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사(素砂)대첩
명군이 다시 조선에 나와 경성에 주력을 정하고 지방 가장 중요한 고을만 주병하고 약간으로 지키더니 이에 한산도가 패하여 일군의 점령한바 되었다는 급보가 경성에 들어오고 양원이 지키고 있던 남원이 또 패하였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명장 마귀(麻貴)는 대군을 몰아 다시 남하하여 막을 새 소사에 이르러 일군을 만나 격전이 되어 이때 왕은 다시 남방 각 고을이 패하여 일군의 점령이 되고 한산도까지 패함을 들으시고 일변 이순신을 놓아 남양으로 보내고 연하여 일병이 경성을 향하여 온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이에 다시 용만의 일이 없을까 하고 제신을 모아 의논한 결과 모두 피하자는 의논이 있어 내전과 세자는 수안(遂安)으로 보내고 제상으로써 도적을 막을 새 명군이 소사에 이르러 일군과 충돌이 되었는데 마귀는 수원에 군사를 유진시키고 일대는 유포(柳浦)로 나아가고 일대는 영통(靈通)으로 나아가고 대군은 중앙으로 나아가 직산 수채(水蠆)에 박도하였다.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다가 명군이 철편(鐵鞭)으로 일군영에 돌진하여 함부로 부시고 치고 양군이 일진일퇴하여 여섯 번이나 충돌하다가 양군 사상이 많았고 마귀 해생 등이 다시 화포로 치고 또 철퇴 철편으로 돌격하니 일군이 강약부동으로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일본 장수 기차라는 자가 흑전장정에게 헌책하되 적은 무리로 큰 무리와 싸움이 불가하고 또 피아의 죽음이 산과 같이 쌓였으니 물러갔다 다시 수습하자 함에 장정이 이 말을 좇아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직산을 버리고 목천(木川)과 청주(淸州) 등지로 물러갔다.
육지로는 대첩이 세 번 있었으니 일은 평양대첩이요, 이는 행주대첩이요, 삼은 이번 소사대첩인대 소위 삼대대첩이라 이른다. 조금 후에 명장 형개가 다시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경성으로 들어오고 이 군대를 다시 삼분하여 가지고 남하하여 일군을 소탕코자 하여 이여매(李如梅)로 좌군장이 되고 고책(高策)은 중군장이 되고 이방춘(李芳春)은 우군장이 되고 조선도 칠장이 있어 삼군을 만들어 명군과 합하여 남하할 새 양호(楊鎬) 마귀(麻貴)가 총장이 되어 진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