 군산항으로 입국할 때까지 썼습니다.
대성공자(大聖孔子)
곡부에서의 밤은 깊어가는 줄 모르고 깊어갔다. 태산 등정의 피로와 장시간 차를 탄 여독 때문이리라.
곡부의 아침이 왔다.
공자님의 마을이며 공자님이 묻혀있는 곳. 공자님의 옛 자취를 더듬어 오늘의 우리 삶을 견주어 미래의 밝은 삶을 지향해 보는 것이다.
성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현재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를 비춰보기 위하여 공자님 마을에 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님의 사상에 대한 치우친 편견에 떨어진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공자님을 회자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체가 치우친 편견이라 생각한다.
공자님이 살던 몇 천 년 전의 춘추전국시대를 우리가 어찌 몇 줄의 책을 읽어 가늠이나 하겠는가.
우리는 공자님을 뵈러 가기 전에 현지인 등에게 대한민국, 우리 전북의 홍보활동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전북 홍보와 병행하여 우리 전북문화관광해설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측면이 더 강하리란 생각도 해본다.
모두가 열심이다.
현지인들의 반응도 좋았다.
한참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와 자기도 홍보물을 달라 해서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홍보물을 보면서 설명을 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 또한 중국에 와서 한국 전라북도의 홍보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낀다.
금세 홍보물이 동나 버렸다.
버릇처럼 줄을 섰다.
캠코더 촬영을 위하여 뒤에 만치 서서, 공자님이 살던 춘추전국시대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님이 사시던 춘추전국시대, ‘춘추(春秋)’라는 말은 공자님이 직접 쓰신 노(魯)나라 은공 원년에서 애공 14년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인 것이며, ‘전국(戰國)’은 칠웅<(七雄:진(秦)ㆍ초(楚)ㆍ제(齊)ㆍ위(魏)ㆍ조(趙)ㆍ한(韓)ㆍ연(燕)>의 활거시대를 말한다.
오패 칠웅의 춘추전국시대, 천자(天子)는 천자대로 권능을 잃었고, 제후는 제후대로 권능을 잃었으며, 이 북새통에 예의와
제도가 파괴되고 백성들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다.
공자는 이러한 무도한 시대에 태어나서, 주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과 주공(周公)의 문화를 계승코자 하는
유가(儒家)를 이룩하였다.
노소공이 임금자리에 있을 때부터 노나라는 세 조각이 나 있었다.
이른바 삼환(三桓)이라 일컷는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 이들 삼가(三家)가 노나라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가 이 지경이니 노소공에게는 직속 신하가 없었다. 오히려 신하들이 더 큰 세력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임금은 그야말로 유명무실이었다.
계손씨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 비읍(費邑)이며,
맹손씨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성읍(成邑)이고
숙손씨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후읍(郈邑)이었다.
노나라 도읍은 곡부성(曲阜城)이었는데, 위 세 성의 규모는 곡부성과 비슷했다.
공중니(孔仲尼)의 이름은 구(邱)다. 즉 세계 사대성인(四大聖人)의 한 분인 공자(孔子)다.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다. 노나라 추읍(鄒邑) 땅 대부로 있었다.
지난날 핍양성(偪陽城) 전투 때 혼자서 내려오는 현문(懸門)을 떠받치고 섰던 용사(勇士)였다.
숙량흘은 원래 노나라 시씨(施氏)집 여자에게 장가들어 딸만 여섯을 두고 아들하나가 있었는데, 백치(白痴)였다.
다리 병을 앓아 병신이 됐다.
숙량흘은 장가를 들기 우하여 안씨 집을 찾아갔다. 안씨( 氏)집에는 다섯 딸이 있었다.
안씨는 노인이 다 된 숙량흘에게 딸을 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딸들에게 물어보았다.
가장 어린 막내 딸 징재(徵在)가, “시집 가기 전에는 부모의 말을 딸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고 말했다.
징재의 말이 신통하여 막내딸을 시집보냈다.
부부가 된 숙량흘과 진재는 중니산(仲尼山)에 가서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징재가 중니산으로 올라갈 때였다.
모든 풀과 잎들이 그녀를 향해 꼿꼿이 일어섰다. 내려올 때는 다 아래로 쳐졌다.
그날 밤 꿈에 흑제(黑帝)에게 불려갔다. 흑제는 징재에게 “너는 장차 성자(聖者)를 둘 것이다.
공상(空桑)에서 해산하라.”고 말했다. 징재는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노인 다섯이 뜰에 앉아 있었다.
