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엔 가치가 있다
백 암 / 노 대 전
나의 고향은 전남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학송 부락이다.
봄이 오면 장다리 꽃 피고 여름이면 넓은 들녘에 보리가 익어 푸른 초원은 들바람에 물결치듯 춤을 춘다.
수확의 계절 가을엔 푸른 초원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풍년을 자랑하는 넉넉함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 내 고향의 모습이다.
방문(房門)만 열면 바라보이는 월출산, 태산봉이 약 2.5km 거리에 있어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 추억의 길이 있다,
저수지 뚝에는 항상 낚시꾼들이 몰려와 즐기던 곳으로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줄지어 서있는 곳으로 낚시꾼들과 관광객들로 분비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나의 출생
좋으신 부모님과 모범가정으로 알려진 집안에서 난 우량아로 태어났다.
그런데 1951년 갑자기 하지기능마비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어서 손을 짚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의원이 있다는 곳마다 나를 등에 업고 천안 목포 국내에 있는 의원이라면 그 어디까지 찾아 다녔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몸은 고쳐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 외에 여러 가지로 바쁘신 중에도 나를 낫게 해 주려고 의원을 찾아다녔다. 손발이 다 닳도록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면서 계란 한 줄이라도 더 팔려고, 계란하나라도 아끼면서 근검절약하고 고생하시어 모은 돈을 의원비와 약값에 많이 사용했고 물심양면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재활의사이시며 스승님이신 아버지
나 역시 어린 나이에 많은 약을 먹으면서 침을 동시에 30개 이상까지 온몸에 꽂았다. 그 고통이란 말 할 수 없었지만 나아보려 참고 참아 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집 마루 양쪽기둥에 손으로 잡고 일어 서서 운동을 하라고 운동틀을 만들어주셨다. 잠을 잘 때면 발을 바르게 펴고 잠자라고 바로 잡아 주었고. 바르게 앉지 못하니까 바르게 앉으라고 허리를 펴주시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는 재활의사이자 스승님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가지 못하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경위적이고 도의적이며 양심을 지키면서 매사를 긍정적이고 합리적으로 항상 좋은 인상을 보이며 호의를 베풀고 가급적이면 가치 있게 살아가야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지 그 어디에 몸을 담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씀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동네아이들을 불러 구슬치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연날리기 등의 놀이를 같이 하도록 배려해 주어서, 많은 놀이들을 즐기고 놀았지만 발로하는 공차기나 재기차기 등등 뛰어 다니며 하는 놀이들은 해보지 못했다. 나가 놀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같이 놀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주셨고 재활의 의지를 길러 주셨다.
친구들은 학교 갈 나이가 되어 학교에 갔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500미터쯤 되는데도 나는 갈수 없었다. 업어다 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내 주변엔 모두 바빠서 그렇게 해 주지 못했다. 10 살까지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불편한 몸으로 집 밖를 돌아다녔지만 10 살이 지나서부터는 사람이 저 앞에 보이면 사람이 지나간 뒤에 움직이고 다녔다. 그리고 아예 밖에 나가지 않고 혼자 외롭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사실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는데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가 아프고 싶어서 아프겠는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은 내 생각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서 숨 쉬는데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움직이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부모님를 돕는 아들이 되자
부모님께서 너무 바쁘신 생활을 하셔서 밖에도 나가볼 겸 논두렁 밭두렁에 풀베기를 해놓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불편한 몸으로 일한 아들에게 집에서 집이나 잘 보지 하면서도 풀을 거둬 와서 소 돼지 풀도 먹였다. 아버지께서 풀을 많이 베어오면 내가 쇠여물을 썰어서 쇠죽도 써서 퍼 주기도 했었다. 한번은 보리논에서 풀을 베고 있는데 내 등속으로 차디차고 크나큰 길 다란 무엇이 들어와서 등살을 타고 돌아다녀서 당황해가지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보리밭에서 혼자 뒹굴뒹굴 궁굴고 나니까, 등속에서 빠져나가 줘서 잃어나 정신 차리고 보니까 크나큰 꽃뱀이 기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 뱀이 물지는 않고 등속에서 빠져나가줘서 다행이었다.
