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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의 예배
본문(요4:16~26>
누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일까요?
천국 가고 싶은 마음으로 예배당에 와서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들으면 믿게 될까요?
구원 받으려면 예수 십자가 믿으면 된다고 하니,
믿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 교인이 된다고 해서 그 십자가 대속이 믿어질까요?
믿어지는 게 아니라 믿는다고 세뇌되어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 다닌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되 뇌이며, 온갖 종교적 행사에 열심을 내고 충성봉사를 곁들이는 것을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큰 오해)
지금 우리나라 개신교인이 대충 8백만 이라고 하지만 정말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도 아주 소수만 이 믿음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임. (롬9.16) 분명히 언급~구원은 ㅎ님의 긍휼함을 입는 것인데, 사람의 원함으로도 안되고 달음박질로도(어떠한 노력)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믿게 될까요?(정답은 인생의 배가 파선된 자들이 믿게 된다는 것임)
ㅡ사방팔방 다 막혀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가령, 각종 인생의 문제에 치여서 희망이 소실된 자들(건강 문제, 물질 문제, 자녀 문제, 대인관계 등으로 존재감이 해체되어 더 이상 기댈 건덕지가 없는 상태에 직면한 자들이) ->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또는 이리저리 욕심을 부리며 살다보니 원치 않게 죄를 짓고 그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 수치와 부끄러움 뿐인 자들입니다. 너무 염치가 없어 고개를 들고 살수가 없기에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도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ᆢ 죽고 싶어도 차마 그러지 못하는 상태의 사람들-마치 낭떠러지에 걸쳐있듯이 인생의 배가 깨드려진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총칭해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 이라고 하거나, 혹은 불치병에 걸려서 치료가 불가능한 자들-가령, 문둥병자나 중풍병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 질곡에 갇혀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허우적대는 자들을 비유 하지요.
요5장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누어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주변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데, 다른 이들은 제각기 일말의 희망이 있었지만 이 38년 된 병자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희망 제로인 상태에 처한 사람이지요. 이렇게 소망이 전혀 없는 자를 주님은 정확히 아시고 찾아가시는 겁니다.
이렇게 인생의 기대치가 끝나고 자기 가능성이 끝난 자에게 주님이 찾아가 만나 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이 찾아와 만나 주실 때에만, 사람 편에서 마음의 문이 열려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기 가능성, 자기주장, 자기 원함이 끝난 상태, 즉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에게 성령이신 예수께서 찾아가시는 이것을 함축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은 뭐다? 세례요 십자가입니다. 자기 죽음의 자리이지요.
이처럼 나는 죽은 자입니다. 세상의 욕심의 덧없음에 대해서 죽고, 나의 행함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기 부인이 바로 물로 세례 받은 자이지요. 이러한 물로 죽는 과정이 없이 그저 구원받을 욕심으로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다고 설레발 떠는 것은 모두 가짜들이라는 말입니다. 무늬는 신자이지만 내용은 없는 앙꼬 없는 찐빵이랄까요? 작금의 개신교인들의 영적 현주소가 이러합니다. 알곡이 아닌 가라지 집단일 수가 아주 많지요.
사방팔방이 막혀 사면초가의 형국인 자. 희망은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는 자를, 주님은 정확히 아시고 찾아 가시지요, 그게 38년 된 병자이었어요. 그리고 그를 보시고 다짜고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이건 명령이지요.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닷물을 향해 잠잠하라! 명하시듯 불치병 자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시니 그대로 되어 집니다.
성경에서 불치병을 고치시는 내용은 모두 죄사함에 대한 비유입니다. 병은 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병이 나았다는 말은 곧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런 비유를 모르고 많은 소경 목사들이 신유은사 들먹이며 병고친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며 야단 법석이는 것은 번지수가 한참 벗어난 이단 행위인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7장 끝에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귀신을 쫓아냈고~, 선지자 노릇~’/주님이- 이 불법을 행한 놈아 내게서 떠나가라(저주를)
*불법(모든 성경 말씀이 IX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인데 이를 세상 문제해결로 써먹음)
(다시 처음으로) 누가 예수를 믿게 된다구요? 세상에 치이고 죄에 치여서 더 이상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기 의가 바닥 난 자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서 만나 주셔야 예수를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하늘로 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엡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 ㅎ님의 선물. 행위에서 난 게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 사42.8~ 나는 내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아니한다(하심)- ㅎ님이 주시는 구원이지 인간이 만들어 낸 공로가 아니라는 선언이심)
그래서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고하는 것이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요?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 준다는 말인가요? (NO)/ 인간은 누구나 동일하게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들입니다. 돌감나무에서 돌감만 열리듯이 인간은 죄만 만들어 내는 자들이지요(죄를 먹고 마시며 호흡)~ 모두가 육신적으로 볼 때는 진노의 자식들인데 거기서 긍휼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지요. 이들이 바로 긍휼의 그릇들이고 이들이 바로 ㅎ님의 은혜 받을 자들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ㅎ님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도록 사건과 환경을 안배하셔서 인생의 배가 파선되도록 먼저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패자로 조성한다는 말이지요. 어떠세요? 잠시잠깐의 인생길에서 실패할지라도 영생을 얻는 게 좋나요? 아니면 실패는 죽어도 싫다, 나는 영생이나 지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여기서 성공출세가 좋다, 인가요? (눅16장, 부자와 나사로 비유~ 이놈아, 너는 살아서 띵가띵가 했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저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거야..이게 ㅎ님의 공의임)
ㅎ님의 택하신 백성을 세상에서는 실패자로 나타난다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주님이 일부러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 ㅎ님의 택한 백성, ㅎ님의 잃어버린 양이 있어서 찾으시러 간 것이라고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그 대상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었지요. (남편을 6번이나 갈아치운..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
그래서 그 여인과 이런 저런 대화 중에서 주님이 -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 그러니까 여인이 -그럼 저에게 그 물 좀 주세요, 하자.
