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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골든아워조차 없는데도 얻는 기회>의 줄거리:
즉사(卽死)는 문자 그대로 사건이 발생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살려 볼 기대와 노력이 가능한 골든아워조차 없는 상황이기에 말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 자신이 마땅히 이렇게 소름끼치는 즉사가 주어져야 함을 면하면서 얻게 되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계십니까?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애는 예외 없이 즉사를 면하고 주어지는 기회로서의 삶입니다. 즉사의 이유와 기회의 목적을 알아야겠습니다.
골든아워조차 없는데도 얻는 기회
(욥기 34:1~37)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골든아워조차 없이 얻는 기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골든아워조차 없이 얻는 기회’
오늘 말씀의 제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즉사(卽死)를 면하고 얻는 기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골든아워(Golden hour)는 사건사고가 발생하여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응급처치가 가능한 금쪽같은 시간을 뜻합니다. 곧 죽을 사람을 살려내서 회복을 위한 치료를 가능케 하는 응급처치 시간입니다. 심폐소생술 같은 경우에는 심장정지 후 5~10분 안에 시행되어야만 합니다. 이때의 5분이 골든아워가 됩니다. 항공사의 경우에는 운명의 90초 룰이 있다고 합니다.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90초 내에 승객들을 기내에서 탈출시켜야만 합니다. 이 90초가 항공기 사고의 골든아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골든아워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장에서 죽는 것을 즉사라고 합니다. 즉사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많은 죄를 지은 끝에 벌을 받는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골든아워가 존재하지 않는 즉사의 순간을 끊임없이 모면하면서 기회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실생활과 관계가 없는 다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 차원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깊이 침투해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의미는 대단한 것을 이루는 시간이 아니라 절제절명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즉사가 마땅한 상황을 면해주시는 기회를 제공 받은 것입니다. 즉 이 기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내가 왜 즉사해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사실이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의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즉사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즉사를 면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남은 생을 기회로 제공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이 나옵니다. 앞서 세 친구가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식적인 인과응보의 논리를 피해서 욥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욥에게 재앙이 주어진 것은 과거에 지은 행위적 범죄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은 지금까지 인과응보로서의 재앙을 주장해왔지만, 엘리후는 이러한 생각을 반박하며 지금의 재앙과 고통은 연단이라는 생각을 피력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디자인하신 욥의 모습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원죄적 체질이 되었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그것을 본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연단을 주셔서 잃어버렸던 본심으로 이끌어 가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연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변론을 보면 엘리후가 기존의 주장을 떠나서 앞서 세 친구가 주장하던 바를 받아들이는 인상을 주면서, 행위대로 갚으시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따르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마치 욥을 재판정에 세운 것 같은 변론이 진행됩니다. 지혜가 있는 자들을 배심원으로 불러서 그들이 욥을 판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욥의 죄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손상시키려는 것처럼 보여 졌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욥의 죄를 확정하고 그 근거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절대적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시간과 공간과 신분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절대적인 법적 근거를 강조함으로서, 욥의 태도가 큰 죄악임을 재판정에서 판결하고 선언하는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무시한 욥은 정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엘리후가 앞에서는 욥의 재앙을 연단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체적으로 볼 때에 엘리후의 변론은 감정적으로 치우쳐져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욥은 결코 한 번도 하나님의 공의의 절대성을 무시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체적인 일하심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이끌어 오신 삶에 재앙이 임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거나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마음과 육체에 가해지는 심한 고통에 따른 호소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감정적인 엘리후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것으로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감정적인 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는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본심과 초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원죄와 자범죄로 불리는 행위적인 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엘리후는 이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며 또한 연단과 공의의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 재앙과 역경을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하면서도 욥의 반응에 대해서 비판을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재앙은 연단을 통해서 의문시 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를 보충적으로 거론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의 논리적 보충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재앙을 단순히 연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적 범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가 소홀히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기 위해 공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이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붙잡은 것이 원죄적 성향의 활성화입니다. 돈 많이 벌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에 돈을 품게 된 상태가 바로 원죄가 활성화 된 상태인 것입니다. 자녀나 무병장수를 담을 수도 있습니다. 성공 승진 결혼 등의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계속 변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죄가 활성화 된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아의식이 생기면서부터 이 세상의 것을 탐색하며 행복거리를 찾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버려야할 초심입니다.
