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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5
설교 제목: 위올동주(We All 同舟)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6~18
설교를 위한 묵상: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다. 그래서 미국을 용광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10일 전에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연설에서 미국인들이 다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국회의원의 말을 인용했다. 그들은 다양한 나라들에서 온 국민이지만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권력자들의 암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들의 암투가 현장 중계되다 보니 온 국민이 그 싸움에 휘말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국정을 운영하는 관리들의 상호견제로 이해될 수도 있다. 오늘날 그것은 양당제나 또는 다수당으로 운영되는 국회와 유사하며 삼권분립의 정신으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한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국민이 알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양 도성에서 결정된 정책은 결국 전국민에게 영향을 끼쳤다. 국방이나 외교 또는 조세정책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를 운영하는 일은 몇 사람의 대표자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온 국민이 관련된 일이다.
현재 민주주의제도는 대의정치라는 이름으로 운영된다. 그 대리인들은 국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국회의원이며 선출직 공무원과 임명직 공무원이다. 국민들의 정치 참여는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여론조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국민들의 의견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래서 여론의 방향을 결정하는 언론이 중요하다. 그런데 흔히 레거시 미디어라고 부르는 기존의 언론인 공영방송과 신문의 역할이 막대했던 과거와 달리 개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이 활성화된 것은 새롭게 변화된 언론 지형이다.
이렇게 보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지방자치의 분권형 정치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개인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있는 다극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어떤 사람은 더욱 평등하다는 말처럼 다극소통의 시대에도 더 큰 스피커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연결되고 정보의 전달과 의사결정과정이 빨라진다면 현재의 정치제도는 더 빠르게 더 많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체제가 도입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의식이다. 개개인이 공동체와 자신에 대하여 어떤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새로운 제도는 과거의 불행을 답습하거나 더 치명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열과 갈등이 일상이 된 현실을 보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우리의 소임을 바르게 깨닫고 우리의 부르심에 충실해야 한다.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인 교회이면서 세상의 빛이다. 이것은 우리의 부르심이 곧 세상을 밝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인 엔크리스토가 방주로서의 교회일뿐 아니라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담으시는 바로 그 지구호로서의 방주임을 강조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갈등의 시대를 바르게 살아갈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 설교의 제목을 ‘위올동주’라고 정했다. 이 말은 오월동주(吳越同舟)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곧 그리스도의 방주이며 그 방주는 사실 지구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주에 함께 탑승하고 있다면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상호연대를 통하여 공공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깨우침 속에서 우리는 현재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바이블 시놉시스
2. 위올동주(We All 同舟)
3. 엔크리스토호: 그리스도 안에서
4. 연대와 견제로 견고해지는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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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이블 시놉시스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영화가 들어오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시골에는 영화관이 없기 때문에 마을에 영화가 들어오면 추수가 끝난 논에 천막을 치고 임시 영화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본 영화는 대부분 중국 무술영화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본 영화는 신세계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본 무술영화들은 대부분 홍콩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이 되었을 때 광주에서 본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007영화나 인디애나 존스 같은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후에 결혼 후 출산 전에 본 영화는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인디언을 주제로 다룬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화의 위력을 제대로 느꼈습니다. 그것은 어떤 민족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세계관의 세례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화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최고의 상을 받은 감독도 늘어났고 국내에는 천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도 서른 개가 넘습니다. 그 중에 한국인이 제작한 영화는 스무개나 됩니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영화로 꿈꾸던 일들이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스타워즈 같은 우주전쟁영화를 보면 무인비행기들이 떼를 지어 공중에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드론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오늘 영화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영화를 제작할 때 그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영화를 제작할 때 그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그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시놉시스’라고 부릅니다.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는 사람이 배우가 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눈으로’(syn-, together + ops, eye)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시놉시스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배우가 나오며 길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이라는 대본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을 좋아하던 그리스인들은 인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인생은 그 전체가 하나의 연극이다’(σκηνὴ πᾶς ὁ βίος. All life's a stage.)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성경을 읽고 그 대본을 이해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설교를 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는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교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분 하나님을 믿으며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시놉시스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유명한 연극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연됩니다. 그때 다양한 배우들과 감독들이 독특한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을 하여 그 연극을 무대에 올립니다. 하지만 그 전체 줄거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나 영화에 시놉시스가 필요하듯이 성경이야기에도 시놉시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꼭 써보고 싶은 책 제목은 ‘바이블 시놉시스’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성경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묻는다면 제가 내 놓을 대답이 바로 바이블 시놉시스입니다. 성경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은 창조와 타락, 이스라엘과 예수님, 그리고 교회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결국 무엇을 들려주려는 것입니까? 성경에 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부여합니까? 심판은 어떻습니까?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이면 결국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행복한 삶의 지혜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학술적으로 과거의 문서 중 하나로 이해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단순히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여깁니다. 이 모든 말이 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의 부제는 ‘성경이 들려주는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성경은 길고 위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인간을 세우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이 세상을 관리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관리자로 세워진 사람들이 아담이며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과 오늘 우리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또는 인간과 함께 이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시작은 창조이며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King)이시며, 이 세상을 풍성하게 가꾸시는 농부(Farmer)시며, 그 백성을 양처럼 돌보시는 목자(Shepherd)십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본분을 이해하고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한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를 확인합니다. 이 위대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배우고 위기를 극복하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웁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 온다 해도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제가 소개하려는 바이블 시놉시스입니다.
