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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루어집니다. / 2023년 9월 3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빌립보서 1:12-30
구원은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마태복음 20장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심판을 받는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이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 즉 죄로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나를 위해 자신이 내 죄를 자기 죄로 짊어지고 십자가에 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다만 불쌍히 여기셔서 거저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집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내 원수가 미국이나 아프리카에 있지는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수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야겠다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로 타락한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혈통이나 외모에 자격을 두고 제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원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어떤 죄든지 용서를 받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에서 우리 앞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과 현재와 앞으로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였고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들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그 은혜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6절에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라.” 말씀합니다.
도저히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자들이, 아무런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아무 것도 한 것이, 한 것이 있다면 죄를 짓고 타락한 것뿐인데도 구원을 받는 그 놀라운 길이 열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공의를 즉 은혜를 믿는 자들이 어떤 죄든지 다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어야 할 죄인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를 들어 80을 넘긴 노인이 평생을 술을 좋아하고 또 많이 먹어서 간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간암이 된 겁니다. 죽어야 됩니다.
간 이식만이 살 길인데 아무도 해 줄 사람도 없고 또 맞지도 않습니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얼마나 산다고 간을 주겠습니까? 그런데 한 청년이 이 노인을 불쌍히 여기고는 자기 간을 주고 싶은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검사를 했더니 이식할 수 있는 간이었습니다.
간 이식을 받지 못한 이 노인은 혼수상태입니다. 죽음의 목전에 있을 때 극적으로 간 이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노인은 젊은 청년의 새 간을 이식받고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그만 간이식을 하고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 노인은 그 모든 사연을 의식을 회복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실제로 있다면 말이 됩니까? 80먹은 노인을 위해 젊은 청년이 자신을 희생하고 죽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간을 이식 받고 다시 살게 되었다면 이 노인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젊고 싱싱한 새 간이 되었으니 평생 해오던 대로 다시 술에 절어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지난날의 무절제한 음주를 교훈을 삼아 간에 무리가 가지 않게 적당히 술을 마셔야 합니까?
무엇이 은혜로 새 간을 이식받고 다시 살게 된 마음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그 노인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고 떠난 그 청년에게 보답하는 길일까요? 그 청년은 어떤 사람인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는지 말입니다.
청년이 노인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제 다시 살게 된다면 술을 끊으시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는 편지였습니다. 이제 노인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이 노인은 이제 그 청년이 남긴 뜻을 받들고 그 청년을 대신하여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에게 자신의 간을 주고 세상을 떠난 그 청년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간은 생명의 일부일 뿐이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고 살게 되었다면 그 청년을 어떻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과거의 습관 때문에 너무 술이 미치도록 마시고 싶을 때가 왜 없겠습니까?
도저히 참지 못하고 술을 입에 넣었다고 차마 마시고 못하고 뱉을 때도 있을 겁니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마실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네 잔이 되면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간은 또 다시 썩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자신과 싸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에 딱 끊어버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넘어져도 자신에게 간을 주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년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면 결국은 옛 습관을 끊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이식받았습니다. 단 1초도 견딜 수 없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천국의 영원한 기쁨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나의 그 징그럽고 부끄럽고 구역질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죄를 다 자기 죄로 짊어지고 나를 대신하여 치욕과 부끄러움과 고통과 심판을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은혜로 말입니다.
십자가의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그 믿음에 믿음의 열매가 없이 여전히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과거에 자신의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던 자아숭배의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고 5장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선언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시는 말씀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의 말씀도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힌 환경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러 번 하는 말이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그것을 본문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구원의 믿음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믿음에 이르는 데까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신이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를 끊어내는 공의로 실현이 되는 것이고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나에게 잘 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판단한다고 하셨습니다. 열매와 나무는 언제나 동일하다고 하셨습니다. 열매가 어떤 나무인지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영에서 나오는 내 인격과 언어와 행실이 내가 누구이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말은 기가 막히게 은혜롭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듣고 배우고 지식이 있으니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이 혼자 있을 때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에스겔 3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우리는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그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싸우는 것을 멈추지 마시고 죽을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죄와 싸워 반드시 승리하여 구원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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