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울의 승리(保羅의勝利)
로마서 8:31-36
정동교회(貞洞 1929.9.1)
參考聖書
善戰幾盡, 딈後四章七節, 勿遁世卽勝世, 勝世요一,五章五節.
賜我一棘. 고後十二章七節. 勿欲去苦痛願蒙恩惠, 고前四章十一節.
恒喜. 데살前五章十六節, 勿取榮光欲自樂, 萬物의垢. 고前四章十三節.
人皆願勝利者, 則伸己知成其功可也. 若志不伸而功不成, 則謂之失敗也. 自古勝利者有天堂, 失敗者有地獄. 基督萬古勝利者之模範, 捨天國之榮光, 降世爲人僕, 又爲罪人而釘于十字架上, 於何處見其成功之点也. 然今爲萬王之王, 萬有之主而成救贖之事業, 保羅亦學主成功, 不欲以門閥成之, 又不欲以文學成之, 又不以羅馬赤子成之, 乃以謙遜成之, 從主之後有無限苦楚, 經各種危險, 山海之危險, 盜賊之危險, 笞杖之危險 고後十二章二三-二六節, 無不經歷, 而如是危險似失敗無餘, 然此乃爲保羅成功之法也. 捨一切肉身前依者視如糞土, 以十字架爲勝世之具, 自己儼以戰士自處, 엡六章十四,十六節, 常世爲護身之具, 保羅之一生分一節, 又分一節, 節節分之而看則失敗無餘. 然合一生而觀之, 則大勝利大成功, 彼薄志弱行之靑年男女, 何不學此勇健鬪士也? 今日朝鮮之人, 今日卽看桂冠反不幸也. 少年登高科一不幸亦此意也. 今看保羅之成功, 明在本章, 誰能敵我, 誰能訟我, 誰能罪我, 誰能絶我? 四言誰能者卽四言我能也. 保羅之能率如此勝算, 又如此確信不疑, 百折不屈, 此能率之中, 發見數種, 當爲與勿爲也. 先禁勿爲後, 更言當爲也. 一, 勿遁世而欲勝世, 遁世東洋儒家之常習, 一見不合而卽去, 一見不遇而卽遁, 不欲自築舞坮而欲爲人用, 欲爲人器械也. 天地恢恢是我舞坮, 主曰至地極, 故保羅到處遭逼, 無容足之地而然不眠不休, 此處不可則往彼處, 彼處不可則又往他處, 保羅胸中寧爲世人所殺, 不可遁隱, 勇敢奮鬪也. 舟捨水而不能行, 飛機捨空氣而亦不能行也. 余在世亦如此也, 死亡外不能離世, 一食一衣皆世之物而非天上之物也. 人捨衣食而能生乎, 近日有嗜眠病, 此病不痛而死, 遁世者亦如此, 不關世事, 心無苦痛, 如死人無異, 自以爲得生之樂, 而自世人觀之實死人也. 拔一毛利天下不爲, 磨頂放踵利天下爲之. 相去遠矣, 今日卽磨頂放踵之時也. 苟欲達成目的, 不恤人言, 不顧是非, 前進而已, 人毁之而不怒, 人譽之而不喜, 日前美國某大學敎授, 稱譽朝鮮人之進步, 然此不足喜, 䔍羅上古木而作春, 此眞古木之春乎? 甚不足喜也. 保羅不然, 人譽之毁之皆不顧, 我勇進而已, 敵我其誰乎? 故曰我善戰馳盡我跡.딈後四章七節. 二,勿欲去苦痛, 只希聖寵恩賜, 主之恩賜不多於平安時, 特多於苦痛時, 苦痛如賓客, 善待則喜樂, 薄待則悲苦也. 保羅深知此理故, 非但不欲去苦痛也, 反喜苦痛曰主賜我一棘 고後十二章七節. 使我不驕誇云, 我欲誇祖上門閥則有刺戟, 我欲誇文學學位則有刺戟. 我欲誇敎閥則有刺戟. 肉身有欲誇則棘必刺我. 我敎友亦然, 信不篤之時, 自不覺短處, 而有長欲誇有善欲現, 如猶人之囉叭廣告于市街, 主不顧此等者, 無進就故也. 常讚養勢力, 干雲之木生於毫末, 九層之坮起於累土, 毫末及累土有何足誇耀也? 摩西之偉大非由於曠野時也, 已由於母懷及牧羊時也. 三友悅之偉大非由於統領時也, 已由於聖殿內聞主召之時也. 誇耀者失敗之本也, 故吾等之心境如咬菜, 工夫漸熟百事可堪, 又有希望, 誰能訟罪我也? 此世多訟我罪我者, 如基督時, 不阿附當世, 疾之惡之, 或目之以反逆, 或斥之以僭濫, 欲以同族絶斥, 苦痛誰甚於此也? 摩西之民怨之曰, 爾爲我訟官乎? 欲驅之, 摩西之苦痛非在於埃及, 反在於同族, 若忍之則有福也. 保羅深知此理故反喜主賜之棘也. 此勝利之法也. 三,勿取榮光, 只增喜樂. 猶大人以貪榮亡, 希律亦以貪榮亡, 朝華之草夕而零落, 甚矣! 虛榮之亡人國也. 好坐上座, 好飾衣袒之猶人, 不知被擄于羅馬而爲奴僕也. 朝鮮之前日榮貴者, 今日果何如也? 欲求之榮者自言者也. 欲求神之榮者, 言神之事也. 主亦知此理故, 魔言萬國之榮而主却之, 保羅亦知此理故, 視榮光如糞土, 主或棄保羅如萬物之垢고前四章十三節, 而保羅猶不介意, 反曰恒喜데살前五章十六節. 喜者何也? 以保羅之形便, 能有喜樂乎. 在人不堪其苦, 而在保羅反作喜樂也. 反作說曰誰能絶我於基督之愛乎?
참고 성서(參考聖書)
선한 싸움을 거의 마침. (디모데후서 4:7).
세상을 은둔하지 않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요한 1서 5:5).
나에게 주신 가시. (고린도후서 12:7).
고통을 버리려 하지 말고, 은혜 받기를 바라라. (고린도전서 4:11).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
영광을 취하지 말고, 만물의 찌꺼기 됨을 즐기라. (고린도전서 4:13).사람은 모두 승리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펴서 성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뜻을 못 펴고 공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자에게는 천당이 있고 실패한 자에게는 지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고에 승리한 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와 사람의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혔습니다. 주의 성공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유(萬有)의 주가 되어 구속의 사업을 성취하였습니다.
