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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끝에 서면 보이는 것들>의 줄거리: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가면 낭떠러지라는 일반의 생각을 뚫고 지중해의 서쪽 끝에 섰을 때 콜럼부스는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은 세상 안에서 살아도 마음이 서 있는 지점은 세상 끝이라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세상 끝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세상 끝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못 본 채로는 세상 속의 삶조차 늪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 끝에 서면 보이는 것들
(마태복음 13:47~50)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끝에 서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끝에 서면 보이는 것들’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비유와 관련해서 상식처럼 회자되고 있는 오해를 걷어내고자 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천국은 그물과 같다는 내용입니다. 천국이 고기를 잡는 주체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들 그물을 교회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그물 안에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섞여있다는 내용이 교회현실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 즉 예배당조직에는 갖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비유의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천국이 그물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교회는 그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물 속에 잡힌 고기들 중에서 좋은 고기들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까이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점으로 삼아 모든 사람은 천국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 중에서 천국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한 자들만이 교회가 됩니다. 이처럼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이 교회 생성의 계기이며 근거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온 천국 자체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가까이 온 천국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 전체입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또한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지침으로 삼도록 말씀하신 것도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내용이고 비유도 다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시고 전도하셨습니다. 천국이라는 이름, 천국이 있다는 사실, 천국의 좋음, 천국 가는 길로써 죽음 부활 승천의 길을 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성령님, 천군천사의 존재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 등과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천국의 좋음을 강하게 느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천국이 그물이란 천국에 대한 언어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게 됩니다. 천국에 대한 언어들이 세상에 유포될 때에 이 말씀을 붙잡는 자들이 그물에 잡힌 물고기로 비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살펴보게 될 비유의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비유가 오늘 본문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구약의 모세율법을 기록한 성경을 보관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였고 그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면 천국과 관련된 언어에 종사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비유로 삼아 말씀하시게 된 이유가 바로 천국이 사용하는 그물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물 속에는 좋은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닌 못된 고기도 섞여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내일 종말이 와서 예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의 75억 인구 중에 한 20억 명은 천국에 관련된 언어를 알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정통 개신교에 속한 사람도 있고 가톨릭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고 이단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단까지 포함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도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천국에 관한 언어들을 입에 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은 세상에서 살아가던 75억 인구 전체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천국의 언어를 접한 20억을 제외한 나머지 55억은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원죄를 유전 죄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심판의 내용이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애초에 그물 속에 잡힌 고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국과 관련된 언어라는 그물에 잡힌 20억 명입니다. 심판은 이들에 대해 이루어집니다.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가려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기준은 앞서 나타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좋은 물고기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와 같이 천국의 좋음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또 좋은 물고기는 천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극히 값진 진주와 같이 탐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좋은 고기가 되고자 한다면 천국의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대상들 중에서 좋음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젖혀두고 천국의 좋음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을 탐내고 영입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좋은 고기로써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입으로 천국에 관련된 언어를 말할 뿐만 아니라 그 언어들이 가리키는 천국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반면 못된 물고기는 천국에 관련된 언어를 입에는 담았지만 천국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서 좋음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의 상식선에서 생각해도 천국의 좋음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좋음을 찾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양심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49~50절에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못된 고기로 비유된 사람들은 입으로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과 성령님도 부릅니다. 천국에 천군천사가 있음도 알고 천국에 가면 영생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기에 천국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전혀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좋음을 찾고자 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 마음과 삶의 모습이 어긋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금을 모으지 결코 납이나 구리를 모으지 않습니다. 반대로 돌덩이를 모으면서도 입으로는 다이아몬드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과 삶이 일치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난히 천국에 대해서만은 마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자면 세상은 돌덩이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따져볼 수 있는 자들이 마음으로는 금 대신에 돌덩이인 세상을 선택하며 좋아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힌트가 49절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세상 끝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언어를 입에 담지만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 등의 가치들을 좋게 여긴다면 마음에서 세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목회자라할지라도 마음에서 수백억의 예배당이 좋게 느껴진다면 세상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가까이 온 천국을 실감하며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큰 예배당이 아닙니다. 큰 예배당은 고사하고 예배당 건물 자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다녀야 할 곳은 큰 예배당이 아닙니다. 상가에 있는 조그만 예배당이라도 십자가를 생활화하자는 말씀이 전파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천국에 관한 언어가 전파되고 있을지라도 그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수백억짜리 예배당에 사로잡혀있다면 결코 천국의 좋음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천국을 핑계 삼아 교인들의 고혈을 짜내 예배당을 지어야만 했다면 그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제직들은 모두 못된 물고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의 좋음을 느낀다면 그런 예배당을 필요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임금 삼으려고 했을 때에도 그들을 피하셨던 것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천국이 다이아몬드였다면 세상에서 임금 되는 것조차 돌덩어리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못된 물고기임을 자청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차라리 천국에 관련된 언어를 입에 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많은 사람들이 못된 물고기로써 세상의 끝을 보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사방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이어집니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바다도 끝나지 않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원이나 마을이 보이지 않으면 사막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다른 세계가 보여야 기존의 세계는 끝이 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천국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천국을 볼 때에 세상이 끝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사람이 바다가 끝이 없음을 느끼다가 육지를 발견할 때에 끝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져오신 이유는 천국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육지와 바다가 접해있듯이 세상과 접해있습니다. 천국을 봄으로써 세상은 끝이 나게 됩니다.