2. 위올동주(We All 同舟)
지난 8월 19일부터 나흘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렸습니다. 민주당의 이 전당대회는 금년 11월에 있는 미국 47대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카멀라 해리스 현 부통령이 민주당의 대선후보 지명을 수락했습니다. 나흘간 여러 명의 유명인이 나와서 찬조연설을 했습니다. 그 중에 저는 오프라 윈프리의 연설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이분은 미국인들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방송인입니다. 그의 대담프로그램인 토크쇼는 오프라윈프리쇼라는 이름으로 27년간 4,561회나 진행되었습니다(1984~2011). 어떤 사람은 윈프리가 대통령으로 나와도 당선될 것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15분의 짧은 연설에서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연설에서 윈프리는 미국 애틀란타의 국회의원인 존 루이스(1940~2020)가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떤 배를 타고 왔든,
우리는 지금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No matter what ship our ancestors arrived on,
we are all in the same boat now.”
우리가 잘 알듯이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입니다. 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호주에서 왔습니다. 사실 미국은 인종적으로 볼 때 지구 전체에서 온 인종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 다인종 국가이며 다문화국가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오늘과 같이 강대국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한 연대감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미국인들에게 우리는 다 한 배를 타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너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서로 원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때 강물이 험악해지고 배가 전복되려고 한다면, 비록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그 두 사람은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말이 오월동주(吳越同舟)입니다. 이 말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인 손자의 지혜입니다. 미국의 정치인이 미국인들을 향하여 한 배에 탔다고 하나됨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당대회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그 말을 인용하여 단결을 촉구했습니다.
저는 지금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오월동주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구적으로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40년 전에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작곡한 노래 ‘We are the World!’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위올동주(We All 同舟)’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같은 운명공동체입니다. 하나가 어려움을 당하면 다른 쪽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은 그 배와 운명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 배에 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정말 운명공동체입니다. 가족의 경사는 모두의 경사입니다. 식구 중 하나를 잃는다면 그것은 가족 모두의 슬픔입니다. 가족이야말로 한 배를 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각자의 헌신과 섬김으로 운영됩니다. 우리 모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로 연결된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소망교회라는 배에 함께 탔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한민국호에 함께 승선했습니다. 우리들은 누군가의 세금으로 복지와 교통, 안보와 교육, 그리고 의료의 혜택을 받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우리 각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지지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식할 수 없을지라도 한배에 탔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지구적으로도 우리는 같은 배를 탔습니다. 우리는 지난 코로나 판데믹 시절에 이런 사실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공항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의 유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북한에도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여 국경을 봉쇄하는 초강수로 대처했다고 합니다. 현재 지구촌은 국경으로는 나뉘어 있지만 이미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지구의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는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이를 네 글자로 표현하면, ‘위올동주’입니다.
