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넘치는 나라
햇빛이 나를 부린다
어서 빨래를 널라고
해 다 넘어가겠다고
해가 뜨면, 언제든지 호리병에서 흘러나와
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명령을 기다린다
해가 뜨면, 해야 할 일들의 사슬이
고리고리 내 발목을 채운다
지구촌 어디에는 맥도널드 한 끼 값이면
하인도 부릴 수 있다는데
나도 그쪽 나라에 가면
햇빛이 될 수 있을까
일조량이 국민 총생산을 훨씬 능가하는 이곳은
나무나 담벼락 밑에서 그늘이 흥건하고
누구든지 그림자를 하나씩 거느린다
노을이 차고 넘쳐
여름이면 서머타임을 보너스로 주는 나라
넘쳐서 쌓아 놓은 밤만 어언 2023년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아침이 매일같이 달려와
부대에 포도주를 넘치도록 눌러 담고 있다
시작노트
그림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햇볕도 많다는 것. 날이 밝으면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해가 뜨면, 오늘의 할 일을 주문처럼 되뇌다 둘둘 감고 있던 이불 속에서 기어나와 동분서주 뛰어다닌다. 쌓여 있던 오늘의 할 일을 둘러업고 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한편, 햇볕의 고용인이 되어 일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다행인가. 해 아래 숨 쉴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가. 고단하게 수확한 열매가 사람과 사물을 채우고도 넘쳐 바닥에 흥건하게 고이는 것을 날마다 보고 있다.
민명숙 / 2017년, 2023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2005-2022 한글학교 교사,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