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사탄아! 물러가라(撒但乎退去)
마태복음 16:23
5월 20일 (주일오전)
主有徒十二而最愛彼得, 以其知基督又勇於實踐, 然今以最惡之撒但責之者何也? 以最惡之名加於最愛之徒, 其中抑有眞理乎! 吾信徒必工夫此眞理, 使信不誤可也. 余初信時, 尙洞有盧傳道師, 一日傳于東門路上, 有衆人石擊, 衣破流血, 施蘭敦氏(선교사이고 의사)曰 昨日逢辱聞甚未安, 盧逆怒曰 我受福胡曰辱也? 余聞甚未詳矣, 今知此言正副信仰也. 主願至天父之家, 非十架則不能至矣. 彼得未曉, 願使十架不至于主之身, 是欲使犧牲大業失敗, 豈非撒但之心乎? 爲山九仞功虧一簣也. 愛徒誠是矣, 然徒愛其徒而不惡其罪, 則愛不全矣. 愛有多怒故愛子女責也. 子而無詮戒, 則是私子非眞子. 是保羅之敎訓也. 主愛彼得而彼得犯罪, 主不責之可乎? 盖人成功失敗於試誘, 人心多誘, 物誘人誘, 皆敗人之源, 若非眞信, 不能察知也. 魔誘人多術, 以主之愛弟, 誘主以可欺之方, 人不能察知. 鄭子產使圉人救魚歸而烹食, 報曰魚圉圉然往矣云. 主遇試三次, 在曠野時, 始言十架時, 入圉祈禱時, 主皆勝利不屈, 比如蜉蝣撼大樹矣. 金人曰撼山易, 撼岳飛難, 故岳公全節于大難之中, 人在幾成之際易受誘惑. 前亦言朝鮮講經科一人講幾畢, 此人心思曰, 我講畢則必頭着月桂冠, 乘白馬騰踏于長安大道, 榮耀果何如也? 如此披動之時講騫不通, 故魔試久信之人, 或使牧師陷罪, 或使職員陷罪, 豈不可慮哉? 余幼時上京, 同行中一人, 不勝路憊, 至廣州다리川峴, 問曰 此去京城幾里乎? 一人試曰倍遠於已行之程也云, 此人恐欲返歸, 傍人卞其不遠同行. 吾行天國之路亦如是, 幾至天國之門, 魔欲試之, 此時信徒勸之使偕行, 庶不失矣. 比如穀物將熟, 風卷可畏. 孜孜爲善者, 舜之徒也, 孜孜爲不善者, 跖之徒也. 聖神之事, 魔鬼之役常常竝行. 욥記云 天使之會亦有魔鬼, 魔常孜孜不已, 故吾亦孜孜不休然後, 可以勝服. 故保羅曰 惜光陰也. 時代甚惡, 學之不已, 如鳥數飛則終至雲上, 翩翩登空, 下視人世矣. 故愛有分揀, 愛或爲罪, 愛或爲善, 同是愛也, 而愛之不以其道則罪也. 彼得愛主免禍誠是矣. 然主若免禍則失敗, 主之成功在禍己也. 孔子曰殺身成仁, 誠哉是言也! 伯夷之餓死成其淸, 子推之焚死成其介. 圃隱之被殺成其忠, 提上之焚死, 成其節, 申叔舟之不死, 有子八龍也. 無論何事欲成其目的, 必有試誘也. 心香如煙, 風撓則不能直上, 人之心靈走一直線. 主曰勿顧後, 勿人事而勇往直前可也. 主從一直線向天堂, 而有徒中撓之者, 豈非撒但乎? 余至今讀書不能成誦者何也? 卽撓心者多故也. 今信主後, 前日所學奉之祭祀婚禮等, 皆忘却不能記憶也. 余初信時下鄕, 友人爲喪制設几筵, 余亦入哭几筵之下, 再拜禮於主喪, 今而思之, 信不熟故也. 信熟則不可被動.
주께서 12제자 중에서 베드로를 가장 사랑하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 실천에 용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나쁜 말로 사탄이라 꾸짖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가장 나쁜 이름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붙인 것은 그 가운데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도들은 이 진리를 공부하여서 신앙이 잘 못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내가 처음 신앙을 가질 때 상동교회에 노(盧)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문(東門)에서 전도를 하다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돌덩이 공격을 받아서 옷이 찢겨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다음 날 스크랜턴(施蘭敦) 씨(선교사이고 의사)가 위로하기를 ‘어제 욕보았다는 소문 듣고 매우 놀랐소이다’고 하자, 노전도사가 도로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복을 받았는데 어찌 욕보았다고 하시오’ 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많은 의문을 가졌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말이 바로 신앙에 부응하는 합당한 말임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시려 하실 때 십자가가 아니면 들어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가 주님의 몸에 이르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생의 대업(大業)을 실패하도록 하려고 한 일이니 사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홉 길 높이로 산을 쌓아도 그 공적은 한 삼태기 잘 못 쌓은 데서 무너진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사랑하신 것도 실로 이러합니다. 그냥 사랑하기만 하고 그 허물을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사랑에는 성낼 일이 많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를 나무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훈계를 하지 않으면 이는 사사로운 자식이고 참 자식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의 교훈이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셨는데 베드로가 범죄 하였어도 주께서 나무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대개 사람은 시험의 유혹에서 성공과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물질의 유혹과 사람의 유혹은 모두 실패의 근원입니다. 만일 참된 믿음이 아니면 능히 살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유혹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마귀는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로서 주님을 속이는 방법으로 유혹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능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정자산(鄭子産)이 마부[어인圉人]를 시켜서 물고기를 물에 놓아 주라고 하였더니, 마부가 돌아가서 그 고기를 삶아먹고 ‘물고기를 놓아주었더니, 꿈틀꿈틀 떠나갔다’고 보고하였답니다.