바울도 주님의 성공을 배워 문벌(門閥)로써 성취하려 하지 않았고, 문학으로도 성취하려하지 않았으며, 또 로마 시민권으로도 성취하려 하지 않았고, 겸손으로 성취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주님을 따른 후 무수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각 가지 위험을 경험하였는데, 거기에는 산과 바다의 위험, 도적의 위험, 태장(笞杖)으로 매 맞는 위험 등 (고린도후서 12:23-26)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험은 여지없이 실패한 것 같으나 이는 바로 바울의 성공 법이었습니다.
육신(肉身) 앞에 의지하는 일체의 것을 모두 쓸모없는 분토(糞土)와 같이 버리고,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는 도구로 삼아서 자기는 엄연한 전사(戰士)로 자처하였습니다.(에베소서 6: 14,16). 이것은 호신(護身)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마디마디로 쪼개어 보면 실패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 털어 합쳐 보면 대승리요, 대성공입니다.
박약한 의지와 행동이 연약한 청년 남녀들은 왜 이 같은 용감한 투사를 배우지 않습니까? 오늘날 조선 사람이 월계관을 쓰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것은 도리어 불행이 됩니다. 소년이 고등관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 하나의 불행이라고 하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지금 바울의 성공에 대하여는 로마서 8장에 분명히 게재되어 있습니다. 곧 ‘누가 능히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우리를 고소하리요, 누가 능히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능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리요.’ 하는 것입니다.
여기 네 마디의 ‘누가 능히’라는 말은 곧 ‘우리의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능력이 이와 같이 승리를 지니고 있어, 의심할 것 없는 확신으로 백번 꺾어도 굽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능력에는 두어 가지 종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마땅히 해야 할 당위(當爲)와 하지 말아야할 물위(勿爲)가 있습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할 일을 금지시키고 다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상에서 은둔하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은둔하는 것은 동양 유교의 습속입니다. 세상과 뜻이 맞지 않으면, 곧 바로 떠나버리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숨어버립니다. 자신이 활동할 무대를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이 채용해 주기를 바라고, 남의 기계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넓고 넓은 이 세상은 바로 우리의 무대입니다.
주께서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발을 들여놓을 곳도 없었지만,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으며, 여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저곳으로 갔고, 저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바울은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은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용감하게 분투하였습니다.
