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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에서 밀라노 가는 길
피사에서는 대성당과 사탑만 구경하고 버스는 밀라노를 향하여 달린다. 밀라노로 가는 길은 좌측으로 지중해 해변을 끼고 이어지는 도로를 달린다. 어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초지와 포도와 올리브 농장이 이어진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탓도 있지만 계속되는 강행군에 피로가 몰려온다.
카라라 대리석 채석장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산이 조금씩 보인다. 이곳역시 높은 산 중턱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성당과 종탑이 제일 큰 건물로 눈에 띤다. 멀리 속살을 드러내 놓은 산들은 대리석을 채석하는 산이란다. 산꼭대기는 물론 중턱에서도 대리석을 채취하는 듯하다. 철도가 있는 시내를 지나올 때에는 온통 대리석 가공공장들이 즐비하고 가공하여 놓은 석재들이 무진장 쌓여있다. 이 지역은 토스카나 지방의 카라라(carrara)라는 곳으로 로마시대부터 대리석 채석과 조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카라라 지역의 대리석은 여러 유명 조각에 쓰였는데 미켈란젤로가 사랑한 카라라 대리석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 중 하나인 다비드상에 사용되었으며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의 대리석을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리석으로 칭송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로마시대부터 2000년 이상 채집되고 있는 카라라 대리석은 현재에도 매년 100톤 이상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 상태로 라면 약 1000년 뒤에는 대리석이 고갈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것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좋은 이태리 대리석이란다.
피사에서 밀라노로 가는 도중 농촌 풍경
버스는 호수와 갈대가 무성한 저지대에서 작은 강줄기를 따라 산간 지방으로 계속하여 올라간다. 양옆으로 산들이 높아지는 것을 보니 구름 속에 가려진 높게 솟은 산을 넘으려나보다. 깊은 계곡을 긴 다리로 연결하고 터널을 뚫어 깊은 산중을 통과하는 고속도로는 건설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나보다. 버스는 PARMA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를 따라 계속 달린다. 강원도 한계령정도의 구비구비 높은 산을 올랐다가 내려간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도 초지를 가꾸고 양을 치나보다. 이곳역시 그림 같은 집이 있는가 하면 허름한 농가도 보인다.
밀라노 시내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부터 가이드는 밀라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로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로, 19세기 후반부터는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곳으로 전세계 패션의 메카이자 이탈리아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이다. 밀라노가 313년 메디오리눔(Mediolanum)이란 도시로 서로마제국의 수도로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곳으로 유명하다.
밀라노를 지배했던 스포르자 가문의 성 :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
밀라노는 374년에 성(聖)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 대주교가 되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대주교의 영향력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대주교들은 밀라노를 아름다운 건물들로 장식했는데 5~6세기 훈족·고트족의 침입으로 시가지가 파괴되고, 다시 랑고바르드족의 의해 점령되기도 했으나 샤를마뉴 대제 무렵부터는 밀라노 대주교의 권력이 강대해지고, 전란을 피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밀라노로 몰려드는 인구도 증가하여, 11세기에는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277년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은 비스콘티 가(家)가 밀라노의 영주가 되어 오랜 기간 밀라노에 통치하였는데 비스콘티 가의 장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영주가 되어 스포르차 가의 지배가 지속되다 1535년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동안 대성당의 건축이 진척되고 운하가 개통되는 한편,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을 비롯한 문인·예술가들이 이 도시에 모여들어 밀라노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수도로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경제·문화·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할을 했으며 밀라노 시민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또한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특성을 들어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했으나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 데에는 로마의 역사적·신화적 상징성,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라노 패션쇼로 유명한 밀라노는 패션뿐만 아니라 음식, 오페라,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도 유명하다. 한편으로, 밀라노는 쇼핑하지 않아도 쇼핑한 듯한 느낌을 주며, 뉴욕이나 도쿄와는 다른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다.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로마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실 경제를 쥐었다 폈다 하는 힘을 갖춘 도시가 바로 밀라노이다.」