오성(五星)의 정(精)이라고 말했다. 다섯 노인은 송아지만한 짐승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뿔이 하나, 용 비늘 같은 무늬,
그 짐승이 징재를 향하고 엎드리더니 옥척(玉尺) 하나를 토해 놨다. 그 옥척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수정지자계쇠주이소왕(水精之子繼衰周而素王)<수정의아들은 쇠약한 주나라를 계승하여 지위 없는 왕이 되리라.>
공상은 남산에 있는데, 공두(空竇)란 돌로 된 굴이 있고, 굴속엔 물이 없다고 했다.
아기를 낳으려고 공상에 들어갔을 때, 창용(蒼龍) 두 마리가 좌우를 지켰다. 또 신녀 두 사람이 징재를 목욕을 시켰다.
그리하여 공자를 낳았다. 석문(石門) 속에서 맑은 물이 솟았다. 그 물은 따뜻했다.
갓난아기를 목욕시키고 나자 그 샘물은 즉시 말라버렸다.
오늘날 곡부현(曲阜縣)에서 남쪽으로 30리쯤 가면 속칭 여릉산(女陵山)이란 산이 있다.
그 산에는 공자가 탄생했던 공상(空桑)이란 곳이 지금도 있다.
공자 탄생한지 얼마 안 돼 숙량흘이 죽었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었다.
맹손 무기는 계손 사(斯)에게 말하여 공자(孔子)를 모셔다 종일 이야기하였다.
이때 노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우물을 파다 염소 한 마리를 얻었는데, 무슨 염소인지 공자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개를 얻었다고 하니까, 공자는 염소라고 했다.
맹손 무기의 집에 있을 때, 양호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공자는 미리 알고 공손무기에게 대비시켜 난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공자의 뛰어난 예측력 때문이었다.
노정공은 공자에게 벼슬을 주고, 제나라와의 맹회에 같이 갔다.
노정공과 제경공은 협곡 땅에서 맹회(盟會)를 열었다.
공자는 노정공에게 좌우 사마(司馬)를 데리고 가도록 했으나 노정공은 데리고 가지 않았다.
노정공에게 아무런 방비가 없는 기회를 이용해 노정공을 없애버릴 목적으로 제나라 대부 여미(黎彌)는 노정공과
공자의 목숨을 노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나라 대부 안영(晏嬰)이 대표가 되고, 노나라는 공자가 대표가 되어 각 나라 임금을 모시고 단에 올라가 앉았다.
이때 제나라 군사가 악공으로 위장하여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노정공 옆으로 몰려들자,
공자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른다며 중지를 요청했다. 안영 역시 모르고 있다가 중지를 요청했다.
여미는 궁중 음악을 연주하면서 노나라를 욕보이려했다.
공자는 조용히 칼을 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자고로 임금을 희롱하는 자는 참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청컨대 제나라 사마에게 이 버릇없는 자들을 형벌하도록 분부합시오." 라고 제경공에게 요청했다. 제경공은 흐지부지 하려했다.
공자는 맹회를 한 이상 두 나라 임금이 같은 것이라며, 노나라 장군 신구수와 악기를 불러 제나라 악공 대표
두 명을 한 칼에 쳐 죽였다. 또한 제나라의 사과를 요구하며, 제나라가 차지한 노나라 땅의 반환도 요구했다.
공자의 단호함을 보고, 제나라는 노나라 땅 세 곳을 다시 돌려주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司寇:법무부 장관)가 되었다.
공자는 소정묘가 간신임을 알고 사구라는 직위를 이용 무사를 시켜 소정묘의 목을 끊었다.
이는 공자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올린 것이다.
공자의 도덕정치가 노나라를 강성하게 하자 제 경공은 미녀들을 훈련시켜 노나라에 보낸다.
노정공과 계손사는 미녀들에 미쳐 정사를 돌보지 않고, 제사 음식도 나눠주지 않았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고 노나라를 떠났다. 제자 자로와 염유(冉有)도 벼슬을 버리고 공자를 따랐다.
노나라는 다시 쇠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나라 여미(黎彌)의 계책이었다.
주유천하(周遊天下)
공자는 위(衛)나라로 갔다. 그러나 위나라에서는 공자를 써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宋)나라로 가든 중 송나라 광읍(匡邑) 땅을 지나게 됐다.
광읍 땅 백성들은 제나라에서 온 ‘양호(陽虎)'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공자를 양호로 잘못 보고 공자를 죽이려 했다.
공자의 위급함을 알고 위나라 사신이 와서 모셔가는 것을 보고 오해가 풀렸다.
공자는 진(晋)나라에서→위(衛)나라로→진(陳)나라에서→위(衛)나라로 주유천하를 하고 다녔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갈 때, 진나라와 채나라는 광야에서 공자를 포위했다.
