豚蹄一酒(돈제일주)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골계열전(滑稽列傳)에는 절대왕정 시대에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기지와 재치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지혜로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골계란 익살스러울 골(滑), 헤아릴 계(稽)로서 풍자를 통해 생각하게 한다는 뜻이다.
왕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자칫 목숨이 날아가기도 하던 살벌한 시대였지만
지혜와 유머가 있는 신하와 그런 신하를 둔 군주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사마천은
‘은미한 말속에도 이치에 맞는 것이 있어 이것으로 얽힌 것을 풀 수 있다’
라고 골계열전 서두에서 말하고 있다.
그 중 순우곤(淳於髡)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순우곤은 제(齊)나라 사람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대접 받지 못하던 데릴사위 출신이었
는데 몸은 왜소하나 익살스럽고 말재주가 뛰어나 유머 넘치는 충언을 하기로 유명했다.
지혜와 익살을 겸비한 순우곤(淳於髡)
초(楚)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나라 위왕(威王)은 순우곤에게
황금 100근, 사두마차 10대를 예물로 가지고 조(趙)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했다.
그러자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는 바람에 그의 갓끈이 모두 끊어졌다.
왕이 그에게 ‘예물이 적다고 생각하오?’라고 묻자 순우곤은 ‘어찌 감히 그러겠습까?’
하고 대답하였고, 왕이 답답하여 ‘그렇다면 웃으며 어찌 그리 기뻐하시오?’하고 물었다.
순우곤이 답하기를, ‘오는 길에 길가에서 풍작을 비는 사람을 보았는데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豚蹄一酒/돈제일주)을 손에 들고 빌기를
<높은 밭에서는 광주리에 넘치고,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차게 오곡이 풍성하게
익어 집 안에 넘쳐나게 해주십시오>라 하기에 신(臣)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처럼 적으면서 원하는 바는 큰 것을 보았기 때문에 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위왕은 처음 제안했던 예물이 너무 쪼잔하게 적은 것을 지적한 것에
뜨끔하여 황금 1,000일(鎰, 1,500근), 백벽(白璧) 10쌍, 사두마차 100대로
예물을 늘려 보냈다.
순우곤이 이 예물을 가지고 조나라에 바치자 조나라 왕은 흡족하여 병사 10만 명과
전차 1,000대를 내주었고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를 쳐들어온 초나라는
밤중에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지혜로운 비유를 통하여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바라는 위왕의 인색한 마음을
지적하고 깨우쳐 준 순우곤과 그의 말에 화를 내거나 벌을 주지 않고
바로 잘못을 고친 위왕의 순우곤에 대한 신뢰,
그로 인해 얻어진 좋은 결과를 이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에도 조선 영조(英祖) 시대 골계적(익살스러운)이면서도 왕의 신뢰를 받은
사람으로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가 있는데 많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헐뜯고 더 큰 상처를 줄까만 생각하는
작금의 세태에 휩쓸린 사람들이 순우곤의 해학과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또한 미미한 제물로 큰 은혜를 바라는 인색한 마음을 풍자한 돈제일주(豚蹄一酒)의
교훈은 충분한 노력이나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남의 것을 얻으려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자성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