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학운동’(1)
인간혁명운동을 추진하려면
교학이 반드시 필요
1977년 ‘교학(敎學)의 해’는 예년보다 더 불법(佛法)을 연찬하는 활기로 가득 넘친 해였다.
전해 1976년 12월에는 이미 ‘교학의 해’ 개막을 앞두고 교학부 임용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새해 들어 1월 9일에 전국 각지에서 치른 교학부 중급등용 필기시험에는 조교수와 조교수보에 해당하는 멤버 45만 명이 시험을 보았다.
1월 23일에는 중급등용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치렀다. 그날 오사카에 머무르던 야마모토 신이치도 간사이센터에서 치른 면접시험의 시험관을 맡았다. 시험 전후에는 응시한 멤버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2월 6일에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치른 초급등용시험에는 강사와 조사에 해당하는 멤버 43만 3000명이 시험을 보았다.
또 1월 말부터 2월 중순 무렵까지 교학부 교수 인정시험도 치렀다. 시험 일시는 각 방면과 현별로 달랐으며 시험 방법도 필기시험이나 면접시험 또는 논문심사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치르기로 했다.
이 교학부 교수 인증시험 심사위원회 위원장은 신이치가 직접 맡았다.
많은 교학부 교수가 본인도 교학부 교수 인정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연찬하며 임용시험이나 중급시험 그리고 초급시험에 대비한 연찬회를 담당했다.
모두 정신없이 바빴지만 활기차고 생기발랄하게 도전했다.
왜냐하면 교학시험에 대비한 연찬회를 담당하며 시험에 응시하는 멤버가 하루하루 불법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고 환희에 불타며 계속 착실하게 성장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교학을 가르치는 일은 신심을 가르치는 일이며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불법의 법리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친절하고도 세심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속에 자연히 자신의 생명도 환희하며 약동한다.
니치렌대성인은 “법화경을 일자일구(一字一句)라도 부르고 또 남에게도 이야기하는 자는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사자(使者)니라”(어서 1121쪽)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함께 어서를 연찬하고 불법을 이야기할 때, 부처의 위대한 생명을 용현할 수 있다,
◇
신이치가 세이쿄신문 1월 1일자부터 4회로 나누어 게재한 〈제법실상초〉 강의는 1977년에 펼친 대대적인 ‘교학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이치는 〈제법실상초〉 강의 서두에서 구마라습을 예로 들어 창가학회가 지향하는 ‘교학운동’에 관해 써 내려갔다.
구마라습은 구자국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불후의 명번역으로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을 남긴 역경가(譯經家)다. 구마라습이 불법의 진수를 전하고자 장안(현재 시안)에서 불전(佛典)을 번역하는 작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때는 쉰 살이 넘어서였다.
그로부터 서거하기까지 8년이라고도 12년이라고도 전해지는 세월 동안 어마어마한 기세로 번역작업을 거듭해, 한 달에 두 권에서 세권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명성을 들은 영특하고 민첩한 젊은이들이 구마라습의 슬하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 수는 때로는 800명, 때로는 2000명이라고도 한다.
구마라습은 청중을 앞에 두고 교전(敎典)을 손에 든 채 강의형식으로 번역을 진행했다.
‘왜 그렇게 번역하는가, 그 경문의 원의(元意)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때로는 질의응답 형식으로 이해할 때까지 해독했다.
구마라습의 번역작업은 혼자 서재에 틀어박힌 채 사전과 씨름하며 난해한 용어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중의 호흡을 직접 느끼며 대화의 장에서 불법을 전개하고 번역했다.
그렇게 해서 거침없으면서도 경문의 본디 뜻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의역(意譯)을 탄생시켰다.
신이치는 이러한 구마라습의 번역방식을 소개한 다음, 힘차게 선언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사상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펼치는 ‘교학운동’도 구마라습과 같은 방적식에 따라, 어서라는 교전을 손에 들고 때로는 강의형식으로, 때로는 질의응답 형식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개인지도 형식으로 사람들의 호흡을 직접 실감하며 대화의 장에서 불법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신이치는 석존이 법을 어떻게 설했는지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천태는 석존의 팔만법장이라는 방대한 교설(敎說)을 ‘오시팔교(五時八敎)’로 판별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정밀하게 체계를 갖춘 교리를 떠올리며 석존도 그 체계에 따라 설법한 듯한 인상을 받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석존의 설법은 궁핍함에 시달리는 서민을 위한 격려였고, 병으로 신음하는 노부인을 등에라도 업을 듯이 동고(同苦)하는 말이었으며, 깊은 고뇌의 늪에 빠진 청년을 따뜻하게 격려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평생의 교화가 끝나고 보니, 차별로 괴로워하며 카스트제도로 고통 받는 대중 편에 서서 불처럼 토해낸 석존의 한마디가 팔만법장이라는 형태로 남은 것이겠지요. 그 점은 철저하리만치 문답형식으로 설한 경문에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른바 석존이 서민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하는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깨달음의 법문을 경전으로 정리한 것이 팔만법장인 것입니다.”
신이치는 니치렌대성인의 방대한 어서도 이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어서는 대성인이 격동하는 나날 속에서 민중 한 사람 한사람과 계속 대화를 나누며 밤낮으로 구제의 손길을 내미신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쟁하며 쓰고 말하고, 쓰고 말하며 투쟁하신 것입니다.
불교라고 들으면 산속에 틀어박힌 정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불교가 발생한 시점부터 이미 실천 속에서 살아 숨 쉬며 민중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 내려온 점에 정통을 잇는 흐름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은 일체중생을 그 중에서도 고뇌에 빠져 신음하는 민중을 구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교학은 민중이 살아가는 나날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하며 행동하는 데에 규범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확신과 신념이 되어 어려움이나 시련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해야 비로소 살아있는 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창가학회의 ‘교학운동’은 현실에서 그런 살아있는 교학을 추진한다.