초나라로 가서 초를 강성하게 만들 수 있기에 미리 죽여 버리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3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굶었다. 오늘날 개봉부 진주(開封府 陳州)지방에 상락(桑落)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 한 대(臺)가 있으니 세상에선 그 대를 액대(厄臺)라고 한다. 즉, 그 당시에 공자가 진,
채 두 나라 군사에게 포위당한 채 양식이 없어 3일 동안 굶으며 노래를 불렀다는 곳이다.
노나라는 공자가 떠난 후 더욱 혼란했고, 진, 초, 제나라 등도 모두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남쪽에서 吳나라 만이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제나라 또한 제경공 때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꽃잎들이 티끌로 변하는 걸 모르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노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예였으나, 나라가 기울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가야 땅 옛 성터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가면 둘래가 사십여 보쯤 되는 무덤 비슷한 토대가 있다.
세상에선 그것을 획린퇴(獲麟堆)라 한다. 즉 공자가 기린을 묻은 곳이란 뜻이다.
이때부터 공자는 노나라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즉, 노은공 원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이 기린을 잡은 그해까지
무릇 242년간의 일을 기록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춘추란 책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위장공의 수하 석걸과 맹념에게 죽음을 당했다.
위출공은 위장공의 아들이다.
부자간에 왕위쟁탈전을 벌려 아들을 물리친 위장공은 아들 위출공의 편에 섰던 자로의 살을 젓으로 담아 공자에게 보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로의 살을 잘 묻어주라고 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 후 공자는 병이 나서 앓다가 드디어 회복하지 못하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니구산(尼邱山)에 성인이 탄생하여 노나라 권리(闕里) 땅에 살면서 협곡(夾谷) 땅에서 이를 실천하였다.
제자들은 북부(北阜)의 곡(曲) 땅에다 장사지냈다. 무덤의 크기가 일경(一頃)이나 된다.
일경이 얼마나 넓은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후 공자의 무덤 근방에 있는 나무엔 날짐승들도 집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역대로 나라에선 공자를
'大成至聖文宣王'으로 봉했다.
그러다가 이젠
'大成至聖先師'라고도 한다.
만천하 어느 곳을 가도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가 서 있다.
그러나 공자님의 자손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공자님 이름은 만천하에 드높건만, 묘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참으로 세월 따라 흐르는 세상인심은 무상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공림(孔林)을 끝으로 과거로 떠났던 시간여행은 현재로 돌아왔다.
3시간 30분 동안의 도보 답사는 피로를 몰고 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점심을 들었다.
다행이 나는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잠간의 쉬는 시간도 없이 차에 올라 제남(濟南)으로 가는 엉덩이관광을 시작했다.
약 2시간의 버스를 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이드는 두 시간은 잠깐이란다. 그만큼 중국은 땅덩이가 넓다는 과시다.
산과 들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산동성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중국의 자연을 만끽하는 우리를 질투하는 비가 내린다. 그러나 비오는 자연도 일품이다.
제남시의 북동쪽 황하강 유역에는 화북평야(華北平野)가 있고, 남동쪽에 노중산야(魯中山野)의 태산이 있는 시,
고층건물도 많고 건설 중인 건물도 많다. 과연 산동성의 수도다운 면모를 갖춘 시라 생각되었다.
차창밖으로 자전거 보관소에 보관된 끝이 안 보이도록 늘어선 자전거가 장관이다.
제남은 집집마다 천수(泉水)가 난다. 그래서 천성(泉城)이라고도 부른다.
산동성 박물관(山東省 博物館)
놀라웠다. 우선 그 크기에 놀랐고, 그 화려함에 놀랐으며, 엄청난 양의 수장품에 놀랐다.
1954년 8월에 건설된 산동박물관은 중국 제 일급의 종합박물관이며, 이곳에는 자연표본과 각종 문물들이 수장되어 있는데,
표본만 21만 건이며, 그 중 국보급 보물이 3건, 일급 수장품이 1388건, 서적이 12만권 등이다.
수장품의 양으로 볼 때 중국 전체에서 7위고, 일급 수장품의 양은 전국에서 4위란다.
4-5십만 년 전의 원시시대의 뼈와 치아석도 있고, 신석기 시대의 용산문화의 채석기와 백기, 또 5천년의 역사를 지닌 갑골문자와
상대, 서주(西周) 등 고대국가의 문물과 중국 십대 고서 손자병법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만년 팔천년.....3천년, 1500년것은 시시할 정도다.
어떻게 저런 보물들이 그 오랜 세월 보존되었을까!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산동성 박물관에서 치우천황(蚩尤天王)을 뵈었다.