그런 후로는 보리 논밭에서 풀베기를 무서워서 하지 않았다. 참외밭에 참외 씨를 심기도 했고 가을이면 벼 논가에서 대나무로 흙을 파서 던지며 새보기도 했었고 밭에서 강낭콩 나무를 뽑아 오시면 앉아서 콩 따고 목화밭에서 목화나무를 뽑아 오시면 목화를 티 끝 하나 없이 따기도 했다. 왕골논에서 왕골을 베어오시면 껍질을 벗기고, 벼 집으로 세끼를 꼬아서 꼴망태도 만들고 부엌에 어머니방석도 만들어드렸다. 걸을 수는 없었지만 내 나름대로 토끼도 키워보고 안 해 본 일이 없이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드렸다.
힘은 들지만 부모님의 일을 돕는 일에 스스로 만족해 하고 부모님의 짐이 되지 않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한문 공부를 시작하다
아들의 장래가 걱정 되었는지 12살 때 외가 집에 한문선생님을 모셔서 서당 방이 있다고 나를 그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곳에서 겨울 한철 한문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더 많은 공부를 해서 한의약의서를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2년 동안 습진 병에 심하게 걸려서 배웠던 글도 잊어먹었다. 다시 15세 때 아버지께서 한문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서 겨울 한철 동안을 동네사람들과 다시 배우게 해주었다. 한글도 잘 모르고 한문공부에 뛰어들어 한문을 배우면서 한글을 좀 더 알게 되었지만, 모두 다 서툴기만 하다.
기술을 배워야 좋을 거라고 걱정들 하시었다. 혼자 있을 때 라디오 뉴스와 노래를 좋아해서 12세 때부터 대중가요 트로트를 많이 듣고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가 좋다 하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을 들으면 더 열심히 불렀다.
음악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며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기원을 할까 해서 바둑책도 읽어보았고 생산양계 책도 사다주시며 읽어보라 하셨다. 무엇인가 내가 할 일을 계획해야만 했다
부모님도 나도 같은 생각으로 수시로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집 밖을 나갔다가 더워서 집으로 들어와서 머슴 사랑방에 시원하게 누워있는데 벽에 도배되어있는 신문지에, 라디오 텔레비젼 기술 강의록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여서 가까이 다가가 작은 글자를 읽어보았다.
책이 12권인데 6개월 동안 공부하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기록되었기에 부모님께 책값을 말씀드려서 송금하여 보내온 책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전문용어이므로 너무 어려워 이해를 못하니까 책만 보면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이 기술을 배워야한다 생각하고 참고 해 보았지만 기술을 배우려면 실습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런 환경이 아니고, 책을 읽고 이해 할 수 있는 기초 실력은 있어야 되는데, 더 이상 할 수가 없겠기에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양쪽 목발을 사 오셨다.
부축해주기에 연습하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다가 겨우 한발씩 걷기 시작했다. 50미터~100미터만큼을 16세 때서야 양쪽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18세 되던 해 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누가 어디에 명의원이 있다하면 나를 등에 업고 찾아다녔다.
그때는 나 자신이 내 몸은 너무 불편이 심한상태여서 고칠 수 없는 몸으로 생각하고 아버지께 저는 이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누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아버지께서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포기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그러나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희망도 없고, 너무 힘들고 슬펐을 때 순간적으로 극단의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버렸다.
불가능이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친구 분께서 라디오 텔레비젼 기술 개인지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중형님께서 친구에게 나를 개인지도를 부탁해 주셔서 3년간 잠자는 방도 없이 마루판자에서 자고 겨울이면 담요 깔고 이불 덮고 잠을 자며 기술을 베우기 시작했다. 혈이 부족한 발에 동상이 심하게 걸려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참고 밤이면 콩으로 발을 감싸고 찬물에 담그고 혼자 발을 주무르고 견뎌내며 배워서 나로서는 꿈속에나 있었던 내가 원했던 기술을 드디어 마스터하였다. 나에게도 불가능이란 없구나하는 것을 발견하여 새 힘을 얻게 되었었다. 내손으로 라디오, 전축, 확성기를 직접 제작하고 가전제품 고장수리까지 하면서 고장난 가전제품이 내손을 거치면 안되는 것이 없었다.