뜬금없이 주님이 - 그럼 네 남편 데려와라. / 그러자 여인이 ㅡ저는 남편이 없는데요(대답)
다시 주님이 - 옳도다, 네가 남편 여섯이 있었으나 모두 남편이 아니라는 말이 맞다(하심)
아니, 무엇이 옳다는 건가, ㅡ분명 있는데 없다는 말에 왜 동의를 하며 칭찬하실까?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행복의 상징임ㅡ 행복을 찾아 헤메는 인생을 빗대서 파랑새를 찾는다고 하기도 하지요? 인생들이 파랑새라는 행복을 찾아 땅 끝까지 헤메고 다니지만 어때요, 그 파랑새를 찾았다는 사람이 있던가요? 온 세월을 허비하고 돌이켜보니 말짱 헛된 거였네 실감하는 게 인생이지요. ㅡ그 깨달음, 행복과 기쁨을 안겨줄 남편인줄 알고 붙잡고 또 다시 붙잡고 했건만 그게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더욱 갈증만 불러온 헛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상태를 일컬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한 거지요.
인간의 목마름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무저갱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무저갱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보고자 이런저런 몸부림을 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간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인간은 늘 목마름을 안고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 것이 아닌 그 무엇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채워져야 할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전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인간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강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딜레마입니다. 바다와 같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해갈시켜 보고자 이것저것을 쉬지 않고 해봅니다. 그러나 그 해갈은 잠시뿐 또다시 솟구치는 목마름을 제어할 수 없지요. 친구도 만나고, 술도 먹고, 여행도 해 보고, 지식의 세계를 탐구하기도 합니다. 우정의 기쁨, 연애의 기쁨, 깨달음의 기쁨, 출세의 기쁨, 명예의 기쁨 이것저것으로 목마름을 해갈시켜 보기도 합니다. - 그러나 그것들로 인간의 마음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전1:8~9/14> “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그래서 마약?)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것이 하늘과 단절된 채, 해 아래에 있는 이 땅의 것으로 목마름의 바다를 채워보고자 하는 인생들의 현주소입니다. 모든 일이 다 바람을 잡으려는 일처럼 헛된 것들이지요. 그러나 인생들은 왜 그토록 행복을 찾아 헤메는 것일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은 애당초 ㅎ님을 담는 그릇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ㅎ님을 그 마음 그릇에 담을 때에 비로소 갈증이 해갈 되는 것입니다.
다섯 남편을 갈아치우고 또 다른 남편을 두고 살고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모두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찾아와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너에게 행복과 기쁨을 안겨줄 것은 없단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란다.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물이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이 물을 마신 자들의 신앙고백 안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로 모일 때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 교회이겠지요.
ㅎ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란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었기에 이제 하나님과의 단절이란 저주에서 영원히 벗어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가 영원히 종식되고 화목 되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단절된 곳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피곤함의 근본 원인입니다. 오직 하늘의 것으로 채워질 때만 해갈될 수 있는 인간의 목마름을 이 땅의 것으로 채우려고 하니 삶이 공허하고 늘 피곤한 삶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되어 이 육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저주 아래 놓인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이 찾아와 더 이상 이 땅의 물로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것을 멈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물을 말씀하십니다. 그 물은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갈시켜주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하늘의 우물로 연결시켜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토록 솟구치는 샘물이 되게 하십니다.
이 물을 마실 때 에덴동산의 문이 열립니다. 그 동산 중앙에 놓여 있는 생명나무가 허락되는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이 땅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즉 영생의 나라에 연결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음으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피곤하고 허무한 삶에서 비로소 해방되어 지금 여기서 자유함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고자 먼저 인생을 실패자로 안배하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찾아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순간 이지요.
