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거점으로 구미(數美)전도가 시작됐다
1 그 뒤에 ‘오즐라’에게 영어 원리를 독일어로 번역시켰더니 ‘페이터’의 협조를 받으면서 1년 만에 완료하였다. 이 원고를 들고 ‘오즐라’와 ‘페이터’가 조국 복귀를 위하여 먼저 귀국하고 그 뒤를 이어 ‘파울’ 부처와 그의 아들 ‘클라우스’가 가고 ‘바아 바라’와 ‘엘케’가 그다음 출발하였으니 도합 장년 6명과 청년 1명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2 고집이 세고 지배욕이 강한 독일인 들이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함께 일할 수 없음을 서로가 절감하게 되었다. 또 독일 여자들도 영리한 사람들이라 황소처럼 뿔을 세우고 싸우기만 하는 두 남자 식구들을 보다 못해 각각 떨어져 전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파울’이 오스트리아로 개척지를 잡아 미니버스 한 대를 몰고 ‘빈’으로 떠나갔다.
3 ‘오즐라’는 스페인어를 배워 두었던 관계로 멀리 ‘바르셀로나’로 갔다. 가기 전부터 원리를 스페인어로 번역을 시도했으나 그의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바르셀로나’에 가서 그 나라 사람을 찾아 완성하려고 했지만 그 일이 쉽지 않았는데, 마침 미국에서 자라난 멕시코인인 ‘데이비드 플로레스’가 원리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탈고했던 것을 불행히도 월남전쟁에 가지고 갔다가 폭격을 당하여 손실되고 말았다.
4 1964년도에 첫 번으로 내가 귀국했을 때 전 사라왁 왕이었던 영국인 ‘안토니 부르크’씨를 초청해 갔다. ‘부르크’씨는 한국교회를 방문한 후 일본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도쿄를 들려 간증을 하고 동년 4월 10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도착 시 공항에 마중 나온 식구들에게 ‘이츠 트루, 이츠 올 글로리어슬리 트루(It’s true, it’s all gloriously true)’라고 외쳤다. 그 후 그는 수년간 통일교회와 접촉을 계속하면서 다른 유지 그룹들에게 레버런 선명 문의 이름을 증거했다.
5 선생님과 최원복씨와 나는 1965년 정월, 서울을 떠나 일본서 2주일 체류하였다. 나는 일본서 미리 떠나 서해안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버클리 일대로 와서 선생님을 모실 준비를 했다.
6 드디어 2월 12일 금요일 상오 5시 30분 선생님께서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하심으로써 북미 대륙에 첫발을 디디셨다. 24명의 미국 식구들과 세 사람의 선교사인 박보희, 김상철, 그리고 나, 이렇게 27인이 꽃다발 증정으로 환영했다.
7 이때는 ‘오클랜드’의 ‘마틴’의 집에서 집회를 할 때이므로 그 곳에 체류하시면서 식구들에게 말씀도 하시고, 질문에 대답도 하시고, 그 지방의 명소를 관광하시고 성지택정을 하시기 시작하여 제일 먼저 상항의 ‘트윈픽스’ 쌍봉을 부모봉이라 칭하고 그 중에 높은 봉을 최초의 성지로 축복하셨다. 그것이 2월 15일이었다.
8 그 후 44일 동안 미리 준비해 놓았던 9인승 ‘블루 포드 스테이손 왜건’을 타시고 전국 48주를 순회하시면서 55개 처에 성지를 택정하셨다.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못 갔다. ‘조지 노튼’과 ‘고든 로스’가 번갈아 운전하였고, 최원복씨와 내가 모시고 다녔으며, 플로리다까지 갔을 때 박보희씨가 나와서 워싱턴 D.C까지 동반하였고, 최봉춘씨가 일본에서 도착하여 워싱턴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거기서부터 박보희씨는 떨어지고 최봉춘씨가 일행에 끼었다. 김상철씨가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아이다호’주 ‘몬타나’주 ‘워싱턴’주 그리고 ‘오리건’주까지 동행하였다.
9 내가 미국 선교를 시작했던 ‘오리건’주 ‘유진’에서 맨 마지막 성지를 택하여 축복하시고 다시 서해안 즉 ‘베이 에어리어’로 돌아가서 ‘오클 랜드’에 되돌아감으로 44일의 미국 일주를 끝내셨다.