3. 엔크리스토호: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배를 이야기할 때 노아의 방주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구원의 방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교회 이름으로 짓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주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 방주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이방인(gentiles)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라엘 민족이며 이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여러 나라들입니다. 그래서 열국이라고 부르거나 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유대인과 구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방주는 너무 좁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새로운 방주를 지으셨는데 그 방주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주의 이름은 ‘엔크리스토’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그 방주에는 온 인류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6, 18
사도 바울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담을 치고 자기들만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전도 그들에게만 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같이 한 가족을 이루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엔크리스토라는 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류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얼마나 큽니까? 여덟명의 식구를 태울 배가 그처럼 컸다면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배는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이 배의 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에베소서 1:22~23, 표준새번역성경
앞에서 말씀드린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인들이 같은 배에 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USA호’입니다.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 승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탄 배를 지구호라고 부른다면, 지구호는 엔크리스토라는 이름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엔크리스토호에 탑승하여 함께 탑승한 지구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과 풍성하심을 맛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 2:7). 그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이제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예수께서는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세상에서는 지구호의 승무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엔크리스토호의 대리인들입니다. 우리들은 이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승무원들과 승객들을 섬기며 돌보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출항을 시작했으며 앞으로 주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가 되면 마침내 소원의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배에서 우리의 구역을 잘 가꾸고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대리인들이며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옛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으로부터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10:11). 이스라엘 사람 예언자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 시민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과 어울려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을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방주에는 커다란 담이 쳐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으로 이해하는 바람에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잘 살펴보면, 구원의 방주에 오르는 사람과 오르지 못한 사람이 나뉘어 있습니다. 이 방주에 들어오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그 자체가 지구호라는 방주이며 동시에 엔크리스토호라는 이름을 가진 배라면, 그렇기에 우리가 이미 같은 배에 탑승하고 있다면, 우리의 임무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임무는 이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배 안에서 자신의 구역을 잘 관리하고 서로 연대하고 격려하며 함께 이 배를 잘 보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감당하고 우리 곁에 있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이 배가 파선할 지도 모른다는 괴담을 퍼트리거나 분란을 일으켜 다투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배가 파선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 배의 선장에 대하여 소개하고,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가 있는 자리를 더 아름답고 유쾌하게 만들 수 있도록 유익한 일들을 계획하고 그런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4. 연대와 견제로 견고해지는 방주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강조한 미국의 정치인은 민주당입니다. 미국은 양당제로 운영됩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크게 보면 여당과 야당으로 이루어지지만 야당에는 거대 야당과 몇 개의 소수당이 있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당을 이루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정치 또는 붕당정치(朋黨政治)라고 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쪽이 있고 그것을 견제하는 쪽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 양쪽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가운데 정치를 하느냐 아니면 한쪽에 독점하고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여 죽이려 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당쟁이 나쁘게 작동할 때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정권을 잡은 쪽이 상대방을 없애 버리기 위하여 일어난 더러운 당파싸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자 탁구선수 중에 ‘삐약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유빈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어린 시절부터 탁구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삐약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금년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두개 땄습니다. 여자 단체전과 혼합복식에서 딴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 단식에서는 동메달 결정전에 나갔다가 일본 선수에게 아깝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직후에 신유빈 선수는 일본 선수에게 먼저 다가가서 축하의 인사를 했고, 상대팀 코치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본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했다고 합니다. 올림픽 경기는 승리를 위한 시합을 벌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국의 선수가 보여준 것은 올림픽이 서로를 이겨야 하는 마당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의의 경쟁이며 화합의 마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자국의 국민들만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신유빈 선수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스포츠가 각 종목에서 기량을 발전시켜 겨루는 선의의 대결장이라면 정치는 국가와 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기량을 발전시켜 겨루는 선의의 대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상대방이 없이는 경기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여야는 상대방이 없이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과 규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경쟁을 할 때에만 정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치인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스포츠에서는 승리가 득점을 많이 하는 쪽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정치에서도 득표를 많이 하는 쪽에게 승리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의 성패는 정치인들에게 달린 것만이 아니라 그 정치인들을 평가하는 국민에게 달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200년 전 프랑스의 한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every nation has the government it deserves;
thus, everything we can do for a nation before we better
it means nothing and has no effect, or only negative ones;
Joseph de Maistre(1753~1821)
모든 국가에는 그에 맞는 정부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나아지기 전에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아무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거나 부정적인 것뿐입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이 말은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로 더 자주 소개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정치인들과 정부의 행동을 보고 질타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혹시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우리 교회는 오로지 기도만 하는 것을 옳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정치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이런 저런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분을 내면서 국회의원들의 언사를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상하면 정치인들이 비열한 행동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직과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정치인들이 함부로 사욕을 따라 처신하겠습니까? 우리가 신의를 지키고 진실의 가치를 확신하며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정부에는 반드시 그런 지도자들이 일어나서 다수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편으로 정치인들을 비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여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에게만 기대하고 이 사람을 뽑고 또는 저 사람을 뽑고 하는 일만으로는 세상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더 나은 사람입니까?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입니까? 누가 더 나은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까? 우리 모두 하나의 배를 타고 한 아버지 아래서 산다고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며 각 사람에게는 저마다 줄로 재어 준 구역이 있다고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비록 현실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속히 오셔서 바로잡으시고 상을 주실 것이라고 누가 약속하셨습니까? 불의한 지도자들은 사실 짐승이며 용의 하수인이라고 일러주시고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니 그들이 주는 표를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끝까지 선을 행하고 인내함으로 이기는 사람들이 마침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약속과 확신과 믿음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선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백성이 있다면 그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그들의 국가라는 배를 운영해 나간다면 그 나라는 지구촌 어느 곳에 있든지 세상을 선도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 모든 나라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요 약속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의식이 단지 현실적인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고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명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그런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있는 새소망호와 성동구호, 그리고 더 큰 배인 대한민국호와 지구호는 번영 가운데 안전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엔크리스토호,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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