주님은 세 번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처음으로 십자가를 말할 때도, 기도할 때도 모두 굴하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이 시험은 마치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원(元)나라의 전신인 금(金)나라 사람이 이르기를 ‘산을 흔들어 움직이기는 쉽지만 송(宋)나라 충신 악비(岳飛)를 움직이기는 어렵다’고 하였답니다. 이리하여 악비공은 그 큰 어려움 중에서 절개를 온전히 지켰습니다.
사람은 거의 성공할 즈음에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전에도 말하였지만 조선시대 과거 중에 경서를 외는 시험인 강경과(講經科)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강(講)을 거의 끝낼 무렵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 강만 끝내면 반드시 머리에 월계관(月桂冠)을 쓰고, 백마 타고 서울 큰 길에 호화행차를 할 터이니 그 영광이 과연 어떠할 것인가’하는 동안에 그만 기억력이 흐트러져서 강이 막히므로 가장 나쁜 점수인 불통(不通)을 맞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는 오래도록 믿는 사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목사님을 죄악에 빠지게 하고, 어떤 때는 직원을 죄악에 빠뜨리기도 하니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릴 때 서울에 올라오는데 동행으로 오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여행길의 피로를 못 이겨 힘들어 했습니다. 우리가 경기도 광주 다리내고개[천현川峴]에 이르렀을 때 묻기를 ‘여기서 서울[경성京城]이 몇 리나 되느냐’고 하자, 한 사람이 시험으로 떠보려고 ‘지금까지 온 것보다 배는 더 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곁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리 멀지 않다고 밝혀 주어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가는 길도 이와 같습니다. 천국의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귀가 시험하려고 합니다. 이 때 신도들이 권유하여 함께 가도록 하면 거의 실패하지 않습니다. 비유하여 본다면 곡물이 익으려고 할 때 바람이 휩쓸어갈까 두려운 것과 같습니다.
힘쓰고 힘써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성군인 순(舜)임금 같은 무리이고, 애쓰고 애써 악한 일만 하려고 하는 자는 악인의 표본인 도척(盜跖)의 무리입니다. 성신의 일과 마귀의 역사가 늘 병행합니다. <욥기>에 이르기를 ‘천사의 모임에 마귀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늘 노력하여 말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쉬지 않고 노력하여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이르기를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시대가 매우 악하니 배우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새가 자주 나는 연습을 하여 마침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올라가서 펄펄 날며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듯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에도 분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간혹 죄가 되기도 하고, 간혹 착한 일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올바른 도리로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데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여 화를 면하게 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베드로의 말을 듣고 화를 면하였더라면 실패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성공은 화가 자기에게 미치게 한데 있습니다.
공자가 ‘살신성인(殺身成仁) 곧 자신을 죽여 인(仁)을 성취시킨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참으로 진실 된 것입니다. 백이(伯夷)는 주(周) 무왕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굶어 죽음으로써 그 청빈함을 이루었고, 개자추(介子推)는 공신으로 책봉하는 명예를 거절하고 산에 가서 불타 죽음으로써 그 강직한 절개[경개耿介]를 이루었고, 정포은(鄭圃隱)은 태종에게 피살됨으로써 그 충성을 이루었고, 박제상(朴堤上)은 일본 황실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절개를 이루었습니다. 신숙주(申叔舟)가 죽지 않은 것은 중국 삼국시대 순숙(旬淑)의 아들처럼 재능이 뛰어난 8명의 아들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막론하고 그 목적을 이루려면 반드시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마음의 향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나 바람이 불어오면 바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일직선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곧 사람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주님께서 일직선으로 천당을 향하여 나가는데 제자 가운데 그 가는 길을 흔들려고 하는 자가 있었으니 이 어찌 사탄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독서를 하는데 욀 수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곧 마음을 흔드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믿은 후로는 전일에 배웠던 학문에서 ‘제사나 혼례 등의 예절’을 모두 망각하고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신앙을 가졌을 때 친구가 상주가 되어 빈소를 설치했는데, 나도 그 빈소에 들어가서 곡(哭)을 하고 상주에게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니 신앙이 익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신앙이 익숙하였는데 남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