주님에 의해 이 여인은 자신이 여섯 남편의 삶을 가졌던 과거의 수치가 폭로 당하자,
여인은 대뜸 말합니다. -제가 보니 선지자이시군요.
선지자라고 말한 이유는 과거 선지자들이 사람의 죄를 폭로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해결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제사지요. 예배지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들고 나오게 됩니다.
<요4: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한 것은 예배 장소의 정통성에 대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케케묵은 논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주장하며, 자기 멋대로 예배 장소를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정죄했습니다(cf. 왕상12:25-33/ 여로보암이 배신하여 북조 이스라엘을 세운 후에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단과 벧엘에 산당을 세우고 예배하게 한 이후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두 곳에서 예배를 드려옴~ ).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하나님은 누구의 예배를 받으시는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대답이 다음 구절임(21~22절)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예수님은 두 곳 모두 틀렸다고 말하십니다. 이 산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배 장소, 예배 형식이나 의식, 예배당 건물에 많은 의미를 둡니다. 예배를 이러한 것들과 함께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것에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예배 드리는 대상을 알고 있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이 어뗜 하나님인지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인이든 그들의 예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예배에 대한 열정 역시 대단합니다. 주일오전, 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철야예배, 각종 헌신예배, 생일예배, 환갑예배, 칠순예배, 돌잔치예배, 장례예배, 절기예배.etc.. 육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 ㅎ님께 눈도장 찍기. 각종예배를 통해 ㅎ님께 환심 사려는 속셈.
이렇게 인간의 열심과 정성의 터 위에 서 있는 '자기 의'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ㅎ님은 인간의 열심과 정성에 일체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에 방점을 둔 예배는 모래 위에 짓는 집이고, ㅎ님의 의이신 IX의 십자가 피에 방점을 둔 예배는 반석 위에 짓는 집입니다.
(롬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성경을 열자마자 등장하는 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기각 당하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 됩니다. 왜일까요?
두 제사는 사람의 의와 ㅎ님의 의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늠자이지요.
사람의 힘과 노력과 정성으로 드리는 것이 사람의 의이고 이게 가인의 제사로 표현된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는 ㅎ님께 나아갈 수 없으나 오직 어린양의 피를 의지해 ㅎ님의 긍휼을 바라는 제사가 바로 아벨의 제사 였지요.
이것을 빗대- 22절에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이나 정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일입니다. 이것을 과거 이스라엘이 실패했고, 오늘날 기독교 역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에서, 유대인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자기들의 종교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인간을 기쁘게 하는 거짓복음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죄로 죽은 인간의 무능함과 무가치함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구세주이신 IX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거짓 복음, 다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요.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 즉 정성을 다해 충성봉사와 각종 종교적 행위, 헌금을 하면 ㅎ님이 점수를 매겨서 상도 주고 복도 준다고 사람의 행위를 부추기는 설교가 바로 다른 복음이고 이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거짓 복음이지요. 오늘날 기독교나 이스라엘의 유대교나 다 한 통속입니다. 이렇게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곳으로 군중들이 몰려서 대형교회를 이루고 있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걸 누가 알겠어요?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유대인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우리를 이 땅에서의 모든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택한 자들은 고난 속으로 몰아넣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따라 일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아들을 율법 아래 보내 우리 대신 죄가 되어 율법의 정죄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믿는 자들을 영원히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물을 먹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 말씀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요4:23-24절>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 이 구절을 옛날 성경(개역한글)은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을 해서 오해가 많았는데, 이번 개역 개정이 이것을 ‘영과 진리로~’번역해서 그나마 잘된 번역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은 사람의 정성과 열심을 부추기는 뉘앙스를 주었기에 잘못된 신앙의 단초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잡혀져서 다행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열심과 정성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만 받으십니다.
영과 진리에서 영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진리란 ㅎ님의 의이신 IX자신이며 또는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 지신 IX를 믿는 믿음으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십자가 지신 IX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가령 구약의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몸을 예표하는 모형이고 그림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리고 부활 후 보내주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도의 몸이 역시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14장에서 이것을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마련한다는 처소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보내어 주실 보혜사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처소라 함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그 속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러면 이젠 여기다 저기다 하는 장소적 의미와 어느 시간에 드려야 한다는 시간적 의미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교제)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며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을 영적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함을 조금이라도 의지한다면 그는 천국과는 상관없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고 살아가는 그 자체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 하고, 이런 성도의 삶을 영적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4:25-26절>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제 여인의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이 벗겨지고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분이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라고 말했듯,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들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을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이끄셨듯이,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가시며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지식에 더 풍성한 자로 세워 가십니다.
이들이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교회는 이 지식을 공유한 자들이 함께 모여서
영과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