의원들이 내 몸은 고치지 못했지만 나는 고장이 난 가전제품을 모두 고칠 수 있어서 자부심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었다.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전자기계도 회로를 보면 원리가 사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미리 생각이나 준비 없이 힘들이지 않고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글을 쓰게 된 동기는 크게 성공을 해서 자랑거리가 있어서 알리기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참고 견디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나, 그 가족 독자여러분 주변에 참으로 어렵게 생활하시는 분이 있다면 마음의 위안이 되고, 꿈과 용기를 내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삶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보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서투른 글이지만 그냥 묻어만 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전해 드리려고 시작햇던 것이다.
세상사 모를 일이요!
우리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만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학문과 지식은 부족한 것이 많지만 한 많고 서럽게 살아오면서도 세상의 중심은 내 마음에 있으니까 내 마음에 철 기둥을 세워 놓고 중심을 잡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모질게 생활을 해 오면서도, 나름대로 끝까지 사람이 지켜야하는 가치는 지키고 생활해 왔기에 어느 누구 앞에서도 고개 들고 말할 수 있다.
기쁠 때 많이 웃어도 보았고 슬플 때 울어도 보았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는 가슴속살을 베어낸 것처럼 아프고 쓰린 순간들도 있었고,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을 느낄 때도 있다. 내 사연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고 글로써 다 쓸 수 있겠는가! 단 한분이라도 마음에 위안이 되고 마음의 양식이 되어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면 필자는 더 바램이 없겠다.
희망을 주는 나의 글이 되기를 --
자신이 자신을 버리면 누가 구해 주겠는가?
자신을 자신이 버리면 그 누구도 구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들 때는 옆에 누가 없는 것이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 것이다. 그런데 고학력 시대에서 지식이 풍부하고 다 잘나고 똑똑하다는 사람은 많은데 도덕심은 오래 전부터 땅에 떨어져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변명과 거짓으로 빠져나갈 방법만 찾으면서 기자들 질문에는 어쩌면 그리도 천편이 하나같이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하고 들어가서는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과는 다르게 거짓진술로 오히려 죄를 더 짓고 나오는 것인지... 유능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자격 있고 귀하신 몸들이 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던지는가? 순간 잘못 생각하는 마음으로 극단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부가 처음으로 자살 사망자 부검결과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연간 1만 3천명” 그중에 질병환자도 있었지만 “OECD 국가 평균보다 2.5배나 더 높다”고 했다. 발표 후 1~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월 1천명 이상 자살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더 큰 죄를 짓는다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이며, 본인의 가족과 일가친척 지인들, 그리고 우리사회에 나쁜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아주 큰 죄악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런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를 좋은 곳에 살아가는 데에 써야 할 것이다!!
삶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사람은 또한 가치성 있게 살아가야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오늘을 감사할 줄 알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성실히 자기 책임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작은 것에 충실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가면서 하나의 보람과 긍지를 갖고 산다면 행복은 스스로 우리 것이 될 것이다.
가정이 행복하고 사회가 행복하면 국가도 든든한 국가로 바로 서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
책임을 다하자!
작은 일에 충실하자!
항상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자!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과 부모님을 사랑하며 나라사랑까지 길러진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어 갈 것이다.
위의 글을 쓸 수 있게 용기를 주신 빛고을 노인건강타운 문학반 이명란 선생님께 먼저 감사한 마음을 올립니다.
배려와 따뜻한 마음으로 항상 그립고 보고싶은 회원님들 고마움을 전합니다
새로운 용기로 펜을 들어 나의 지나온 흔적들을 적을 수 있게 용기를 주신 여러 회원님들의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백암이라는 호를 지어주신 누님, 사랑을 베풀어 주신 누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7월 4일 휴대폰:010-4613-4566
|
첫댓글 백암선생님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좌절하지 않으시고 끈기있게 노력하셔 좋은 기술을
습득하셔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오신 선생님 ! 그렇게 좋은 성품으로 살으시며 나라에 기여하신 공이 참으로 크십니다.
인사가 늦었는데요 저 마술사 박춘자입니다. 선생님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