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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6
사도행전 10장 38절 [8장 3-4항]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2항은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한 본질, 다시 말해 동일본질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동등하시지만, 위격 상호 관계를 따라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십니다.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는데, 사람의 모든 본질적 속성들 및 그것들로 말미암은 공통적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 안에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해서 마리아의 본질과 다른 분으로 출생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태 안에서 잉태되어 마리아의 본질로부터 출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두 개의 본성들은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성이 인성으로 변환되지도 않으면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다른 본성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할 때 한 위격 안에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계신다는 것이 성경을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제8장 3항과 4항인데,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실행할 수 있도록 철저히 예비되셨다는 사실과 이 직책을 맡으심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신 신분을 따라 이 직책을 실행하셨다는 내용입니다. 먼저 3항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신성에 연합된 그의 인성 안에서 주 예수는 자신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지니면서(골2:3), 측량할 수 없이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기름부음을 받습니다(시45:7, 요3:34). 성부는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도록 하길 기쁘게 여기셨습니다(골1:19). 마지막[날]까지 거룩하며 흠과 얼룩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히7:26, 요1:14)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실행토록 철저하게 그는 예비되셨습니다(행10:38, 히12:24, 7:22). 그는 그 직책을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 직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히5:4,5). 성부는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아들의 손에 주고 동일한 것[즉,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실행토록 아들에게 명하셨습니다(요5:22,27, 마28:18, 행2:36).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되어 다른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신성은 신성대로의 특성을, 인성은 인성대로의 특성을 지닌 분으로서 신성과 인성이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합된 분으로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3항은 신성에 연합된 그의 인성 안에서 주 예수는 자신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지니면서, 측량할 수 없이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죄는 없으시지만 예수님의 인성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야 하는 것처럼(눅2:52)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충만해질 필요가 있었으며(요3:34), 자신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셔야 했습니다(골2:3). 왜냐하면 중보자로서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단지 사람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때가 차매 그런 분으로 계십니다. 하고자 하시면 얼마든지 성자 자신의 신성을 따라 거룩해지며 충만해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신성을 따라 중보자로서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충만해지셨는데, 전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성자를 중보자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내용까지 들어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으로 거룩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처럼 그의 몸 된 교회 역시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즉 그가 받으신 모든 것은 그의 직분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수행하심으로 이루신 모든 것을 자신의 몸 된 교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성부는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도록 하길 기쁘게 여기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신앙고백서는 골로새서 1장 19절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18절로 가시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요, 그가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이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말인데, 시작이 있다면 시작과 함께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심을 말씀하는데, 그의 부활을 통해 몸 된 교회 역시 부활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확증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오늘 본문인 19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 아들이신 성자 안에 모든 충만을 두시고, 그런 충만을 누구에게 주고자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 때 몸 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 채우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에 연합된 그의 인성 안에서 주 예수는 자신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지니신 것이고, 측량할 수 없는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즉 성부께서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도록 하기 기쁘게 여기셨다고 할 때 예수 안에 있는 그 충만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이요, 성령으로 거룩해지는 등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서는 마지막 날까지 거룩하며 흠과 얼룩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실행토록 철저하게 그는 예비되셨다고 고백하는데,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온전히 실행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점과 흠과 얼룩이 없는 완전한 거룩함을 지니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 26절은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고 증거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거룩하지 않고 악과 더러움이 있는, 그래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자는 중보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점과 흠과 얼룩이 없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그의 영광을 보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아버지께 속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으며, 진리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중보자라는 말은 ‘서로 대립 또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를 얻게 하는 자’입니다(두산백과).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 또는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보내셨습니다. 보증의 직책은 무엇입니까? 보증인의 사전적 의미는 ‘좁은 뜻으로는 주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 그 채무를 대신 이행할 종(從)된 채무를 부담하는 사람을’ 말합니다(두산백과). 좀 더 쉽게 말하면 다른 누군가를 대신하여 어떤 특별한 책임을 떠맡는 사람입니다. 신앙고백서 제7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처음부터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언약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대신하여 언약을 이루실 분을 우리에게 보증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요(히12:24),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7:22)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으로 읽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신 성자께서는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선한 일을 행하실 수 있고, 또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시기 전에도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와 성자로 구별되는 질서가 있는 것처럼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런 질서를 따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위하여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그의 능력을 기름 붓듯 하신 것이고, 성령과 그의 능력으로 모든 사역을 행하시길 원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그의 능력을 힘입어 선한 일을 행하신 것이고, 또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스스로가 할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성을 취하셨고 그런 측면에서 낮아지셨기 때문에 성부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그의 모든 사역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강조는 계속되는 신앙고백의 내용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직책을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 직책으로 부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인용 구절인 히브리서 5장 4절과 5절을 보면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어떤 사람도 그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히브리서 5장 5절은 그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이고, 그런 만큼 스스로 취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르셔야 합니다. 