10 선생님은 부모의 날을 워싱턴 D.C에서 보내시기 위하여 최원복, 최봉춘씨를 대동하고 비행기로 가시고 나는 부모의 날을 서해안 식구들과 지내기 위하여 남아졌다. 그 후에 나는 다시 워싱턴 D.C로 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있다가 선생님의 명에 의하여 1965년 4월 26일에 3개월 비자를 얻어 영국 런던으로 갔다.
11 선생님의 미국 체류는 그 해 7월 1일까지 4개월 반이었다. 그동안 성지택정 이외에 21일 수련을 워싱턴 D.C에서 가지고 여러 차례 식구들을 데리고 말씀하신 것 외에 외부 인사 두 사람을 왕방하셨다. 한 분은 미국의 유명한 입신영매(入神靈媒) ‘아더 포드’를 만났으니 ‘안토니 부르크’계에서 이 길을 열어 주었다. 또 한 분은 전 미국 대통령 ‘드화이트 D. 아이젠하워’를 그의 저택으로 왕방, 담화하신 것이다.
12 선생님은 최원복씨와 최봉춘씨를 대동하시고 먼저 캐나다로 가셨다가 남미의 몇 나라와 포르투갈을 거쳐서 영국 런던으로 오셨다. 나는 먼저 런던에 가서 개척 전도하면서 선생님 일행을 기다렸다가 새로 전도한 9명의 식구와 ‘안토니 부르크’씨가 보내준 리무진으로 선생님 일행을 영접하였다.
13 그 다음 날 런던에서 유명한 공원인 ‘캔싱톤 가든’에 있는 ‘피터 팬’ 동상에서 멀지 않은 땅을 구라파 첫 성지로 택정했다. 7월 20일, 나는 선생님 일행을 모시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갔다가 노르웨이의 오슬로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들려서 서베를린으로 와서 맞아주는 ‘페이터 코흐’ 와 ‘오즐라 슈만’을 만나서 베를린에 성지를 택정하셨다.
14 우리 일행은 7월 28일,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파울 베너’와 그의 아내 ‘크리스텔’ 그의 아들 ‘클라우스’ 그리고 ‘페이터’의 여동생 ‘바아바라 코흐’와 ‘엘케 클라비테르’를 만났으니 이들은 다 미국 서해안에서 전도받고 개척 선교사로 독일에 귀국해 있던 식구들이다. 그 외에 독일서 전도된 일곱 사람의 새 식구들도 선생님을 만났다.
15 이제부터는 우리 일행에 ‘파울 워너’와 ‘페이터 코흐’가 합해져서 구라파 순회 여행을 계속하고 그 후 중동, 아시아를 거쳐 26일 동안의 순회 노정을 동행했다.
16 10월 11일 나는 미국 서해안으로 돌아와서 오클랜드에 머물러 있을 때 최봉춘 선교사가 11월 12일 거기에 도착하였다. 나는 박보희씨의 초청으로 워싱턴 D.C로 가게 되어 최 선교사에게 서해안 책임을 맡겼다.
17 김상철씨는 비자 사정 때문에 ‘유타’주에 가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부지방 식구들을 연락하였다. 이미 미국에 와 있던 일본식구 ‘오누끼 겐지’(大貫健司)와 임연수씨가 같은 해 12월 11일에 서해안으로 가서 최봉춘씨와 합세하였고, 신미식씨가 100일 된 진기군을 데리고 동년, 즉 1965년 12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그의 남편과 합하였다.
18 런던에서는 많은 소단체에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도리스’를 ‘로마’로 보내어 개척을 시켰더니 언어의 장벽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몇 사람을 찾아 놓았기에 그들에게 ‘이태리’를 맡기고 ‘도리스’를 ‘런던’으로 오게 하여 책임을 맡겼더니 언어가 자유로이 통하게 되어 마치 물고기가 바닷물에 들어간 것처럼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 ‘라이너’가 불란서어를 다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있다가 불란서를 복귀하겠다고 ‘파리’로 갔다. 그러나 ‘라이너’도 오래도록 고독한 싸움을 싸우다가 돌아왔다. 그의 불어 실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불란서와 독일이 서로 언제나 원수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두 국민성이 너무나 상충적이어서 전도에 많은 애로가 있었을 것이다.
20 해외에서 개척 전도에 성공하려면 몇 가지 구비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선교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고생을 해도 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니 자연히 힘이 빠지게 되고 만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