밀라노 시내를 운행하는 전차
밀라노에서 버스가 정차한 곳은 스칼라 극장 건너편이다. 버스는 이곳에 주차할 곳이 없어 우리를 내려주고 이내 어디론가 간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을 다녀 봐도 도시 교통문제는 심각해 관광버스 주차장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시내 진입도 못하게 하는 도시도 많으며 좁은 도로 양편으로 승용차들이 주차해 있고 전차가 함께 도로를 다니고 있어 교통난을 가중시키는 것 같다. 밀라노 시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하여 전차 운행 폐지를 위해 시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시민들이 존치를 원해 계속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스칼라 극장
먼저 스칼라극장 건너편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이 있는 스칼라 광장으로 가 가로등이 사이로 스칼라 극장을 바라본다. 빈의 오페라 하우스와 더불어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인 스칼라 극장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오페라극장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하나로 1778년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교회 자리에 세운 것으로 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어 현재는 복원된 모습이다. 1800년대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시니, 푸치니, 베르디 등의 작품을 올렸으며 항간에 한국 사람을 잘 발탁하지 않는다는 리카르도 무티가 오랫동안 음악감독으로 있던 곳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조수미와 김동규가 이곳에서 공연했다고 하는데 유럽 최고의 성악가들이 공연하는 곳이며 단 한 번이라도 이 무대에 서본 적이 있는 성악가라면 항상 그의 경력 맨 처음에 스칼라 공연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권위 있는 극장이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각상
스칼라 극장에서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로 향하는 스칼라 광장에는 천재적인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각상과 그의 제자 4명(베르나르디노 콘티, 살라이, 체사레 세스토, 잠페트리노)의 조각상이 있다. 다빈치가 위에서 제자들을 굽어보고 있고 제자들은 당당한 모습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모습으로 서 있다.
두오모 광장에서 본 엠마뉴엘레 2세 겔러리아
엠마뉴엘레 2세 겔러리아 중앙 돔 벽화
엠마뉴엘레 2세 겔러리아 명품 샾
엠마뉴엘레 2세 겔러리아는 1877년 이탈리아의 통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아케이드형 쇼핑몰이다. 천장은 돔형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닥은 모자이크 장식으로 되어있다. 유리로 이어진 지붕 아래로 다양한 명품 숍들을 볼 수 있다. 천정 부근의 프레스코화는 각각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미국을 나타낸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명품 프라다 본점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갤러리는 두오모 광장(Piazza Duomo)과 스칼라 광장(Piazza della Scala)을 연결해주는 교차로 역할을 하는, 밀라노의 중심 쇼핑몰로 쥬세페 멘고노가 파리와 런던에 있는 건축물들을 보고 영향을 받아 지었으며 지금은 고급 상점과 커피숍이 가득하다. 이 갤러리에는 고급 쇼핑 가게, 7성급 호텔, 레스토랑, 바 등이 많은데 얼마 전 이탈리아 TV에서 이 갤러리에 있는 갑비아노(Gabbiano)라는 바(bar)에서 동양인이 주문을 할 때와 현지인이 주문을 할 때 서로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모습을 방영한 적이 있다. 즉, 동양인이 사 먹으면 거의 갑절의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비싼 메뉴판을 보고도 원래 그러려니 하면서 음식이나 기타 물건을 주문하지만 이탈리아의 어떤 양심 없는 상점에서는 내국인용 메뉴판과 외국인, 특히 동양인용 메뉴판을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곳은 대도시의 몇몇 가게들에 한하겠지만, 더욱 안타까운 점은 여행객들은 비싸다고 생각만 하지 자기가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이탈리아식 바가지다. 하지만 찾아낼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신화 모자이크
황소 모자이크
갤러리아 중앙 사거리 바닥에는 이탈리아 건국신화에 나오는 로물레스와 레무스가 늑대 젖을 먹는 모자이크와 황소 모자이크가 있는데 특별히 황소 모자이크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 황소 모자이크는 발 뒷굼치로 황소의 중요부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세 번 돌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해 너도 나도 재미삼아 돌아본다.