부르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그를 뛰어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되 한량없이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아, 신약의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름이 의미하는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것입니다. 그의 모든 사역이 성령에 의한 사역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사역도, 제사장으로서의 사역도, 왕으로서의 사역도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사역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어떤 권세까지 주셨는가? 신앙고백서는 성부는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아들의 손에 주고 동일한 것, 즉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실행토록 아들에게 명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같은 장 2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을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즉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고, 그 권세로서 심판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3항의 내용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의 직분으로 준비되셨다는 것인데, 그 모든 일의 주체가 누구시냐? 성부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이어 4항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셔서 자신의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으로 수행하신다는 내용입니다. 4항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는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고(시40:7,8, 히10:5-10, 요10:18, 빌2:8),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율법 아래에 있으셨고(갈4:4), 그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마3:5, 5:17).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과(마26:37,38, 27:46, 눅22:44) 자신의 육체 안에서 지극히 아픈 고통들을(마26, 27장) 직접 견디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빌2:8),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패도 볼 수 없으셨습니다(행2:23,24,27, 13:37, 롬6:9). 그가 고난을 겪으셨던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고전15:3-5). 또한 그 동일한 육체로 승천하셨고, 그의 아버지 우편에 앉아(마16:19) 중보하고 계시며(롬8:34, 히9:24, 7:25),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롬14:9,10, 행1:11, 10:42, 마13:40-42, 유6, 벧후2:4).
일단 신앙고백서는 주 예수는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서는 시편 40편과 히브리서 10장 등을 인용하는데, 히브리서 10장은 시편 40편을 인용하되 해설까지 담겨져 있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0장에 있는 내용만 보면 이렇게 증거 합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인데,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5-10) 5절에서 7절이 시편 40편 6절 이하 8절을 인용한 내용인데, 여기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0장 1절의 증거처럼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 4절에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측면에서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을 언급하는데, 히브리서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드러냅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라고 말하는 것이고(5a)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말하며(5b),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말하는 분입니다(7).
여러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때가 되어 주께서 세상에 임하신 것, 그래서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은 주 예수께서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하기에 1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렸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직책을 기꺼이 맡으셔서 무엇까지 하셨는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드리셨는가?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오로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입니다.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만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주 예수께서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율법 아래에 있으셨고, 그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분명 신성으로는 율법 아래 있으신 분이 아니라 율법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율법의 재정자요 율법의 수여자이십니다. 율법을 재정하시고 율법을 수여하실 수 있는 분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에 저촉되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입니다(갈4:4). 율법의 모든 의무들 아래 자신을 두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자신이 온 목적을 이렇게 밝히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아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인이 받아야 할 고통과 죽음을 겪으셨는데, 신앙고백서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과 자신의 육체 안에서 지극히 아픈 고통들을 직접 견디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육체적인 의미의 고통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까지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 26장에 기록된 겟세마네라는 곳에서의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8-39)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이 기도를 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란 말씀과 함께(눅22:4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는 말씀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간절함 이상으로 기도했다는 것이고, 간절함에 간절함으로 기도한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그 일이 너무나도 큰 고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내용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결국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지극히 끔직한 고통들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 27장 46절입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인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마치 죄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런 단절을 그의 영혼이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 가운데 우리 한글판에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항목입니다. 정요석 교수에 따르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사도신경의 가장 오래된 210년경 판과 이어지는 판들에는 이 내용이 없지만, 4세기의 사도신경 판에 처음 나온다고 합니다. 6세기 이후의 판들에도 조금 나오지만, 대부분의 기록물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공인된 원문은 이 구절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지니는 의미 때문입니다. 자칫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 때문에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르자면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 이후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시 말해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혁주의 역사 안에서는 그렇게 해석된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통해 그 의미를 살피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65]목사: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부가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이: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과 육의 분리를 뜻하는 자연적인 죽음만을 겪으신 것이 아니고 그분의 영혼이 사도 베드로가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한 바 있는(행2:24) 상상하기 힘든 괴로움 속에 갇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66]목사: 그런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납니까?
