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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6장 47-51절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
오병이어 사건으로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9). 특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을 말씀으로 그리고 표적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의 반응은 믿지 못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지난주와 지난주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저들이 왜 믿지 못하는가?” 했을 때 좀 더 근원적인 성격으로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분명 믿음의 내용을 전하였고, 또한 표적까지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편으로는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히4:2, 개역한글). 그러나 근원적인 내용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44).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에게로 갈 것이고, 그리스도에게로 간 자들은 결코 쫓겨나지 않을 것이지만(37),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뭐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지만, 듣는다고 해서 다 믿는가? 혹 저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했는데, 표적을 보여준다면 본다는 것 때문에 믿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자들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지 않은 자들, 소위 유기자들 입장에서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진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믿음을 줘야 할 의무가 없으며, 또한 우리의 의지는 그 스스로가 믿음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47절과 48절로 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여기서 믿는 자는 3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입니다. 44절로 하자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 자입니다. 외적 증거로서 말씀이 주어질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효력 있도록 역사하시는 자, 성령에 참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도 하다가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히6:4-6)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 자(37), 그가 믿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무엇을 가졌느냐?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영생과 관련해서는 이미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영생을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살린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것이요, 그런 죽음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다시금 부활하게 되는데, 그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까지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표현합니다. 죽음 이후 그리고 부활하게 될 때 영생을 소유하게 될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 다시 말해 지금 믿고 있다면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로마서 8장 30절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미리 정하신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택하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 땅에서 부르심을 받되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죽음 이후 완전 성화로 들어가는 것을 영화의 입문으로 보고, 최후 심판을 통해 완성이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이 땅에서부터 주어진 것처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 때문에 이 땅에서 영화롭게 될 수 있다, 혹은 영화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완전 성화가 가능하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는 완전 성화도, 영화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되 유효적으로 부르셨다면, 그래서 의롭다 하신 자들이 있다면, 영화는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장차 주어질 것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되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 또한 참된 믿음을 주셔서 의롭다 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 그리고 약속의 신실하심 때문에 반드시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으로 설명하자면 그리스도에게 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영화롭게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확고함에 근거해서만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가? 오히려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화에 참여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가? 비록 영화를 이해할 때 죽음 이후 영화로 들어가는 입문이요 최후 심판을 통해서 영화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실제로 개혁자 중에 어떤 사람은 로마서 8장 30절을 근거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화에 참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혹은 받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궁극적인 완성은 장차 주어질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소위 신학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영화에 있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 안식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 의하면 그런 의미에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도 하십니다(히4:11).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는 전혀 안식하지 못하는 자로 있는가? 어떤 안식도 맛보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 주일 안식을 배우며, 또한 실제로 안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이미 안식에 참여하는 자로 있지만, 그 완성은 마지막 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은 단지 확고함에 근거한 것으로서만 해석하기보다는, 영화 역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러나 그 완성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가서야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때가 되어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화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고, 안식이 그렇고, 또한 영화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영생을 가졌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영생은 장차 주어질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것처럼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3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마지막 날에 다시금 살리시기 때문에 그런 확고함에 근거해서 영생을 가졌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생은 장차 주어질 것에 대한 확고함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이미 참여한바 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 6장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천국에 가서야 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연합을 이루어 살아가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영생에 참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측면에서 장차 마지막 때 가서야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이상 결코 주리지 않는 자로 또한 목마르지 않는 자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그가 신자인 겁니다(고후6:10).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은 완성된 모습으로 있지 않기 때문에 주리지 않았다고 해서, 또 목마르지 않았다고 해서 더 이상 채워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마5:6). 그리고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공급 받아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15:5)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분으로부터 공급을 받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이후에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요한복음 6장 56절과 5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데, 그 연합의 목적이 무엇이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연합을 이루어서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계속해서 공급받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까지냐? 54절과 55절을 보시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영생을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이 오더라도 다시금 살려서 영생하도록 하는 데까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행하게 되는데, 이런 내용과 함께 생각하자면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가 받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 생명을 가졌지만, 그래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생에 참여한바 되었지만, 그리스도로부터 계속해서 공급을 받지 않으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성찬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것으로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는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요,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비와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내용으로서 개혁자들은 성만찬의 제정 이유를 설명하는데, 지난주 오후에 살폈던 칼빈 성만찬 소고(1541)라는 책의 내용을 다시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단순히 교훈과 설교만으로 제시될 때, 우리가 그를 마음의 참된 신뢰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시고,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서까지 자신을 낮추사, 보이는 표징을 그의 말씀에 붙여 놓기를 바라셨다. 바로 이 표징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약속의 실체를 나타내시며 우리를 확고하게 하고 굳세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에서 건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떡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며, 포도주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임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죽으시기만 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시고 자신의 피를 쏟으셨다면 나의 의를 위하여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우리를 살피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내용에 얼마나 합당한 자로 서 있는가를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말씀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보이는 방식으로 제정하여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예식을 통해 더욱 더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셔서 49절과 50절을 보시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이미 31절에서 무리들이 요구한 것이 만나와 같은 표적이었습니다. 