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릇의 파편들이 하나로 접합되기 위해서는, 그 파편들이 서로 같을 필요는 없을지라도, 가장 미세한 부분에서 서로서로 달라붙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번역은, 그 자체를 원본의 의미에 같게 하기보다는 원본의 의미의 방식에 스스로 조화되도록 밀접하고 미세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파편들이 한 그릇의 부서진 부분들인 것처럼, 원본과 번역은 둘 다 보다 큰 언어적 단위의 부서진 파편들로 인식되어야 한다.” 《번역가의 작업》 중
큰 언어적 단위라는 것은 원본과 번역이 공유하는 의미의 영역, 즉 상호규율성을 뜻하며 원본과 번역은 그 언어적 단위를 공유하지만 각각은 서로 같지 않은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질적인 국민적 문화를 공유하면서 이질적인 문화들을 이루는 서로 같지 않은 파편, 즉 번역이 불가능한 파편들로 구성된다. 한 국가 내에서 이질적인 이주민의 문화로 동일한 국가적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질적 문화의 단편들 자체를 같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 이질적 문화의 단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국가적 의미의 그릇을 만들도록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먼 옛날 ‘그들이’ 품은 한반도 한국 속 세계인들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0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총 체류 외국인은 106만6291명으로 2006년 91만149명보다 17.2%나 증가한 수치를 보인다. 체류 목적을 살펴보면 산업연수생을 포함한 외국인 근로자는 47.1%, 결혼이민자는 10.4%, 어학연수생을 포함한 유학생은 5.7%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수는 늘어가고 있다. 순수 혈통의 단일민족 국가인 대한민국이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다. ‘멜팅팟(Melting pot; 온갖 재료를 넣고 끓이는 커다란 항아리)’이라 비유되는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찾은 그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한국은 지금의 모습이 아닐 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땅에 맨 처음 발을 딛은 서양인은 누굴까. 2006년 경남 통영시에는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란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1604년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 일행이 이곳에 표착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다.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멘데스 일행은 배의 침몰로 통영 해안에 표류하다 조선 수군에 생포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기록이 있다.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빙리이라는 사람인데, 곧바로 중국으로 압송되어 인적 사항은 남아있지 않다. 이후 포르투갈 출신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가 1594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 종군 신부 자격으로 조선에 건너왔다. 1년 동안 전쟁 고아들을 돌보다 돌아갔는데 그가 두 번째 서양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 최강국에 속했다. 천문, 지리, 해운, 군수 등에서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발달되어 있었고, 잠시라도 우리 땅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과학자나 고급 기술자들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들에게 아무런 지식 정보를 습득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절실히 느꼈을 텐데도 새 문물 도입을 통한 국력 신장에 힘 쏟은 흔적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실리’나 ‘실용’보다는 명문에 치우친 ‘주자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연찮게 잠시 다녀간 사람들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우리 땅에 외국인들이 들어온 것은 19세기이다. 문명화의 사명을 안고 이 땅을 찾은 푸른 눈의 서양 선교사들이 그 시작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문명화의 사명’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도덕적 의무감 이상의 수준이 되었고, 성서적인 의미로까지 미화되는 사회 현상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는 어찌 보면 문명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가 어찌됐든, 이방인의 모습으로 들어와 한국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근대화의 물꼬를 트게 한 주역들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마워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19세기 중반은 조선이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기 직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패배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조선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외국인들에게 더욱 철저히 폐쇄정책을 펴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836년 프랑스인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와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그 최초자가 바로 피에르 모방 신부다. 한국명은 ‘나백다록’으로 비밀리에 잠입해 살기 시작했다. 로마교황청에서 조선 천주교회 관할 임무를 받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천주교 선교사들이다.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선교사는 다블뤼 주교인데, 그는 19세기 중반의 조선 사회를 정치, 사고방식, 관습, 사회 생활, 종교 등의 관점에서 기술해놓았다. 15년간의 생활을 고스란히 적어 자신의 눈으로 본 조선을 묘사해 프랑스 본국으로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꽤 객관적으로 담아놓고 있다. 