◇
니치렌불법의 위대한 철리는 창가학회원이라는 서민들 속에서 확고한 철학과 사상으로 활기차게 흐르고 있다.
“강한 사상을 대표하는 한 인간은 강하다.” 이 말은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통찰이다.
우리 동지들은 광선유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해가 다투어 일어나면 “이 법문을 말하면 반드시 마(魔)가 출래하느니라. 마가 다투어 일어나지 않으면 정법(正法)이라고 알지 말지어다.”(어서 1087쪽)라는 글월대로 자신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며 더욱더 강성한 신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도 “정토(淨土)라 함도 지옥이라 함도 밖에는 없느니라. 오직 우리들 가슴속에 있느니라”(어서 1504쪽)는 글월대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경애혁명을 목표로 불도수행에 힘썼다.
병으로 괴로울 때는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쏜가.’(어서 1124쪽)라고 말씀하셨다. 부처의 위대한 생명력이여 샘솟아라!”는 마음으로 강성하게 창제를 거듭했다.
어떤 사람은 “월월 일일 강성해 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는 글월대로 하루하루 자신에게 도전하며 학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일장(一丈)의 도량을 건너지 못하는 자가 이장(二丈), 삼장(三丈)의 도랑을 건널쏜가”(어서 1158쪽)라는 글월대로 목표 하나하나를 향해 착실하고 끈기 있게 전진의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사관(仕官)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295쪽)는 글월대로 열심히 직장 일에 도전하며 승리의 실증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교주석존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라는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고 인격을 연마해 불법의 인간주의를 체현 하려고 분투하는 동지도 있다.
창가학회의 ‘교학운동’에 의해 법화경과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이 생활법으로서 그리고 민중철학으로서 현대에 소생되었다고 해도 좋다. 신이치는 마음속으로 ‘교학운동’의 조류를 더욱 확대해 본격적인 민중불법의 시대를 열고 ‘생명의 세기’를 건설하려고 맹세 했다.
◇
창가학회는 신이치의 제안으로 이해 1977년을 ‘교학의 해’라고 정했다.
신이치가 그렇게 제안한 까닭은 광선유포의 새로운 마디를 맞는 학회가 더욱 크게 비약하려면 모든 동지가 앞으로 더욱더 어서를 심간에 물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렇듯 불법은 그 모든 물음에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한 생명철리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고 교학을 거듭 연찬하는 일은 인생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고 풍요로운 정신이라는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니치렌대성인은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느니라”(어서 1361쪽)고 말씀하셨다.
그 까닭은 신앙을 실천함과 더불어 교학도 함께 배우지 않으면 불법의 근본 취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신심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도 이렇게 강조했다.
“신(信)은 이(理)를 구하며 이를 구하면 신이 깊어진다.”
“교학으로 신심이 강해지고 향상되기 때문에 공덕이 나온다.”
대성인은 “마음이 스승으로는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어서 1025쪽)는 경문을 인용해 불법자가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를 지도하셨다. 교학은 ‘마음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불법의 법리를 배우는 일이다.
교학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행동이 불법자로서 올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척도이며 자기를 비추는 명경이다.
또 교학은 불도수행을 방해하는 삼장사마(三障四魔)나 온갖 난에 번롱되지 않고 일생성불과 광선유포에 다다르는 항로를 비추는 ‘등대’가 된다.
그리고 일체중생에게 부처의 생명이 갖춰진 사실을 비롯해 삼세에 걸친 생명의 인과이법을 배우는 일은 인간의 근본적인 윤리와 도덕의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이치는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며 창가학회의 인간혁명운동을 추진하려면 교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도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학회를 재건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학을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에 새겨 넣는 일이었다.
도다는 전시에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체포된 간부 21명 중에서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퇴전하는 참으로 통탄할만한 일을 체험했다.
가장이 투옥된 가정에서는 생활의 지주를 잃자 먹고 살기도 힘든 사태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반국민적인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비탄에 잠긴 가족이 먼저 신심에 의심을 품고 퇴전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신심을 그만두고 어서 빨리 돌아오세요”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그리고 간부들은 잇달아 군부정부에 굴복했다.
또 투옥 된 사람들도 탄압이 두려워 어리석게도 대다수가 신앙을 버렸다.
출옥한 도다는 만일 모든 사람이 “행해(行解)를 기위 힘쓰면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난다”(어서 1087쪽)라는 구절을 심간에 새겼더라면 법리에 대한 확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분통한 눈물을 흘렸다.
한편 마키구치는 옥중에서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남은 당연하며 경문에 나온 그대로입니다”라고 환희에 넘친 마음을 편지에 담아 가족에게 보냈다.
마키구치의 어서에는 “결국 천(天)도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는 〈개목초〉구절에 빨간색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마키구치는 대난을 만나 어서를 몸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기쁨을 느끼며 순교한 것이다.
또 도다는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곳곳의 모든 불국토에 항상 스승과 함께 태어나느니라)(법화경 317쪽)라는 구절을 가슴에 품고 불이(不二)인 마키구치의 제자로서 옥중투쟁을 끝까지 관철했다.
‘동지가 퇴전한 까닭은 신심에 확신이 없고 교학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두번 다시 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
이렇게 통감한 도다는 교학으로 학회를 재건하려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정월 초하루부터 법화경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관심의 본존초〉 〈개목초〉 〈입정안국론〉 등 어서 강의를 중심으로 인재를 육성했다.
☞ 신.인간혁명 24권 ‘엄호(嚴護)’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