아이: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대속을 행하시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으므로 그분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나 한 것처럼, 아니 하나님께서 마치 그분을 향해 진노하시기나 한 것처럼 당신의 양심 안에서 이러한 가공할 만한 고통을 느끼셔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심연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라고 부르짖었습니다.
[67]목사: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분에 대해 진노하셨습니까?
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분에게 고통을 가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손에 맞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사53:5, 벧전2:24).
[68]목사: 그러나 당신 자신께서 하나님이신 분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나 한 것처럼 어떻게 그러한 심한 공포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아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에 따라 이러한 극단적인 곤궁 속에 계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분의 신성은 마치 잠시 동안 숨어계신 듯 처신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신성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신경에서의 지옥강화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을 직접 겪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 안에서도 지극히 아픈 고통들을 직접 견디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몇몇 부분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과 68절입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것이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가야바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당한 육체적 고통입니다. 마태복음 27장으로 넘어가면 당시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고, 결국 십자가에 넘겨주게 됩니다. 2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27-31)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21장 22절과 23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과 자신의 육체 안에서 지극힌 아픈 고통들을 직접 견디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율법에 따라 죄 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십자가 형벌까지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확실함을 위하여 예수님은 장사되기까지 하셨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흘 동안 죽음 가운데 계셨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장사 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던 것입니다. 물론 계속해서 고백하는 것처럼 그러나 어떤 부패도 볼 수 없으셨습니다. 그의 몸이 썩어질 정도로 오랫동안 무덤에 머문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생명을 잃어버린 채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사망의 고통’ 가운데 계셨으며, ‘사망에 매여’ 있었습니다(행2:24).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할 때(행2:2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치 그를 음부에 버리신 것처럼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신분입니다.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과 자신의 육체 안에서 지극히 아픈 고통들을 직접 견디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잠시 동안 머무셨다는 것.
중보자의 직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낮아지신 신분이 있다면 높아지신 신분도 있는데, 신앙고백서는 그가 고난을 겪으셨던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고 죽음 이후 부활이 증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도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는 말씀도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성도의 부활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5:18).
부활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가 고난을 겪으셨던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부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손에 못 자국을 가지고 계셨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지금의 몸과 다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활체의 모습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으며,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는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고전15:53). 그래서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것입니다(고전15:5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동일한 육체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왜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곳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곳은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습니다(마25:34 참고). 그럼 예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소적인 측면보다는 장소에서 살게 될 택하신 백성을 위한 예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칼빈이 표현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는 것이고(기독교강요, 1559, 2권 16장 16), 지상에서 그의 모든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지상에서 이루신 모든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신앙고백서가 이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아버지 우편에 앉자 중보하고 계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요, 그의 몸이 교회라고 할 때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때문에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까지 다스리십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몸 된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일시적인 심판을 행하십니다. 나아가 아버지 우편에 앉아 중보하시는데, 택한 백성에 대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중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사는 성도의 삶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점과 흠과 얼룩이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정죄를 받지 않고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천상에서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다가 세상 끝 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런 심판에 대하여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2-33)는 말씀으로 하십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할 것입니다(마13:40). 여기에 어떤 대상까지 있는가? 사람들만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라고 말씀합니다. 유다서에서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과 택하신 천사들은 흑암이 아닙니다. 지옥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은 간단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것 때문에 마태복음 24장 하반부와 마태복음 25장 상반부는 우리에게 준비하라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또 마태복음 25장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준비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이미 상속받게 된 자로서 거기에 걸맞은 인생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성부 하나님은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도록 하길 기쁘게 여기셨고, 마지막 날까지 거룩하며 흠과 얼룩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실행하도록 철저히 예비키셨다면, 성자 예수님은 성부께서 맡기신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고, 맡으신 바를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으로 오로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실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