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삼십이칙(三十二則)
외도문불(外道問佛) 외도가 부처님께 묻다.
본칙(本則) 역(譯)
세존에게 어떤 외도가 물었다.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외도가 찬탄하며 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셔서 제 미혹의 구름을 열어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예를 갖추고는 물러갔다.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는 무슨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찬탄하고 물러갔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마치 좋은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世尊, 因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據座. 外道贊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乃具禮而去. 阿難尋問佛, 外道有何所證, 贊歎而去. 世尊云, 如世良馬, 見鞭影而行.
평창(評唱) 역(譯)
무문은 말한다. 아난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데도 외도의 견해만 못한 것 같구나! 자, 말해보라. 외도와 불제자가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無門曰 阿難乃佛弟子, 宛不如外道見解. 且道, 外道與佛弟子, 相去多少.
송(頌)역(譯)
게송으로 이른다. 칼날 위를 걷고 얼음 위를 달린다. 계단과 사다리를 밟지 않고 절벽에서 손을 놓아 버린다. 頌曰 劍刃上行, 冰稜上走. 不涉階梯, 懸崖撒手.
사족(蛇足)
외도문불화(外道問佛話)는 사람마다 근기(根機)가, 다르다는 것을 다룬 공안화두(公案話頭)다. 부처님 곁에서 열반(涅槃)에 드실 때까지 시봉(侍奉)을 했던 아난존자(阿難尊者)가 보고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도 듣지도 못하고, 만연자실(茫然自失)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외도(外道)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물었다.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셨다. 외도가 찬탄하며 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셔서 제 미혹의 구름을 열어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예를 갖추고는 물러갔다.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는 무슨 법을 깨달았기에 저토록 부처님을 찬탄하고 물러갔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난아! 마치 천리를 달리는 좋은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아난존자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부처님은 외도 질문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외도는 부처님의 침묵(沈默) 하는 것만, 보고 미혹(迷惑)의 구름이 없어져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부처님을 입이 마르도록 찬탄을 했다. 외도가 물러간 후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묻자 천리(千里)를 달리는 좋은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천리(千里)를 달린다고 답(答)을 주셨다. 선사들이 낸 공안화두(公案話頭)는 하나의 관문(關門) 빗장이다. 관(關)은 막힌 문(門)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안화두(公案話頭)를 타파(打破)하고 관문(關門)을 통과(通過)한 것이다. 이곳은 제불보살(諸佛菩薩) 성인(聖人)이 사는 곳이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범부중생(凡夫衆生)이다.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이, 아난존자(阿難尊者)다. 듣고도 듣지 못한 것이, 그 또한 아난존자(阿難尊者)다. 부처님의 양구(良久) 침묵(沈默)만 보고도 깨닫는 것이, 상근기(上根機) 외도(外道)다. 이 공안에서 외도(外道)와 아난존자(阿難尊者)의 거리가 얼마인가? 이다. 혜개선사는 송평(頌評)에 칼날 위를 걷고 살얼음 모서리를 달리는 말과 같고, 사다리 계단을 올라가며 안간힘을 쓰는 꼴이라고 했다. 각자(各自) 근기(根機)는 이 외도문불(外道問佛) 공안화두(公案話頭)에서 점검(點檢)해, 볼일이다. 그대는 상근기인가? 둔근기 하근기인가? 입 딱 다물고 스스로를 점검해 볼 일이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외도가 부처님께 물었는데, 부처님은 양구로 답을 하셨네, 외도는 침묵만 보고도 확철 대오를 하였고, 동석한 아난존자 보고도 듣지도 못했으니, 근기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멀구나! 外道問佛良久答 外道沈默廓徹悟 同席阿難見不聞 根機格差天地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