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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월급과 연금 대신 진리와 자유로 산다>의 줄거리:
진리를 앎으로 자유가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말은 멋진데 정말 느낌은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유가 무엇인지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일까요? '진리' 그리고 '자유' 무엇인지부터 먼저 알고 이제부턴 진리대로만 자유롭게 여생을 사십시다.
월급과 연금 대신 진리와 자유로 산다
(요한복음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월급과 연금 대신 진리와 자유로 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월급과 연금 대신 진리와 자유로 산다.”
우리의 삶의 수단은 진리와 자유입니다. 다만 이것은 월급과 연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월급과 연금은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어 두고 진리와 자유가 주된 삶의 방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단어가 진리와 자유입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나 자유와 같은 표현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통해 얻어지는 자유 또한 이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에 우리의 삶의 수단과 방편이 되기에는 구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항목입니다. 바닷가의 소나무나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에게 진리는 필요 없습니다. 진리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구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목말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목마름을 인격의 핵심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진리란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다만 이것이 진리일지라도 그저 선포되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질 수 있고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진리는 무엇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인가를 알려줌과 동시에 그 유일한 좋음을 어떻게 가져서 마음 채움을 실제로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연쇄과정이 진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시고 세상 밖에 있는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가지고 열망하고 연합할 수 있는 길이기에 진리입니다.
이로부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남녀가 동침하여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에서도 안다는 말은 연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진리를 내 것으로 삼는 방식은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합해야만 진리를 아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좋음이시라는 사실을 단순히 인지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안다면 그 내용을 실제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음이시라는 사실을 실제로 느낄 때 진리는 내 것이 된 것이고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목적 또한 이 연합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음이시라는 사실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합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음이시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가질 때에만 진리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을 갖게 해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이루셔야 했습니다. 진리 안에는 두 인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인격은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이시고 다른 한 인격은 그 하나님을 가지게 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두 인격과의 결합이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다.”라는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데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내 것으로 열망하고 가지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32절의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씀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과의 연합,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이 진리를 아는 것이라면 자유는 무엇일까요? 유일하게 좋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갖게 해주는 것이 진리의 내용입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의 인격과 연합하고 그 하나님을 가지게 해주는 예수님의 인격과 연합하는 것이 진리를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칼로 무 자르듯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의 삶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합니다.
사전에서 자유(自由)를 찾아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다만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구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유란 마음의 공백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을 마음껏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좀 더 일반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빼보면 자유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에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마음껏 바라고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반대로 하자면 “나의 마음에서 싫다고 여겨지는 것을 마음껏 거부하고 멀리할 수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마음껏 원하는 것과 싫은 것을 마음껏 거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천국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리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좋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진리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에서 내려다보면 75억 인구의 마음이 스스로는 한 사람도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를 얻는 방법으로 제시되었지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만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마음이 이 세상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을 좋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마음이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앞서 마음의 목마름이 인격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목마름을 거짓된 좋음인 세상의 가치들로 채우는 동안에는 진정한 좋음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 상태가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자유가 없는 상태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추상적으로만 느끼며 마음에 와닿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에서 바쁘게 살던 50대 초반의 여고동창생 다섯 명이 연말에 2박 3일로 강릉으로 여행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답답한 서울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강릉 바닷가의 소나무 숲에서 산책하다 보면 자주 보는 광경이 있습니다. 강릉에 도착한 사람들이 “와! 바다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바다로 뛰어갑니다. 바다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강한지 길도 아닌 곳을 가로질러서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다섯 명 중 한 명이 시부모님을 모시는 상황이라 도저히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끼를 차려드려야만 하는 시부모님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자유라는 단어가 절실해집니다. 구속된 상태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자유라는 단어가 살아 움직이듯 강하게 느껴지는 상황은 마음에서 간절히 바랄 만큼 좋은 것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가질 수 없을 때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싫은데도 거부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자유라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자유는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을 바꾸어 이 여고동창생들이 2박 3일 강릉여행은 그만두고 연말에 모여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며 화투나 치자는 계획을 세웠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술 먹는 것도 싫어하고 화투를 치는 것도 싫어서 시부모님을 핑계로 그 자리에서 빠지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유란 이처럼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 자유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처럼 자유는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는 것을 마음껏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자유의 반대로서의 노예의 예속 상태는 마음에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랄 수도 없고 가지고 누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그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힙니다. 싫어하는 일을 못 한다고 해서 자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못 할 때에야 비로소 자유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이유 또한 자유와 연관이 있습니다. 