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협회
왕이 환궁하신 후에 일본세력은 땅에 떨어지고 노국세력이 팽창하였고 당시 조선의 신진청년은 다 구미유학자이고 또 그들이 영미의 세력을 이끌어 들여 일본세력을 막으려 하더니 이때에 비로소 독립협회가 발기되었다. 갑신정변에 망명하였던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외부고문이 되었다.
조관들이 정견을 교환하려고 구락식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더니 그 후에 소장파들이 몰려 들어와 회가 되었고 처음에 좌담식으로 시사를 의논하던 것이 차차 조정을 공박하는 연설회가 되어 백성으로 정치를 의논함이 불가라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이것은 완고자의 말이요 또 대중들은 듣기를 원한다.
기탄없이 정치를 공박하게 되어 독립협회라는 이름이 생겼다. 광범위로 일반유지들이 모여 형세 자못 떨치었다. 또 기관지를 발행하니 곧 독립신문이다. 이것도 이단이란 비평을 들어가며 발행하였는데 일반은 주급 내는 법을 몰라 내지 않고 홀로 기독교인들이 다 수주금을 내었다.
또 시가에 다니며 시사연설이 있어 민중의 사상을 고취하고 또 지라사절을 맞이하던 터에 독립문을 세워 11월 14일에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건양 2년에 서재필이 고문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가고 윤치호 이상재 등이 이것을 계속하여 드디어 민간에 이 세력을 잡았다. 이때에 독립협회의 인물은 대개 미국에 갔다 온이요 미국 선교사들에게 교양을 받은 이와 역대 미국 공영사들의 후원이 많았던 것이다.
비로소 쇄국주의 꿈을 깨고 백성들도 나라 일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라는 황제 일인의 물건이 아니고 백성의 것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나 소위 완고파와 수구파들은 이것을 미워하며 배척하고 따라서 일부 불량배를 끼고 기어이 회를 중상하려고 꾀하였다.
독립문 옆에 독립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곳에 모여 회무를 처리하였고 그때 열사들은 다 열렬한 애국자이었다. 반대파의 흉계로 보부상의 습격을 받은 뒤로 만민공동회로 변하였고 그때 대신들이 불러 다니던 이는 박정양 이기영 등이 왔고 또 이 회에 참석한 대관들은 면직을 당한 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