오병이어를 목격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 저들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32절과 3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들은 만나 사건을 말할지라도 언제나 육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만나를 먹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먹었다. 이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는데,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3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만나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던 겁니다. 이미 구약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되, 신명기 8장을 통해서는 어떻게 알리기도 하셨느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8:3) 이미 만나를 먹이시면서 너희는 그것을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고 사는 자인가? 말씀을 먹고 사는 자이다. 달리 말하면 그 말씀을 주시는 주체에 의해서 사는 자이지, 만나가 너희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다시금 언급하기를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위하여 만나를 먹었지만 그런 육신도 죽었다고 볼 수 있고, 혹은 만나를 먹었지만 만나의 참된 표인 예수 그리스도는 먹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후자를 위해 교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후자의 경우는 만나를 먹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데, 만나를 먹은 모세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은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자체가 실제적인 구원의 표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좀 구분하자면 육적인 구원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실제적인 구원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는 것은 육적인 의미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것을 영적으로 받아먹지 못한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만나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자임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은 분명 먹고도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 그분을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한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육체적으로는 죽을 수는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던 것처럼 영적인 의미에서 멸망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는 분명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형태도 보면 믿지 않는 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평안하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양, 저런 모양 다양한 모양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죽음조차 죽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죽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똑같은 죽음일지라도 우리의 죽음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영생이 더욱 분명하게 되는 죽음일 뿐입니다. 반면 믿지 않는 자들의 죽음은 뭐냐? 영원한 멸망의 확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들의 죽음은 죽음이지만, 우리의 죽음은 성경의 또 다른 표현으로 잔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육신의 죽음이 결코 두려움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고히 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신자는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로서 그런 영생을 바라보아야 할 자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영생이 죽음을 통하여 좀 더 완성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 땅에서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것이 죽음을 통해 드디어 완성이라는 선물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1절을 보시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부분은 이미 말씀하신 사실을 다시금 언급하시면서 그 내용을 좀 더 확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32) 그것이 곧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 그리고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5).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고, 그것으로 인해 수군거리기까지 했습니다(4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말씀하고 계신 것이 동일한 내용을 알리고 계십니다. 48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50절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그리고 알리고 계신 것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십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까지 밝히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반복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고 또 가르쳐주십니다. 반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저들은 표적을 요구하지만 표적다운 표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실 수도 있지만 이미 보여주신 표적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표적보다 저들과의 대화를 통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들려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믿느냐? 믿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후에 보면 다시금 저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52절에 보면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전혀 믿음의 자리에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통해 역으로 우리의 믿음을 비춰본다면 그렇게 믿음을 가지기가 어려운데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본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에 대한 관심이 있고, 또 영생에 대한 사모함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그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전3:11). 그러니까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영원을 찾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그 영생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질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닌 곳, 그리스도가 아닌 곳에서만 영생을 찾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이요,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찾았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찾은 것이 아니라 찾아진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을 감겨져 있었는데 우리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신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록 이미 영원 전에 그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시편 기자는 어떻게 반응하기도 하는가? 시편 139편 16절 이하 18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우리가 감탄해야 하고, 감격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단순히 믿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시느냐?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수를 세려고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고, 또한 오늘 행해지는 성찬을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감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허락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탄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우리는 반복적으로 교훈 받아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계속해서 믿음의 성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보십시오. 믿음의 삶을 살아가다가 마치 믿음이 없는 자와 같은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번 들은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계속해서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분의 가르침 아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주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제정하신 이 성찬에 대해서도 말씀과 더불어 주님 오실 때까지 반복적으로 행하면서 참여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51절에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할 때 세상은 요한복음 6장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 아닙니다. 3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신 자들, 그들만이 여기서 말하는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택자 만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그들만을 위한 죽음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택자 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택자 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택자 만을 위해 자신의 살을 공급하십니다. 성찬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오직 택자 외에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유익을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맨 처음 성찬을 행하실 때 그 곳에는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찬의 유익을 받았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찬을 통해 유익을 받은 자들은 비록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께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경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인의 은총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연약함이 있지만, 또한 성찬에 참여했어도 죄악 가운데 살 것이고 또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겠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성찬의 유익이 우리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이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말씀 안에서, 또한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