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이상룡의 애국충정과 임청각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중국 지린에서 병사했다.
임청각(臨淸閣)은 형조좌랑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 지형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 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임청각에서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제 관헌이 1942년에 집 앞마당과 집 일부를 철거하고 중앙선 기찻길을 내는 바람에 현재는 규모가 70칸 정도로 축소된 채 낙동강 풍경과도 단절되어 있다. 중앙선 선로와의 거리는 약 7m이다. 이에 따라 임청각은 복원 사업이 진행중에 있다. 중앙선 선로 역시 다른 쪽으로 내는 공사가 진행 중이며 안동역도 곧 이전할 예정이어서 임청각의 옛 모습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