치우천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단고기(桓檀古記)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환단고기:강수원 번역. 온누리. 1985년 발행)
환단고기는 9,000년 한민족사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그 역대 왕계표(王系票)인 환국(桓國) 환인계표에 의하면
1.안파견(安巴堅):BC7198년 이래 7대를 거쳐
2.배달국 환웅(桓雄) 계표, 1대 거발한(居發桓), BC3301-BC3898이래 14대 천왕 자오지(慈烏支)(4491-BC2707)가
바로 치우천왕(蚩尤天王)인 것이다.
치우천왕은 중국의 황제 헌원과의 10년의 73회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헌원을 복속시킴으로서 중원 최고의 전쟁신으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천왕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삼황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언급하지 않았으면서, “오제시대(五帝時代)를 연 황제로, 황제(黃帝)는
유웅국 임금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고.....헌원이 성인이 될 무렵, 신농씨 자손들이 덕이 쇠퇴하여 제후들 사이에 서로 싸움이 벌어져,
백성들의 어려움 또한 컸으나, 신농씨는 그들을 평정할만한 능력을 이미 상실한 후였다.
이를 본 헌원이 전투기술을 익혀 저항하는 제후들을 모두 토벌하였다.
이후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하게 되었는데, 다만 치우만이 끝까지 저항하였다.
드디어 헌원과 치우는 ‘탁록의 전투’에서 맞대결하게 되었고, 이 싸움에서 헌원은 치우를 잡아 죽였다.
이에 제후들 모두가 헌원씨를 천자로 삼았으며, 그가 곧 황제다.”라고 언급했지만, 치우천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치우천왕이 그들의 조상이라 한다면 사기에도 언급을 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다.
황제 헌원이 치우천왕에게 73회나 패했다는 말은 한 마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계표는 헌원이 죽고 제전욱이 황제가 되고, 전욱의 뒤를 이은 제곡(帝嚳)이 되고, 그 뒤를 지(摯)가 되고,
그 뒤가, 우리가 평화로운 시대를 요순세계라 이야기 하는 요(堯), 그 뒤가 순(舜)임금......이다.
이때까지는 나라의 형태는 아니었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이양하여 우임금의 하(夏)나라부터 비로소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배달국 환웅(桓雄)은 18대 거불단(居佛檀)에 가서
3.단군조선으로 넘어오게 된다.(4865-BC2333)
단군조선은 47대 고열가(高列加)가 조선을 폐관하고 신선이 되니, 고열국에 선조를 둔 해모수가 북부여,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한다.
<환단고기를 번역한 강수원 선생은 1916년 고창출생. 고창고등보통학교 졸업. 동경 전수대학교 졸업.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시모노세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복역,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귀국,
이리 남성고등학교에서 국사교사로 재직, 원폭피해자 협회장 역임>
이렇듯 자오지, 즉 치우천왕은 곧 우리 동이족(東夷族), 즉 조선의 임금임이 분명한데,
제남 박물관에서 중국의 조상으로 계시니, 참으로 허탈한 심정 어디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심정 알기라도 하듯 밖으로 나오니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산동성 박물관에서 유방으로 이동한다. 2시간 30분이 걸린다.
유방의 부화호텔은 우리가 중국에 와서 첫날밤을 지낸 바로 그 호텔이다.
적산 법화원(赤山 法華院)
유방 부화호텔에서 이번 교육기간으로서는 마지막 밤을 새우고 귀국길에 들리는 코스인 ‘적산법화원’으로 출발하였다.
무려 4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먼 길이다.
당대(唐代) 최대 규모의 불교사원 중 하나로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청해진을 새우고 해상교통로를 장악한
장보고가 법회를 열었던 ‘적산법화원’을 간다는 설렘과 그 곳만 보고 나면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는 즐거움에 약간은 달뜬 기분이다.
적산법화원으로 가는 종착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거대한 형상의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바라보며 걸어서 올라간다.
엄청난 크기의 중국 도가신(道家神)이 법화원을 왜소하게 하는 것 같다.
적산명신에 가려 아직 보이지 않는 법화원. 적산명신을 보고 나서야 법화원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적산명신이 앉아있는 건물 내부에는 알지 못할 수많은 신들이 앉아있거나 서있다.
명신 앞에 서서 사방 경치를 둘러본다. 망망한 서해바다, 거룻배들은 그냥 떠있는 듯 해무 속에 아련하다.
건물 안에 적산명신은 뒷벽에 ‘제세택생(濟世澤生)이라 써있고, 써진 그 아래 부처님 형상으로 앉아계셨다.