명품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이 싫은 이유는 부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으면 좋게 여겨지는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유롭게 여기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고자 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마음대로 가지기 위해서는 권력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유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 때 자유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음이심이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그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가지고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짜 좋음을 가지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동안 진리와 자유를 등지고 맙니다. 가짜 좋음을 바라는 것은 매임이고 중독이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가짜 좋음을 바라는 동안에는 유일하게 참 좋음이신 하나님을 마음껏 갖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1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거함은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를 때만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음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고 가지기를 원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월급과 연금 대신 진리와 자유로 산다.”라는 제목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월급을 버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버는 것이 될 때 진리와 자유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켜라” 혹은 “내 말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거하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증언임을 염두에 두신 표현입니다.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은 “나의 증언 안에 너희의 의식이 머물러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영원히 거할 곳으로써 천국이 존재하고 그 천국이 하나님 아버지의 좋으심의 빛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의 좋음을 재현하는 증언이라고 말씀드렸던 바와 같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사건현장을 증언합니다. 판사와 배심원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건을 증언으로 재현합니다. 그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면 법정의 모든 사람은 증인의 말에서 만들어진 현장 상황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 14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으로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육신으로 사신 삶과 몸으로 행하신 행동도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이 되셔서 당신이 출발해서 오신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을 통하여 재현되고 있는 천국과 하나님 아버지의 좋으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나오는 말씀과 행동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좋으심과 천국의 좋음을 재현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이 제일 좋고, 하나님 아버지가 유일하게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증언에 거짓이 없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예수님이 느끼시는 천국의 좋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때 진리를 알게 되는 연합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천국에 대한 열망이 생기고 천국으로 가고 싶어 하게 됩니다.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낸 부모라면 몸은 한국 땅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미국을 향해있기 마련입니다. 행여 자녀가 1등이라도 하면 한국에 살면서도 미국에 있는 자녀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의 증언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면 천국을 열망하게 됩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녀가 있는 미국으로 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면 마음은 천국으로 가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열망하고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상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진리의 내용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면 진정한 자유 또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열망하고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진리를 알면 세상을 열망하거나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이고 죄로부터의 온전한 해방입니다. 죄를 의미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목마름의 해결은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으로 세상 것을 향한 것이 죄이고 매임이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삶에는 기쁨과 만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증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예수님을 관찰하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제에 빠져서 필요를 느끼며 그 필요에 맞추어진 예수님을 새롭게 창조해내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면 쏜살같이 인간 세상으로 뚫고 들어오셨다가 3년의 공생애를 마치신 후에 세상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선 자체가 강력한 증언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던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좋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하실 수 있으셨지만 세상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시고 하늘로 곧바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객관적인 예수님의 동선에 주의를 집중해보면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증언하고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 안에 머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쏜살같이 세상을 떠나셨는지, 왜 하늘로 돌아가셨는지, 무엇이 그렇게 바쁘셨는지, 왜 그렇게 천국으로 가고자 하셨는지를 염두에 두면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예수님이 가신 천국으로 가고자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시부모님을 모실 때에 좋아하는 일을 못 하면 부자유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어도 내가 싫어하는 일을 안 해도 된다면 자유로운 것입니다. 자유란 진짜 좋은 것을 향해 갈 수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진짜 좋은 것을 향할 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에 대해서는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진짜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면 세상의 모든 여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짜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면 세상의 모든 남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짜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 한 분만을 집중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유일하게 좋은 분이시며 그 아버지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이르는 길 되시는 예수님과의 연합이 진리를 갖는 것입니다. 진리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세상으로부터 풀려나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짜 좋음을 추구하는 매임으로부터 풀려나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예수님의 천국 좋음에 대한 증언을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좋음은 천국뿐임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증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삶에서 돈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돈을 벌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돈에 매이는 것입니다. “내가 돈으로 쫓기고 있지만 돈이 좋은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좋음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고 아버지가 계신 천국뿐이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월급과 연급 대신에 진리로 사는 방식입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을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건강을 회복하더라도 그것은 좋음일 수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좋음이시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서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관통하시고 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그 인생을 통해서 증언하신 바가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건강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우리가 좋아해야 할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아버지를 갖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몸이 아픈 중에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기 위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떠올립니다. 이것이 자유롭게 사는 길입니다.
건강에 매이지 않고 재정에 매이지 않고 이 세상의 일과 과제와 성과에 매이지 않고 오직 진리와 자유로 이 세상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유일하게 좋음은 하늘에만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의식에서 잊지 말아야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생활화가 십자가 생활화의 전제조건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천국의 좋음을 생활화함으로써 십자가 생활화에 박차를 가하게 하셔서 월급과 연금 등의 세상의 방편이 아니라 오직 진리와 자유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