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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연결되는 현장믿음>의 줄거리:
믿음은 예배당 건물 안에서의 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의 일입니다. 믿음을 인디안 보호구역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즉 믿음은 우리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어디든 언제든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삶의 현장에서 능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이 현장믿음은 그 실제내용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연결되는 현장믿음
(마가복음 9:14~24)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현장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현장믿음’
언제부터인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제 마음에 거부반응이 들게 되었습니다.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부르는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니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일요일만이 주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모든 요일은 주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제 욕심을 말해보자면 고난주간과 사순절기간과 부활주일 절기도 없애야 된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또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매 순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놓고 일주일 중 하루만 따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고난주간이나 부활주일 같은 절기를 지키면서 일어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일 년 365일 이루어져야만 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라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과 복음이 예배당에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은 일요일 하루에 갇혀버렸고, 부활도 부활절에 갇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신앙의 사건은 절기라는 형식적 행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형식화의 문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막는다는 점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24시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형식화되면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염두에 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신앙에 필요한 충분조건이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삶의 현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좋으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산 아래의 인간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좋으심이 극한에 치달았습니다.
한편 변화산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에 산 아래에 남은 제자들에게는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서기관들은 이를 트집 잡아 예수님의 사역을 괄시합니다. 당장 귀신을 쫓을 수 없었던 제자들은 수세에 몰려있었습니다. 이때에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9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믿음이 없었고 서기관들도 믿음이 없었으며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도 믿음이 없었고 이 사건을 구경하던 군중들도 믿음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보시고자 하셨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귀신아 물러가라!”고 확신하면서 공개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믿음으로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을 이루고자 하는 특별한 마음가짐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염두에 두고 “언제 어디서든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믿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다면 믿음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부분은 귀신을 쫓는 것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이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일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정리해봅니다. 귀신이 쫓겨나갈 것을 믿음으로써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신을 쫓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믿음이란 병이 고쳐진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병든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베푸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병 고치는 힘이나 귀신을 쫓는 힘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능력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오해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상황에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에게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는 말씀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다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연결이란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귀신이 쫓겨나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예수님 뿐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으로 보고 느끼는 상태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입니다.
19절의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여기 귀신들린 소년이 있는 현장에서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너희는 귀신들린 소년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첫 번째 현실로 삼고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기회를 틈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소년은 방치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어쩔 줄을 모른 채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로 삼았던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지 못해서 연결을 이룰 수 없으니 하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주어질 수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 문제를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마음에서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마치 끊어진 전화에 대고 말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놓고 하나님을 찾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문제를 현실로 삼는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문제를 우선시하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어버립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 찾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는 문제도 많고 할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잣집에 시집 간 며느리가 시부모님은 무시하고 시부모님의 재산만 누리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문제와 연결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만을 받아서 해결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아야 되는 이유는 변화산 사건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진짜 좋음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채움을 주는 대상은 하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의 첫 번째 현실이 되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의 마음은 채움을 추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 채움이 이루어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모든 사람은 이 기쁨의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온전히 채우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비어있는 마음을 세상에 있는 것으로 채우고자 시도합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이 우선적인 현실이 되셔야만 하는 이유는 문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도 궁극적으로 마음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에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주 잠깐 동안은 기쁘고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1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실제로 1억이 생기면 당장은 엄청나게 기쁠 것입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면 이 기쁨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마음이 채워져서 생겨난 기쁨이 아닌 바람이 이루어져서 생겨난 착각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무엇이 생기면 좋겠다고 여기는 동안에 진짜 좋으신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사로잡혔기에 믿음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좋으심이 얼마나 컸는지 인간세상에서 침을 흘리며 추구했던 어떤 가치도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5절에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한 번 맛보고 나면 더 이상 인간세상의 어떤 대상도 좋게 여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변화산 사건은 모델하우스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은 우리의 육체의 감각에 대해 가려져 있었지만 변화산 사건을 통해 그 좋으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느끼고 분양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산 위에서는 육체의 감각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인격적인 믿음이 나타날 수는 없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사로잡혔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우리와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좋으심은 육체적 감각에 대해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감각으로 느꼈던 그 좋으심을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서 첫 번째 현실이 되십니다.
1억만 있으면 돈 문제가 다 해결되고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음의 문제는 1억이 생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결국 돈을 구하지 못해서 사업이 망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숨통이 막히는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1억이 다급한 상황에서 믿음은 발휘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1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에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1억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로부터 23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음을 믿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정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이 1억을 주실 것임을 믿으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설령 1억이 생겨서 돈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있는 좋음의 문제는 해결 될 수가 없습니다. 좋음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는 내 앞에 놓인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로 이관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독특한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 되심을 알고 눈앞의 문제보다 하나님을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과 연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나가시기 때문에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삶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설악산을 서쪽으로 옮기는 일조차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설악산을 옮기실 뜻이 없으시기에 일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에게는 해를 멈추는 일도 가능합니다. 내일이라도 남북통일을 이루는 일도 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연결이 되면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곧 세상의 모든 성취로부터의 자유로움입니다. 세상일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겠다고 “1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하고 “새벽형 인간”이 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로부터 시작되는 삶은 하나님이 해나가시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 대해서는 놀고먹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만은 애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 죄의 체질입니다. 이 유전 죄는 끈질기게 세상을 추구하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저것을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억만 있으면 좋겠다, 몸이 건강하면 좋겠다, 자녀가 서울대에 가면 좋겠다,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라의 경제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등 유전 죄는 우리의 마음에 수없이 많은 “좋겠다”를 만들며 마음을 땅으로 끌고 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좋으심이 되실 수 있는데 자꾸 다른 것이 좋겠다고 믿게 하는 것이 곧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억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1억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서울대가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좋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세상을 향하여 좋겠다는 마음이 나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몸의 면역력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병균이 침투한 것입니다. 그 때마다 십자가를 면역으로 삼아 좋겠다는 이름의 병균을 죽여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지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유전 죄를 물리치기 위해서 계속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마음을 연결시켜 나갈 것입니다.
십자가를 계속 바라볼 때에 세상에 대해 좋겠다는 마음은 죽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좋음이라는 믿음은 표현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첫 번째 현실이 되고 연결되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만 이루어지면 내 앞에 놓여있는 문제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뜻과 능력과 섭리로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에 마음의 시선을 두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가 유일하게 해야 될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을 향해 좋겠다는 마음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시고 세상의 모든 문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진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