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 구덩이(2025.2.24)
이웃집서 건 네 준 씨앗으로 심은 무를 11월 말에 뽑았다. 황토 묻은 연초록색의 ‘만선무’ 하나를 골라 부엌칼로 껍질을 벗기고 한 입 깨물었다. 단물이 혀끝에 와닿으며 향이 어릴 때 추억을 불러온다. 무가 간식거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문득 놋쇠 숟가락으로 무를 긁어 드시던 할머님이 생각난다. 그 할머님 연세의 친구 어머님이 치매도 아닌데, 요 며칠 전 요양병원에 가셨다는 소문이 들린다.
찬 바람이 창호지 문 틈새로 스며드는 겨울이 오면, 거둔 무를 집 뒤 켠 마사토 둔덕에다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엉으로 엮은 삼태기 모양의 덮개를 위쪽에 덮고 밑쪽은 볏짚을 깔고 벽쪽에도 볏짚을 둘렀다. 무가 흙에 닿으면 얼어서 썩거나 바람이 들어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해진 구덩이는 제삿날이나 무밥을 해 먹는 특별한 날에만 개봉되었다. 그 무를 보관하던 구덩이는 무가 얼지도 않고, 썩지도 않으면서 월동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냉장고는 구경하기조차 어려웠던 그 시절, 할머님에게 무는 겨울철의 귀한 먹거리였다. 구덩이에서 무를 파는 날이면 할머님은 윗동이 파르스름한 놈을 골라, 흙을 턴 후 씻고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큰 방으로 가져오셨다. 우르르 손자들이 몰려들면 준비해 둔 도마 위에 무를 놓고 부엌칼로 길게 반을 자르셨다. 몽당 숟가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쓱쓱 긁어 드셨다. 사방으로 단물이 튀면 제비새끼 마냥 모두 입을 다시며 할머님 손만 쳐다보았다. 무 생채 냄새는 밀폐된 온돌방 구석구석을 퍼지며, 벽에 걸린 옷이며 땟국이 자르르한 우리들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이가 없으신 할머님이 겨울철에 야채를 드시는 유일한 방법인데, 우리는 할머니처럼 긁어서 먹어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입맛 다시는 손자들에게 자투리로 남은 무를 깎아서 형·아우 순대로 나눠 주셨다.
무를 파기 위해 내가 구덩이 덮개를 잡아 올리면, 아버님은 캄캄한 무 구덩이에 손을 넣어 하나씩 하나씩 더듬어 꺼내셨다. 축축히 젖은 지푸라기 더미 속에서 얼어서 썩고 바람이 들거나, 새순을 내다가 시든 놈들이 아버님의 손에 잡혀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구덩이는 무들이 겨울을 나기에 최적의 공간이 아니라 공동묘지처럼 느껴졌다. 질식할 것 같은 공간에서 겨우 연명을 하고, 그러다 사람의 손에 잡히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니까 말이다. 땅속의 습기와 추위를 견디느라 하얀 몸뚱어리가 더 하얗게 변해버린 무들. 그 구덩이의 무들을 생각하노라면 요즘 요양 시설의 노인들과 진배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겨울 무심코 집 뒤 옛날 무 구덩이 자리를 지난다. 우수수 댓잎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무들의 아우성처럼 들린다. 뭇 동물보다 못한 청각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그들의 신음 소리를 사람들이 듣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마사토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를 지푸라기 한 겹으로 막고, 칠흑의 막장에서 상·하·앞·뒤가 뒤엉킨 채 부여안고 지냈을 무들이 그려진다. 따닥따닥 붙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빛도 볕도 없었다. 마음 놓고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나락(奈落)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면벽 승(僧)처럼 수도사같이 번뇌도 욕망도 잊어야 했으리라. 그들에게도 법식이 있어 부모에게 불효한 일, 부부간 받았던 상처, 자식 걱정, 헤어진 인연 이야기들을 참회하듯 나누었을까. 인생에서 ‘다시’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소한 하소연까지 다 들어보고 싶다. 동사(凍死)의 공포 속에서 밤마다 숨을 죽이며 눈물을 훔쳐야 했던 몸부림까지도.
노후에 취미활동을 같이하고 이야기 벗으로 만나는 어른들의 공동체인 요양시설.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노인을 모시는 이에게 어쩔 수 없는 최적의 공간일 것이다. 자식에게 의무감을 놓아주고 일상의 자유를 부여해 주기로는 이만한 곳이 있을까. 하지만 입원자에게는 마지막 장소나 다름이 없다. 세상사와 결별해야 하는 장소.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장소. 루비콘 강 같은 곳. 아무리 급 높은 시설이라도 가족과 친구와 지인들과 같이 사는 삶보다 행복할까 말이다.
무를 깎아 드시던 할머님은 물질적으로 좀 부족하고 지금보다 비위생적인 환경이었지만, 자연과 가족들에게 싸여 외롭지 않은 삶을 사셨다. 밭에서 배추벌레 잡으며 새순이 자라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며 지낸 시간은, 백 가지 친환경 식품보다 더 좋은 보약을 드시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동네 제사나 잔치 날에 콧물 훔치던 손수건에 싸 오는 시루떡을 기다리는 손자들이 있었고, 언제나 어른을 극진히 모시는 어머님과 아버님도 계셨다.
고종명(考終命)이 넘으면 ‘하늘의 부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이처럼 누구에겐가 자꾸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려는데 왜 이리 걸리는 게 많은지. 요양 시설보다 가족의 품에 안겨 떠났던 선조들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나이다. 요양 시설의 입원자들은 평생의 지위 고하, 자식의 유무, 성별과 빈부도 상관없이 시설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가고 싶고, 먹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온갖 생물학적 욕구들은 그대로 일터인데. 퇴원도 졸업도 없는 그곳. 오늘따라 그곳이 무 구덩이와 다르지 않다는 씁쓸함이 머리를 누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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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려장이 생각나는군요. 못먹고 못살아도 죽을 때까지 가족곁에서 함께 보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대가 변하여 과거에는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로 취급하여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했었는데 이제는 집에서 죽어도 영안실로 이동해야 하는 것으로 변천되었으니 절대도덕이라든지 절대윤리는 없나 봅니다. 어릴 때 초가집 호롱불 아래에서 북풍한설에도 차가운 동치미 국물로 밤을 달랬던 옛 추억이 아련합니다.
나역시 독거생활을 하다보니 많은
것을 사색합니다.
고독사도 있지만 고독은 많은
사색을 하게되어 얻는것도
많습니다.
긍정의 시각에서 고독을 바라봐야
행복해 집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아이구 감사드립니다 ᆢ 좀 더 구체적이고 ᆢ리얼한 느낌을 적고 싶었는데 수필교실에 젊은 분들이 합평(合評) 하면서ᆢ좀 밝고 긍정적으로 내용으로 바꾸기를 요구해서ᆢ7순 넘은 글쓴이가 많이 절제하였습니다.ᆢ 인생은 밝게 살아야 할 것같습니다 ᆢ좋은 의견 잘 참고할게요 ᆢ 고맙습니다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