배는 물이 없으면 뜰 수 없고, 비행기는 공기가 없으면 공중을 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죽지 않는 한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한 그릇 밥, 한 벌의 옷도 모두 세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하늘에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입고 먹는 것을 떠나 살 수 있습니까?
근일에 졸음 병[기면병嗜眠病]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통증도 없이 죽습니다. 세상에서 은둔해 사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일을 간섭하지 않으니 마음에 고통이 없겠지만, 이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삶의 즐거움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나의 털 하나라도 뽑아 주는 작은 희생을 함으로써 천하에 이로움이 된다고 하여도 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과 ‘이마에서 발꿈치까지 상처를 받는, 온 몸의 희생을 받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그 일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 날은 바로 세상을 위해 온몸을 희생할 때입니다.
참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면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전진할 뿐입니다. 남이 헐뜯어도 성내지 않고, 남이 칭찬하여도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전에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가 조선인의 진보(進步)에 대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뻐할 일이 못 됩니다. 새삼 넝쿨이 고목나무에 올라가서 봄날 잎을 틔웠다고 하여, 이것이 참으로 고목이 만든 봄입니까? 기뻐하기에 매우 부족합니다.
바울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헐뜯거나 칭찬하여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용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7).
둘째, 고통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안할 때는 많은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 특별히 많이 내려주십니다. 고통은 손님과 같아서 잘 대접하면 기쁘고 즐겁게 되지만, 박대하면 슬픈 괴로움을 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치를 깊이 알았으므로 고통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고통을 좋아하여 ‘나에게 가시를 주셨으니 내가 자만하지 않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내가 조상이나 문벌을 자랑하려고 하면 가시로 찌르고, 내가 문학이나 학위를 자랑하려고 하면 가시로 찌르고, 내가 종교의 배경인 교벌(敎閥)을 자랑하려고 하면 가시로 찌르고, 육체의 건강을 자랑하려고 하여도 반드시 가시로 나를 찌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우들도 또한 이러합니다. 신앙이 두텁지 못할 때는 자기의 부족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장점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잘 한 것이 있으면 나타내 보이려고 합니다. 마치 유대인이 나팔을 불어 시가지에서 광고하듯 하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는 진취성이 없이 늘 권세를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나무도 털끝 같은 작은 싹에서 나오고 9층 높이의 누대인 다락방도 흙을 쌓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묘목이나 기초로 쌓은 흙벽돌이 족히 자랑하고 빛낼 만한 것이 뭐 있겠습니까?
모세가 위대하게 된 것은 광야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있을 때와 양을 치던 때였습니다. 사무엘의 위대함은 나라를 통치하던 통령(統領)의 때가 아니고, 성전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이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여 빛내려고 하는 자는 실패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경은 가난 속에서 쓴 나물 뿌리를 씹으며 공부를 점점 익혀놓아야 백 가지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또 희망이 있게 됩니다. 누가 능히 나를 고발하고 정죄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고발하고 나를 정죄하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시대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아부하지 않음으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간혹 반역자로 지목되고, 간혹 분수에 넘치는 참람(僭濫)으로 배척을 받아, 같은 겨레인 동족으로부터 인연이 끊기고 내쫓기려고 하니 그 고통이 이보다 더 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모세 때 백성들은 원망하기를 ‘네가 나를 관청에 고발하였느냐?’하고 몰아내려고 하였으니, 모세의 고통은 애굽에 있지 않고 반대로 동족에게 있었습니다. 고통을 참으면 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이치를 깊이 알았으므로 주께서 내려주신 가시를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방법입니다.
셋째, ‘영광을 취하지 말고 다만 기쁨과 즐거움을 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영광을 탐내고 헤롯왕도 영광을 탐냈지만, 이는 마치 아침에 피어난 꽃이 저녁에 시들어 떨어지듯 하였으니, 이와 같이 허영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입는 옷을 꾸미기를 좋아한 유대인은 로마인들에게 붙들려 종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지난 날 영화롭고 귀하게 살던 사람들은 오늘날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광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말한 자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구하려고 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여야 합니다.
주님도 이 이치를 알기 때문에 마귀가 ‘만국의 영화를 주겠다.’고 하였어도 주님은 물리치셨습니다. 바울도 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영광을 보기를 분토와 같이 하였으며, 주님께서 바울을 만물의 찌꺼기 같이 버렸어도(고린도전서 4:13) 바울은 오히려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항상 기뻐하였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6). 그 기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처한 형편으로 능히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지만, 바울은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누가 능히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