못된 물고기는 세상의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끝내시려고 천국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천국을 가까이 가지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기에 인위적으로 세상을 끝내시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천국을 볼 수만 있다면 마음에서 세상은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강제로 이루어진다면 결코 인격적인 믿음은 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표현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선택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남녀 둘만 있다면 이들이 부부로 살아가더라도 인격적인 사랑의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또 완벽한 이상형을 만났을 때에 사로잡힌다면 그 또한 인격적이고 선택적인 사랑의 결과도 아닐 것입니다. 천국의 모습을 모두가 알 수 있게 드러난다면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무지개 보석 빛으로 밖에는 묘사될 수 없는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인격적 사랑이 아닌 사로잡힘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마련하신 길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세상의 끝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천국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모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것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을 통해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좋음을 느끼게 하는 대상들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한다면 세상의 끝은 찾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세상의 끝이 십자가로 이루어지면 비로소 가까이 온 천국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볼 때에 천국의 좋음 또한 느끼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좋음을 느끼는 것은 스위치를 켜듯 한 순간에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몸을 입고 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에 마음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세상의 끝을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세상의 끝을 만들 때에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이를 날마다 반복하는 동안에 천국의 좋음은 조금씩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좋음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세상에 대해 죽는 일 또한 확장되고 깊어지고 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좋은 물고기로 되어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정리해봅니다.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마음으로 천국과 관련된 언어를 붙잡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나마 깨닫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천국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황홀경에 빠졌던 것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또한 천국을 느낄 때에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겼던 모든 일들이 휴지조각처럼 될 것임을 아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나누어지는 믿음의 길이 시작됩니다.
못된 물고기는 천국이 좋다는 논리를 알면서도 마음에서는 세상에서 좋음을 느끼고 묵인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관련된 모든 언어들을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킵니다. 복음을 종교로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천국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분류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국을 세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못된 물고기들은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좋은 물고기는 천국에 관련된 언어를 입에 담고 믿음을 통해 마음으로 천국을 그리워하게 된 자들입니다. “나도 베드로처럼 천국을 느낀다면 지금까지 좋다고 여기던 일들이나 싫어하던 일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겠구나. 천국의 좋음 앞에서 세상의 가치는 속임수에 불과했구나.”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육체를 입고 살기에 마음은 세상에 끌려가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인위적으로 세상의 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상의 끝을 만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조금씩 천국의 좋음은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좋음이 느껴지면서 점점 천국 안으로 들어가면 연합이 강화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끝에 서서 천국을 볼 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내 삶에 하나님의 명령권이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위적으로 세상을 끝내기 위해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사역입니다. 백방으로 이 십자가를 활용함으로써 세상 끝을 만들어내고 세상 끝에 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위로는 천국의 좋음을 오늘 하루만큼 더 느끼고 아래로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명령권이 작동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인위적으로 세상 끝을 만들어냄으로 천국을 보게 하시며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천국(=그물)은 예수님이고 바다는 세상(=혼돈 공허 암흑)입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예수 그물에 잡힌 물고기는 신자들입니다.
천국의 출구에서 그릇에 담기는 물고기와 버려지는 물고기의 차이는? [욕동]입니다. 바다를 기뻐하고 바다를 그리워하는 물고기는 영원한 다시 바다(혼돈 공허 암흑)로 보내집니다. 예수님을 기뻐하는 물고기는 천국의 그릇에 담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