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연소를 꿈꾸며
림태주<관계의 물리학>을 읽고
2018. 6. 라떼
몇 해전 봄이었다.
림태주 작가가 일행들을 이끌고 통영을 다녀갔다.
그때 우리는 짧았던 이틀 동안 참 많은 것들을 함께 했었다.
욕지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얘기들로 깔깔 거리며 웃었고, 바다 앞에서 탄식하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바다를 느끼기도 했었다.
욕지에 도착해서는 섬에서 생겨난 많은 길들을 걸었고, 바다 낚시로 잡은 물고기로 회를 만들어서 먹고 구워도 먹으며 섬에서의 깊고 푸른 밤을 보냈다.
섬의 밤은 깊고, 깊고 푸르다.
섬이 만들어내는 고요와 적막은 우리를, 세상에 우리가 전부인 것 같은 착각마저 주어 우리는 왠지 모를 공동체 의식이생겨 났다.
그 와중에 고양이 무리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모여 들었다.
그들은 또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난 비밀 결사대가 되어 눈을 빛내며 앉아 우리들의 얘기와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때 펜션 주인이신 어르신이 섹스폰을 들고 나타나셨다.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적막을 깨고 멀리멀리 퍼져 나간 섹스폰 소리는 개 짖는 소리로 되돌아왔다.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도다리 쑥국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다 보니 자꾸 중심을 잃는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 도다리 쑥국으로 욕지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그들은 왔던 길로 다시 떠나갔다.
물론, 우리는 그 후로도 가끔씩, 따로, 함께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책 관계의 물리학에서 도다리 쑥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p 120[그냥 당신이 좋아서]
얼마 전 순창 봄 레스토랑에서 버스킷 공연을 겸한 태주씨의 북콘이 있었다.
그곳에서 식사도중에 불쑥 태주씨가 책장을 펼치며 날더러 읽어 보라고 했다.
난 당연히 겸연쩍어서 손사래를 쳤다.
경상도 사투리로 읽으면 웃긴다고, 창피해서 안읽겠다고 고집 피우는 내게 나를 위해 쓴 글이라며 같이 고집을 피웠다.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손뼉을 쳤고 나는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며 소리 내어 읽었다.
그중에 좋았던 글이다
“사람 사이에 그냥 편해지고 그냥 좋아지는 관계란 없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가 얼마큼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일방적인 한쪽의 돌봄으로 안락과 안전이 유지된다면 결코 좋은 관계가 되기는 어렵다. 봄비와 수선화의 관계처럼 그것이 ‘그냥’이 되려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참음도 필요하고,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씀도 필요하다. 그렇게 가까워지면 확고한줄 알리바이가 생긴다. 서로를 입증해줄 수 있게 된다. 묵비권을 행사해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얽혀있는 공동정범의 관계.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둘 사이가 황금처럼 단단해지면 비로소 ‘그냥’ 이라는 말을, 구구절절 해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말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당신이 좋아서 모든 것이 그냥 다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
쓰다 보니 자랑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이 하고 싶었다.
비단 내 이야기뿐이 아닐 것이다.
관계라는 건 그런 것이다.
그냥 이라는 말이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살면서 정말 많은 관계들이 있었다.
때로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힘든 적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름을 빨리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요즘의 나는 얼른 내려놓는다.
아닌 것에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로 한다.
포기와는 또 다른 맥락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살아내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가게를 시작해보니 또 몰랐던 관계들이 보였다.
서울에서, 멀리서, 해외에서 달려와 주고 힘을 실어 주고 웅원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금전적인 소득을 떠나 행복하고 든든하고 많이 뿌듯했다.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간다‘ 는 작가의 말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나 홀로 우뚝 서기는 힘들다.
많이 부딪치고 의지하면서, 견디며 이겨내야 한다.
돌아보니 그렇게 살아 왔다.
작가는 얘기한다. 오래 견디면 견디고 산다는 걸 잊게 된다고. 기실 즐기는 삶이라는 것도 반드시 무언가는 견뎌내야 한다고. 오늘의 자유든, 내일의 희망이든 모든 것은 무언가를 견딘 자에게 주어진다고.
살아보니 그 말이 맞다. 혼자서 책을 읽다가 끄덕끄덕 고개를 숙였다.
내 생각과 당신의 이해 사이
잘 맺고, 끊고, 적당한 거리를 주는,
이른바 지구적 삶에 나는 아직도 많이 서툴다.
오래전부터 생각해뒀던 나의 묘비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김선우 작가의 ‘화비, 먼후일’ 이란 시에 마지막 구절이다.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뼘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쓰는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갔다
완전한 연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