유럽인 신부가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는 것이 일생의 사명이지만 당시 우리가 유럽과 교류하는 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조선 사회가 단순한 야만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설득력 있는 사회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外人 개항 이후 19세기 말부터는 ‘개화’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1880년 개신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땅에서 활약하면서부터 문명국에 눈뜨기 시작했다. 1884년 호레이스 알렌은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입국했다. 그가 도착한지 몇 달 안되어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이때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의료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역량을 넓히게 된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고, 병원 설립을 건의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이 때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술과 선교를 공식적으로는 포기하고 주한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외교 활동을 시작한다. 1892년에 《코리언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를 발간하고, 1900년에는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 지부를 결성했다. 정치, 문화, 종교, 상업,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22년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04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조선관계 저술과 인술로 여생을 보내며 타계했다. 알렌은 자신의 저서 《조선견문기》를 통해 자신이 살았던 조선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힌다. “가엾은 조선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있다. 그들은 다만 지금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그들을 버렸다. 미국은 조선의 국왕과 평화와 우호를 위해 노력한다는 조약을 저버리고 일본이 한국의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월권을 갖도록 허락된 것에 대해 조선의 슬픈 모습을 본다. 나는 조선 사람들에 대해 진정한 동정심을 충분히 피력했다. 교훈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길 바란다.” 알렌이 조선에 산지 일년 뒤에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뒤이어 온다. 아펜젤러는 곧 떠나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함께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교사로 일하며 폭넓은 선교 활동을 한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언더우드는 한국어의 대가이기도 했다. 1889년에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간행했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성서번역에 재능을 발휘했다. 또 <그리스도 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해 새로운 지식과 영혼의 양식을 제공해주었다. 지금 현대 교회들이 부르고 있는 찬송가 역시 낱장 짜리로 돌아다니던 악보들을 번역하고 엮어 만든 사람이 언더우드이다. 또 국제 YMCA를 이끌며 한국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기서 연세대학의 기틀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는데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밖에도 항일 언론 투사 베델, 고아들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 숭실대학 창설자 베어드, 병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헤론 등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문명의 혜택, 근대화를 경험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목숨을 다해 열정을 불태웠고, 한국 땅에 묻힐 만큼 사랑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듯하다. 실제 개항기 조선에 들어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한국을 근대화로 이끈 주역이다. 제중원을 비롯,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이나 배재학당 등이 모두 미국인 선교사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낙후된 조선 사회에 근대문명의 빛을 가져다 주었다.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면서 시작된 미국의 해외 선교 붐은 근대 서구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화적 우월감이 내제된 ‘문명화’의 사명감이 컸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다. 문명의 발달은 가치의 차이를 인식시켜주는 시야 확보를 가능하게 만든다. 서로의 다름을 인식하고, 낯선 상대를 특별하거나, 기묘한 것, 비정상적인 것, 괴물스러움 등으로 각인시키면서 특징지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 여행자들은 벌거벗은 남녀들, 잔인한 식인종, 이상한 잡종 동물 등을 여행 중 발견했다. 그러나 여행자나 야만인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우리 역시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낯선 타자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일본인도 있다.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죽은 후세 다쓰지. 여기서 말하는 민중은 철저히 한국인을 말한다. 그는 민중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투쟁한 지식인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한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기독교도는 아니었지만 한국인의 입장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권리가 전혀 없는 상태였던 재일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 민중을 해방시킨 인물로 평가 받는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 신들러’라는 별칭이 따라붙을 만큼 조선 해방의 은인이다. 낯선 자, 이방인이라 칭함 받는 그들이 우리 사회에 발전을 가져다 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낯선 타자들을 문명화 시키겠다는 가치의 지배를 받아 그들의 시대 정신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오늘을 이끄는 외국인 CEO들 ‘규제 백화점’이라 일컬을 만큼 척박하고 열악한 대한민국 기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외국인 CEO들이 있다. 