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거사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양력 2월 13일)로 정하였다.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후 음력 2월 5ㆍ8ㆍ12일 총 3회에 걸쳐 다시 5개조로 나누어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동지 서창보(徐彰輔)가 피체되어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거사 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선생은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여 1907년 7월 3일 유형 10년을 받아 지도(智島)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광무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간사한 기회주의 때문에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 
선생은 1910년 8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체결로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대한 외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서 자신의 영화(榮華)와 출세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또 각각 친중(親中)ㆍ친일(親日)ㆍ친러(親露)로 처신하며 서로 자기네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급급하였고, 결국 간사하고 교활한 기회주의가 만연하게 되어 나라는 부패하고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고 선생은 생각하였다. 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檀君)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1909년 1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이기․김윤식(金允植)․유근(柳瑾)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祭天)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하였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 30일 칙령을 발표하여 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백두산 아래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겨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찾아 성지순례의 길을 나섰다. 결국 선생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겨레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려 한 것이다. 강화와 평양을 거쳐 백두산 아래의 중국 화룡현(和龍縣) 청파호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곳에서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게 된다. 이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 지사가 정착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어 대종교(大倧敎)를 크게 번창시켰다. 한편으로는 교인과 교조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청산리전쟁’을 주도한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김규식(金奎植) 등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시켰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현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종교에서도 등록서류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 이러한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대종교는 창교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며, 선생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일제 탄압에 순교를 결심. 구월산 삼성사에서 절식 수도로 순절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 중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매일 기원했다. 마침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였다. 이는 선생이 단군 성적지를 찾아 순교하려고 내린 결단이었다. 1916년 음력 8월 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 뒤 삼성사에 도착했다. 8월 한가위에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선생은 국조(國祖) 단군을 만들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지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애(民族愛)와 애국심(愛國心)은 광복(光復)이 되는 1945년까지도 계속 이어져, 수많은 후진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나철 선생이 순교한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
첫댓글 나철선생은 한국인의 기개살린 독립운동가요.위대한 인물입니다.
대단한 구도자요 민족의 스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