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코로나19 시대를 지내면서 한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책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바탕 큰 환난과 혼란을 겪으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바탕 큰 환난과 혼란을 겪었다. 며칠 안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스승 예수는 큰 수치를 겪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제자들은 스승을 배신하고 뿔뿔이 흩어졌었다. 예수께서 느끼신 수치심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고, 제자들이 느낀 자괴감 역시 극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큰 고비가 넘어가자 제자들은 몽둥이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시간을 3일 보내야 했다. 남자 제자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주저 앉아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 제자들은 기운을 차리고 예수의 시신이 누여져 있는 무덤으로 시신에 방부제를 바르러 갔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자들은 거기서 한 사람을 보았고 그는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남자 제자들에게로 뛰어 가서 일어난 이야기를 말했다. 그제서야 남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들의 무기력한 배신 앞에서 멘탈붕괴의 경지에 빠져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보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우리가 헤어지면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마태복음 26장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갈릴리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셔서 주로 갈릴리에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다.
한국전쟁 통에 피난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혹시라도 떨어져 서로 못 찾게 되면 다들 잊지 못하는 한 장소를 말하면서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고 한다. 부산 영도 다리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가 만약 헤어지더라도 꼭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사복음서에 모두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갈릴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지 지역의 이름인가?
예수님은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기다리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갔을 때 예수님이 마중나와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갈릴리에 예수님이 없는 것을 보고 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배를 타고 나갔었다.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갈릴리 땅의 역사
솔로몬은 두로의 히람 왕이 백향목을 준 대가로 갈릴리 지역에 속하는 20개 성읍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히람 왕은 이 선물을 좋지 않게 여겨 "카불의 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뜻은 쓸모없는 땅이라는 것이다.
[왕상]9:10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이십 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왕상]9:11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제공하였음이라
[왕상]9:12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왕상]9:13 이르기를 내 형제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한가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있느니라
사실 갈릴리 땅은 쓸모없는 땅은 아니었다. 강수량도 많고 농사도 잘 되는 땅이었다. 문제는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1. 이스라엘 나라 역사를 보면 항상 고난은 북쪽에서 왔다.
북쪽에서 쳐들어온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그 후 다시 북쪽에서 쳐들어온 바벨론이 남 유다를 멸망시켰다. 북쪽에는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시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북쪽 나라와의 전쟁의 역사이다. 갈릴리는 그들이 쳐들어오는 장소였고, 전쟁의 장소였다. 그래서 갈릴리 지역은 고난의 땅이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군대와 사탄의 군대와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갈릴리에 있는 아마겟돈(므깃도)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16: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2.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섞여 사는 곳이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의 땅 취급을 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안 좋은 말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 땅을 자기들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고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다.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는 갈릴리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다.
(사9:1절)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 갈릴리 지역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부자들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인들의 상업 도시들과 연계해서 큰 돈을 벌고 있었다. 농업을 하며 순박하게 살고 있었던 본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예수님의 목회 타겟은 부자들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 받는 사람들이었다.
4. 갈릴리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비하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인기가 높아가고 훌륭한 능력을 보이시자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 말하길 "이런 갈릴리에서 그러지 말고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명성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했다. 갈릴리에서 아무리 유명하게 되었어도 예루살렘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7장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갈릴리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묻히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가르치는 것은 출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친구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이렇게 말햇다. "우리 갈릴리 같은 곳에서 무슨 대단한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느냐?"
요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5. 갈릴리 지역은 데모나 민란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갈릴리는 우리 나라의 광주와 같은 곳이다. 그들은 항상 권력에 저항했다.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은 촌뜨기라는 말도 되지만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의미하기도 했다.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 총독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갈릴리 사람 몇 명을 무참히 죽였는데,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저 갈릴리에서 왔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예전에는 전라도에 산다고 하면 다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그저 현 거주지가 전라도라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남한에서 전라도는 다 빨갱이라고 했다.
6. 갈릴리 사람들은 멸시 받았다.
요한복음 7장
14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같은 곳에서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구원자가 나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요한복음 7장
41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한복음 7장
50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큰 도시 예루살렘 권력자들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 있음을 알리지 않으셨을까? 나 같았으면 나를 그렇게 모욕 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가르쳐 주고 혼꾸멍을 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지 않으시고 멸시 받는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마28:16, 17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했다.
예수님이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갈릴리에서 가르치시며 교회를 세우실 때 찾아다니신 곳은 부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들, 죽은 자들, 슬픈 자들, 귀신 들린 자들, 소외받는 자들, 멸시받는 자들, 굶주린 자들, 천대 받는 여자들, 무시당하는 아이들이었다. 약한 그들을 찾아다니시면서 그들의 약한 것을 고쳐주시고 희망의 말씀을 해 주셨다. 예수님이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리셨다는 기록도 있다.
(적용)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서 기다릴 테니 너희도 그리로 속히 오라."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날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만약 교회가 억눌린 자, 소외된 자, 멸시 받는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 건강한 자, 권력 있는 자, 여유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예수님은 거기 안계실 것이다.
또한 만약 교회가 성공 주의에 물들어서 약한 자들의 주머니까지 털어서 부를 축적한다면 거기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4월4일 부활절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기념 예배와 미사가 열린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전 같으면 사람과 돈이 몰렸을 예배당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질문한다.
AD 251년 말, 치사율 50퍼센트가 넘는 엄청난 전염병이 유행했다. 그들은 숨어 있던 무덤을박차고 나와서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가족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았고, 거리에는 처리되지 않는 시체들로 악취가 났다. 이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픈 자들을 돌보며, 같이 죽어갔고,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마다 쌓인 시체들을 처리해 주었다. 환자들을 돌보다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죽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인들은 “ 파라블로노이(위험을 무릎쓰는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전염병이 종식될 즈음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예수님이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곳은 돈이 모이고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신 곳은 도움의 손길, 위로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한 맺힌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거기서 먼저 가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