두오모 광장
겔러리아를 나와 두오모광장으로 간다. 두오모광장 주변에는 스칼라극장부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갤러리, 그리고 각종 상점까지 즐비하며 현대적인 백화점들이 모여 있는 밀라노의 중심가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이 두오모 광장에선 각종 시위와 집회가 열리는데 60년대 말에는 매일 시위와 집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현재 이 광장은 밀라노의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라만테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 광장을 중심으로 그들의 예술적인 감성을 키워 나갔다고 한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마 동상
두오모 광장 중앙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말 위에 올라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모습을 한 기마 동상에서 포스가 느껴진다. 광장을 가득메운 비둘기들은 이곳 동상이 비둘기들의 놀이터이고 쉼터인듯 제멋대로 날아다니다 동상 아무 곳에나 앉아 쉬고 실례도 한다.
밀라노 두오모(대성당)
밀라노 두오모는 1386년 밀라노공 비스콘티 공작의 지시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해서 500여년에 걸쳐 완성된 그야말로 대성당이다. 밀라노의 상징인 Duomo di Milano(두오모 대성당)은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통하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135개의 첨탑과 2245개의 조각상들로 장식된 흰 대리석의 외관은 너무 장엄하고 화려해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오모(Duomo)란 원래는 둥근 지붕을 뜻하는 돔을 의미하는데 유럽에서는 돔이 없는 곳도 두오모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대부분의 성당이 돔 형태로 지어지다 보니 결론은 성당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대주교가 있는 곳을 두오모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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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와 성 암브로시오의 일화를 담은 부조 작품
대성당 입구 청동문은 성모 마리아와 성 암브로시오의 일화를 담은 부조 작품으로 유명하다. 밀라노 대성당에는 대주교 암브로시오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당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킨 시민들에 대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잔혹하게 처벌을 가하자 그 후 황제가 대성당에 참배하러 오자 대주교는 문을 막고 서서 '황제의 손이 백성의 피로 더럽혀졌으니 시민들에게 보상을 할 때까지 참배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황제의 권력보다 교회의 권위가 더욱 강했던 중세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성당 정면에 5개의 문 중 중앙문은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중앙 문 전체를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줬다는 천국의 열쇠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청동문 위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솜씨로 성경에 나오는 일화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아래 부분에 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채찍질 당하는 장면에서 채찍질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으면 만병통치된다는 속설이 있어 다리부분이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반들반들하다. 특이한 것은 이 성당에 있는 모든 문은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데 이는 교회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왼쪽 문에는 "고생도 잠깐이다.“ 오른쪽 문에는 "모든 영화도 잠깐이다." 가운데 큰 현관문에는 "다만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라 써 있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첨탑
첨탑 위의 조각품
바티칸의 성 베드로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독일의 퀼른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라 한다. 마치 숲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에 135개의 첨탑 하나하나마다 조각품을 올려놓아 그 수가 무려 3천 개 정도에 이른다. 성당 내부에는 100m 높이의 유리 첨탑이 하늘로 치솟아 있고, 천정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다. 특히.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135개의 탑 하나하나의 정상에는 성인의 상이 장식되어 있고 그 중심인 109m의 탑에는 황금의 마리아 상이 우뚝 솟아 영험한 기운을 전해준다. 그 황금빛 찬란한 아래 부분에 예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고 하나 내 능력으로는 확인이 불가하다.
'장미의 창'이라 불리는 대성당의 창
'장미의 창'이라 불리는 성당 창인데 섬세한 디테일과 미려한 곡선이 압권으로 고딕의 날카로운 이미지가 여기선 한결 수그러져 보인다.
대성당 스테인글라스(2006년 여행시 사진)
중세 유럽의 미술은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지속되었는데 좀 더 정확히는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해 초기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이라고 칭하던 뽀쪽한 첨탑의 고딕 양식 성당을 지어 자신들의 신앙심을 아낌없이 표현했다고 한다. 신의 손가락인 뾰족한 첨탑과 웅장한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높은 천장 그리고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천국을 향한 열정을 표현한 것이며 성당 벽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도록 성경 이야기를 조각해 두었고 벽면에는 구약의 이야기들로 수많은 벽화들을 채워 넣어 신의 이야기를 대신했다고 하는데 결국 고딕 양식은 신을 위한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었던 것 같다.
대성당을 배경으로 와이프와 한 컷
주마간산 격으로 밀라노를 돌아 본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