좌우협시 신장 조각, 2층에도 대칭적으로 신장을 모셔놓았다. 무슨 의미일까?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2층 벽의 조각 벽화도 도가와 선가의 신들을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천불상 만불상 같은 상들은 부처님이나 나한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적산명신과 관련한 신선들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건물 2층 뒷면에 가서야 멀리 적산법화원이 보인다.
태양을 상징한다는 적산명신, 그 형상이 어디의 누구를 비출 것인가.
드디어 장보고전기관(張保皐傳記館)에 당도하였다. 장보고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삼국 중 가장 늦게 이곳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통일 신라인으로 치외법권 적인 특권을 누리며
독립된 방(防)과 촌(村)을 이루고 중국 동부해상권과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나 이원좌 등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당나라 때 건축된 적산법화원은 불교 탄압과 도교 부흥으로 많이 훼손된 것을, 1988년에 새로 건축하였다.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합 불교적 특징이랄 수 있는 대웅보전, 관음전, 지장전, 삼불보전 등의 불ㆍ보살ㆍ나한 등을 모셨다.
해상 왕 장보고, 그는 해운업의 번성을 기원하면서 법화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온 승려가 천태종파에 속했기 때문에 ‘묘법연화경’ 즉, ‘법화경’을 주 경전으로 하는 ‘적산법화원’을 세운 것이다.
일본 고승 원인법사(圓仁法師:794-864) 일행이 이곳 법화원에서 2년 9개월 머문 사실이 있는데,
그는 머무르면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온다.
또, 당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장보고의 다른 이름은 궁복(弓福), 궁파(弓巴)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대의 중간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군직을 그만 두고, 신라의 관직에도 없는 청해진 대사가 되어 황해의 해적들을 소탕하였다.
신라의 왕권 싸움에서 죽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희강왕이 자결하자 김명이 민애왕이 되고, 김우징은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이 사건이 신라 최초의 군사쿠데타인 셈이다.
신무왕이 6개월 만에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에게 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그러나 신무왕도 문성왕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장보고는 크게 분노하였다.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운 조정에서는 ‘염장’을 보내어 술에 취한 장보고를 찔러 죽인다.
신라와 중국, 일본까지도 해상권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으니,
오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한 인간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티끌만 같지 못한 것 아니던가!
이제 남의 나라 땅 남의 나라 사람들의 가람인 ‘적산법화원’, 그 혼백이야 산과 바다에 떠돌까 만은 장보고와 함께
그 흔적만 남아 내려오는 우리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석도 항에 도착하였다. 날씨도 맑고 시간도 많이 남는다.
여행이 아닌 교육이기에 쇼핑 한번 가지 못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집사람이 노래한 ‘검은 깨’를 석도 항에서 내 깐에는 비싸게 샀다.
태산에서 산, 돌 2개와 검은 깨까지, 가방이 상당히 무겁다.
다시 12시간의 뱃길, 잠을 청해본다
흔들리는 요람처럼 배가 흔들린다.
갑판에 나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았다. 8월14일 04시 43경이다. 아마 공해상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맑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하현달도 밝다. 어렸을 때 본 그런 하늘이다.
아, 행운이다. 달이 품고 있는 별, 내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난간에 기대어 사색하는
어느 나라 국기 같은 달과 별, 하늘에서 고요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팔베개를 하고 반쯤 누어 사색하는 여인의 배 부분에 유독 밝은 별 하나,
품에 안길 듯, 수많은 별들과 별들의 밭에 또 은가루 같은 별을 뿌리는 하늘, 참으로 아름답다.
달빛과 별빛은 바다에 은빛 길을 내놓고, 그 길은 우리를 따라온다.
바다의 은빛 물결과 별과 하늘은 내 생에 바다에서 보는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리라.
이렇게 아름다운 달과 별의 하늘을 황해의 공해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간, 참으로 행운이다.
이번 교육의 대 말미를 의미 있게 마무리해주는 해수관음보살님이 연꽃을 들고 은빛 물결 위에서 별을 품은 달의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은 집에 돌아와서 TV를 보니 ‘달이 금성을 가리는 희귀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가린 현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달의 품에 안기려는 순간의 달과 금성을 본 것이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서적
-2012. 전라북도 문화관광해설사 보수교육 3차(해외현장 교육자료)
글쓴이: 송화섭 전주대학교 교수.
황금희 목포대학교 교수
-사마천의 사기. 김진연 옮김. 도서출판사
-열국지. 김구용(金丘庸) 著 어문각
-2010. 전라북도문화관광해설사 2차 보수교육 현장학습 자료 중
관음의 바닷길과 한반도 서남해안의 관음상.
글쓴이: 송화섭 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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