반대로 본심은 하나님을 모신 상태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해서 이 본심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원죄 때문에 모든 인간의 미래는 영원한 멸망으로 운명 지어졌습니다. 사는 동안에 행위로 짓는 죄 또한 원죄가 활성화 된 결과입니다. 내가 마음에 돈을 품고 있다면 열심히 돈을 벌게 됩니다. 그 방법이 대한민국 법에서는 합법적인 것일지라도 영적으로 보자면, 돈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은 것 자체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죄악입니다. 돈 대신에 취직 승진 관직 등을 담았을지라도 원죄를 활성화시키는 대상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원죄로 인해 나타난 행위의 범죄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도 무색해지고 말 것입니다. 엘리후는 앞서 재앙을 연단이라고 말한 후에 다시금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행위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해 마땅히 처벌을 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기 때문에 돌아가야 할 현재는 미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연단은 행위적 죄로 인한 형벌과 상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범죄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죗값을 물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부모를 거역한 자는 돌로 쳐 죽여라,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여라, 살인한 자는 돌로 쳐 죽여라” 등의 여러 죄에 대한 처벌이 명문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더욱 강화됩니다. 친구를 향하여 모욕적인 말만 하더라도 살인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죗값의 결과는 돌에 맞아 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에 비추어보았을 때에 용납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벌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동하며 살고 있는데 도저히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행해서는 안 될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가졌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해야 됩니다. 이것이 시내산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강림하실 때에 모세에게 접근하는 자들에게는 돌파해서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죽음은 골든아워가 없는 즉사입니다.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율법과 율법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죗값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표현이고 이 공의는 결코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당한 재앙은 엘리후가 말한 사랑으로 인한 연단과 공의로 인한 형벌 중에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타락 이후로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인간들과, 예수님이 오신 뒤부터 재림하실 순간까지 태어날 모든 인간들의 행위적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즉사의 심판을 내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이 즉사해야 할 행위의 범죄도 미래의 주님에게로 옮겨졌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행위의 범죄도 즉사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오셨던 예수님에게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백성들이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용서는 단순히 여인의 간음죄를 덮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요즘 식으로 말해서 특혜입니다. 이러한 특혜가 허락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포기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이유는 간음죄를 저지른 즉사의 죗값을 예수님께서 치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여럿이 밥을 먹고 나갈 때에 앞선 사람이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맨 뒤에 있던 사람이 오늘은 자기가 계산을 하겠다고 합니다. 식사의 대가를 다른 이가 치르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나가면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간음현장에서 즉사해야 될 여자의 죄를 끌어당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동으로 짓는 죄에 대한 즉사를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님이 지금의 나의 죄를 빨아들이듯이 구약시절의 죄는 미래의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지은 죄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만인화해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즉사할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든지 해당되는 일입니다.
범죄의 죗값으로 즉사함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범죄 자체는 원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행위적 범죄의 값은 즉사인데 그 즉사가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으심에 흡수되어서 공의가 실천되고 있지만, 나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기뻐하려는 원죄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즉사의 심판이 내리실 때마다 주님께서 그 심판을 대신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내 행위로 인한 죗값이 없어졌지만 원죄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연단을 주십니다.
우리가 타락 이후에 원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뱀과 같습니다. 뱀처럼 배를 땅에 대고 기어 다니는 것은 마음의 흡입구를 땅에 대고 땅의 것으로 배를 채워서 기뻐하고 만족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인한 만족을 방해하는 재앙과 역경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이 역경은 나의 행위로 인한 범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그 죗값에 대한 형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빨아들이셨습니다. 물 먹는 하마가 습기를 빨아들이듯이 계속 주님이 빨아들이십니다. 주어지는 재앙과 역경은 마음의 흡입구를 땅에 대고 있는 상태에 하나님께서 칼을 대시는 것이고 하늘로 향할 것을 요구하시는 연단인 것입니다.
우리의 원죄적 성향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동안에만 억제될 수 있습니다. 마치 불 뱀의 독이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보았을 때에 사라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에만 원죄의 성향은 죽고, 이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흡입력은 중단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흡입력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빨아들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효능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즉사의 형벌이 내리고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고 루터는 “나는 날마다 세례를 받는다.”라고 했겠습니까? 어제 범죄 했는데 오늘 또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라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죄가 빨아들여졌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 범죄는 마음의 원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돈을 좋아하고 자녀를 좋아하고 배우자를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곧 원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만 원죄의 성향은 억제됨으로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즉사가 면해짐으로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서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잘 살려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골든아워조차 없는 즉사를 주님께서 십자가로 다 빨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연합함으로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서의 삶을 제공 받았으니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