그래서 이를 두고 한국은 외국인 CEO들의 영전 코스라고도 하지 않는가. P&G그룹의 앨 라즈와니 한국 지사장이나, 영국계 담배 회사인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 코리아의 존 테일러 사장 등은 한국에서의 뛰어난 실적을 인정받아 더 큰 세계로 가는 영광스런 책임이 더해졌다. 2004년부터 로레알코리아 사장을 맡고 있는 클라우스 파스벤더는 지난 10년간 초고속 성장을 했다. 독일 출신의 파스벤더 사장은 인재 양성과 직원 복지에 힘쓰는 기업으로 ‘가장 일하고 싶은 외국계 기업’ 부문에서 순위를 높여가고 있다. 또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아동, 청소년의 소규모 공동 생활 가정인 그룹홈을 3년간 지원,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을 통해 국내 여성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데 힘을 써왔다. 그리고 이런 공로는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수여로 이어졌다. 그는 그 동안의 성공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박차를 가할 참이다. 낯선 그들이 낯선 땅에서 그것도 CEO라는 기업의 수장으로서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크다. 한국형 CEO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글로벌 기업을 이미 경험한 그들에게서 듣는 생생한 기업문화와 올바른 지식경영과 및 취업 노하우 등은 한국의 부족한 기업 문화를 발달시킬 것이다. 외국인 CEO의 시초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암참(AMCHAM) 발족이다. 수십명의 미국인 CEO들이 한국에서 근무했지만 한국 경제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외국인 CEO들은 한국경제의 대외 홍보대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대 국제지역대학원 이근 교수는 매체를 통해 “외국 기업과 외국인 CEO의 인식이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긍정적으로 바뀐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라며, 앞으로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 전망한다. 《한국의 외국인 CEO》에서 제시한 성공한 외국인 CEO의 공통점 6가지를 보면 이렇다. 첫째, 부동의 리더십 철학이 있다. 그들은 기업을 이끄는 원칙을 항상 기억하고 있으며 언제 어느 때 누가 물어봐도 당황하지 않고, 그러한 철학에 동화시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겸손한 자세로 자신이 속한 사회에 봉사를 한다. 2000년부터 한국 생활을 하고 있는 에릭 닐슨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전 사장은 웬만한 서류는 직접 복사하고, 직원용 정수기 물통도 손수 갈아 끼우며,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을 후원하고 있다. 또 웨인 첨리 다임러크라이슬러코리아 사장과 제프리 존스 전 미 상공회의소 회장은 때때로 모여 김치 만들기에도 도전할만큼 한국의 맛과 멋에 흠뻑 빠져 있다. 또 아리나 전 페덱스코리아 사장은 한국 근무 중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매달 직원들을 위해 직접 팬케이크를 만들어 아침이나 점심 시간에 나누어 먹는 등 임원과 평사원 간 벽을 허무는 노력들을 체면 차리지 않고 실시한다. 원칙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는 리더의 모습에 직원들 마음도 하나로 묶이는 데 용이해진다. 또 전 한국P&G 라즈와니 사장의 경우 어린이 소아암 환자 돕기, 임직원 헌혈, 고아원과 양로원 돕기, 자선 음악회 후원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다. 개인적으로 헌혈 횟수는 모두 30차례나 된다고. 개인의 존엄성,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그들이다 보니 사회적 책임에 관한 실천력이 국내 CEO들보다 뛰어난 게 사실이다. 셋째, 페어플레이 정신을 지키는 스포츠광이라는 것이다. 초·중·고교 혹은 대학 시절에 운동선수로서 활약한 경험이 대부분 빠짐없이 들어있다. 비즈니스의 치열한 세계를 이미 스포츠세계에서 경험해봄으로써, 공정성에 대한 의식이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넷째, 현지화에 목숨을 건다는 특징을 갖는다. 헤어 케어 전문 업체인 웰라코리아의 데틀레프 놀덴 사장은 아예 ‘노태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새긴 명함을 갖고 다닌다. 독일 루르대 재학 시절 한국학과 동아시아 경제학을 전공한 게 한국과의 인연의 시작이라고. 17년 이상 한국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한국어 실력에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된다. 그는 거래처 고객이나 종업원의 고충이나 불만 사항을 더 빨리 알아듣기 때문에, 시정 및 보완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훨씬 단축된다. 직원들이 상을 당하면 지방까지 찾아가 밤늦도록 소주 잔을 기울이는 CEO가 있는가 하면 농민들과 산지 직송으로 직접 계약해 우리 농촌 살리기에 앞장서는 CEO도 있다. 놀 생각은 글로벌하게, 행동은 현지에 맞춰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현장경영과 선진 마케팅을 통한 차별화이다. 단점을 보완할 강력한 무기를 찾는 데 열심이다. 합리성과 과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해 정교한 맞춤식 마케팅과 발로 뛰는 현장경영이 이들을 잘나가는 CEO로 만드는 데 기본 요소가 된다. 페덱스코리아의 데이비드 카든 사장은 부산, 대구, 대전 등 13개 지점을 매달 한 군데 이상 번갈아가며 방문해서 직접 직원들의 현장 목소리를 듣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 지방 지사 방문 시 고위 간부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현장 직원과의 면 대 면 직접 미팅을 즐긴다. 분명 다르다. 형식보다는 실제를 중시하는 그들에게 CEO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또다른 분야 중 하나다. 원칙을 중시하며, 권위는 존중하되, 권위주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법을 모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땅에서 그들이 우리 문화를 주도, 아니 박차고 나아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맞는, ‘한국형’으로 재탄생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월간 <리더피아>는 다음장에서 한국 속 세계인들이 한국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뿌리내리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회와 희망을 찾아서, 둘째, 나눔과 봉사를 실현하기 위해서, 셋째, 한국을 사랑해서 등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지정해 한국 속 세계인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