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려할 즈음, 또 다시 중공군이 공격해왔다. 1951년 1월 4일 국내에서는 청장년들의 남하(南下) 명령이 떨어지고 전국 각지에서 부산을 향한 대이동이 일어났다. 수일 후에 오산까지 남침했던 중공군이 다시 후퇴함으로 남하하던 청장년들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 해 2월, 본 교단 김용해, 신혁균 목사는 강경에서 만나 교단 수습책을 의논하고 부산으로 피난 간 안대벽 목사를 만나 협의 끝에 나요한 선교사와 연락을 취했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1년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충남 부여군 원당교회에서 개최되는 교단 총회에 참석하는 나선교사 부부를 영접하기 위해 총회임원들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 후 나선교사 부부는 도착했고, 양자 간에 정식으로 제휴할 것을 합의했다. 합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침례교의 이상과 주장에 대한 것, 즉 신약성서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므로 교회 위에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교회주의에 입각해서 지방회나 총회는 협동기구이며, 자발적으로 교회들은 협력한다. 둘째,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인데, 침례는 거듭난 자가 받으며, 구원과는 무관하다. 셋째,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 구성된다. 단 한국에서는 전도사직을 사용하기로 한다. 넷째, 교정(敎政)은 분리하고 교회는 절대 자유가 있다. 그리고 세계침례회에 가입한다.
이런 합의는 그간 한국침례교회의 체제에서 볼 때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침례교회의 본래 체제로 돌아온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본 교단 임원들도 이를 환영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총회재무부장인 김주언 장로에게 집사로 호칭했다. 드디어 원당교회에서 1951년 역사적인 제41회 연차총회가 개최되었다. 6ㆍ25전쟁 와중에 모인 총회였다. 전국 각지에서 총회대의원들이 모여 들었다. 원당교회가 생긴 이후 가장 큰 집회였다. 미국 선교사 내외분이 온다는 말을 듣고 당시 김순배 이장의 행랑채를 빌려 수리하고 침대까지 갖추어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외 손님들은 숙박시설이 부족해서 교인들 가정에서 모두 민박하게 했다. 밤이면 교단 역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무엇보다도 이 총회는 미남침례교 해외선교부와 본 교단의 제휴가 체결된 총회라 역사적인 의의가 컸다. 임원회는 선교부와 협의한 안건을 상정했고, 총회는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미 선교부는 교회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제한하되, 전도사 명칭은 종전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조건을 내 놓았고, 총회측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 연합기구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교리 및 신앙고백 문제 등을 연구할 위원으로 노재천, 김용해 목사와 김주언 집사를 선출했다.
한국 침례교총회는 이 결의를 명심해야 한다. 이 결의가 일방적으로 변경되거나 파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설사 어떤 무모한 사람들에 의해 총회제도가 변경이 된다 하더라도 1951년 총회에서 제휴한 결의를 고수하는 교회들이 있을 것이며, 그 원칙을 지키는 교회들을 절대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 동아기독교의 감목제도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원로목사들의 이구동성이었다. 만일에 감목이 투옥된다거나 신상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교단 운영이 어려워지는 것도 그 불만의 커다란 요소로 지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침례교회에서 실행하는 회중제도, 즉 개교회주의는 그런 면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동시에 성경적인 제도라고 믿는다. 다행히 1951년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제휴하면서 세계침례교회의 이상과 행정체제를 동일하게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본 교단은 나요한 선교사가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그의 요청에 따라 우선 직제 개편부터 단행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선배 목사들은 아무런 이유와 불평 없이 직제 개편을 받아들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 침례교회는 명실공이 세계침례교회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초를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