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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낮고 천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 2023년 9월 3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도행전 27:1-12
실력 있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감동이 됩니다. 부드럽고 청명한 고운 목소리가 마음을 사로잡고 고음이 하늘을 찌를 것 같습니다. 나도 저렇게 한 번 불러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의 가창력에 감동하는 것이지 그가 부르는 그 노래의 가사나 사연이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들어도 어떤 내용의 노래를 불렀는지는 모르고 그 내용을 알아도 그 가사가 그 삶에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정말 찬송 한곡만 믿음으로 불러도 우리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고운 목소리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지만 그 가사의 내용이 내 마음과 삶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아주 유명합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최고의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 실력은 감히 흠잡을 데가 없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동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노래를 부릅니다. 발음도 정확하지도 않고 박자도 음정도 불안합니다. 그런데 한 마디 한 단어 그 입에서 나오는 가사가 마음에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그 아련하고 슬픈 이야기가 펼쳐지자 감동이 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수가 있고 실력은 떨어져도 노래만을 돋보이게 하는 가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가수가 진짜 실력이 있는 가수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노래를 만든 작곡가라면 어떤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겠습니까?
결론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내가 만든 노래에 담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수를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작곡가가 노래는 기막히게 부르는데 사람들은 그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오직 가수에 열광하게 한다면 그 사람에게 곡을 주겠습니까?
물론 돈을 많이 벌려면 유명한 가수에게 주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노래의 담은 그 의미를 전달하기 원한다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목회자가 해외의 유명한 대학의 박사학위에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신장에 감미로운 음성에 호소력이 있는 언변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물론 성령님이 역사하면 그를 통해 복음은 전달이 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 목사의 외모를 보고 스펙에 감동할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우리 교회 목사님은 유학파다, 잘 생겼다,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외모가 뛰어난 기상 캐스터가 일기예보를 하면 특히 남자들은 날씨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내일 비가 오니 우산을 챙기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기상 캐스터의 얼굴을 보느라 그가 하는 말에는 관심 갖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시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가수나 기상 캐스터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수는 노래에 기상캐스터는 날씨에 집중하도록 해야 그게 진짜 능력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죄인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자신의 외모나 언변이나 유모나 정치나 세상 이야기가 나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입과 대언자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보다는 자기 자신이 대중들에게 어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 십자가의 낮아짐과 부인과 죽음이 아니면 복음은 전파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죄수의 신분으로 보내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바울은 2년 동안 구류되어 있던 가이사랴에서 드디어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죄수의 신분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바울을 당당한 자유인으로 로마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에는 어땠을까요? 아니! 하나님은 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유대인들의 시기로 붙잡히게 하시고 2년이나 가이사랴에 잡아두시고는 죄수로 만들어 로마에 보내시나?
이런 신분으로 내가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겠나? 자유롭게 다녀야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할 텐데! 뭐 이런 생각은 안 했을까요?
송명희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송명희 시인이 어떤 분인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그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편한 분입니까? 똑바로 걷고 싶고 똑바로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바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 은혜마저 송명희 시인에게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송명희 시인의 그 외침을 통해서 무엇이 드러납니까? 시를 잘 쓰는 그의 문학적인 능력이 드러납니까?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그 고난 중에도 주님을 의지하고 믿으니 오직 주님과 믿음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죽게 하소서.’
김태훈 선교사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분은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가장 유명한 병원에서 전문의를 했습니다. 서울대 의대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수재들만 가는 곳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이 보장된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너를 위해 살았으니 이제 나를 위해 살 수 없겠느냐는 소명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내려놓고 에티오피아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볼 때에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검사를 해보니 파킨슨병이 시작된 것입니다.
안정적인 삶과 자신이 이룬 성공을 다 내려놓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열심히 의술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파킨슨병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고백하는 말이 정말 마음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편하게 쓰시려고 이렇게 나를 낮추셨다는 겁니다.
나를 낮아지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대학을 나온 성공한 의사가 그런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난 의사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한 인간 김태훈에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대단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를 낮아지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날 것이라는 겁니다.
바울을 죄수로 만들어 보내는 것이 이게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큰 은혜가 아닐까요? 내 자신의 이름과 의가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에는 우리는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목사님! 목사님하며 나를 하나님처럼 대하면 최고로 행복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드러나고 나를 인정받는 것을 말입니다. 얼마나 인정받기를 원하면 고래도 칭찬을 받으면 춤을 춘다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이 세상에서 대단했던 자들이 심판대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로 드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정죄를 받고 내게서 떠나가라는 심판을 받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경을 받을 때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큰 능력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얻어도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았으니 바울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로 보였겠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처럼 대했을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증표로 주신 것이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질병이었습니다. 그 질병의 고통으로 바울을 낮추시고 자만하지 말라는 겁니다. 교만 떨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은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아프니까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 바울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결코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바울도 인간입니다. 그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하고 존경만 받다보면 어느 새 자신이 하나님이 돼버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팔아서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겁니다. 우리가 마귀를 몰라서 그렇지 마귀는 상상할 없을 정도로 간교하고 교활하고 사악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아무 것도 아닌 죄수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사로를 병든 거지로 만든 것은 나사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낮고 천하게 보잘 것 없고 하찮게 되어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는 그것이 나에게 주신 저주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받는 사람은 가장 복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다 받은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그 육체의 본능은 이 땅에서 인정을 받고 높아지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높아지면 하나님은 내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와 같거나 내 밑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 때에도 네 의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의가 드러나면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도 금식도 자기 의가 드러나지 않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나를 낮추고 부인하는 그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 드러나시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떻게 오셨는지를 보면 바울을 왜 죄수로 로마에 보내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 힘 있고 강한 모습으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까? 하나님이 뭐는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아들을 어떤 모습을 보내셨습니까? 이사야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말씀합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서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보내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평생 나사렛 예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래야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만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으로 마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함께 영광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을 드러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영광을 받으시는 그 십자가의 길만을 가신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다시 살리시고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어떻게 4살에 중고등학교 수학을 거침없이 푸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잘 생긴 얼굴을 갖고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재능이 많으면 세상을 살기 편할 겁니다. 사랑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믿음에도 천재가 있을까? 분명히 다른 사람보다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던 세례 요한은 믿음의 천재였을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많든 적든 그 믿음을 사용하는 십자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지만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며 나를 부인하는,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믿음은 가장 큰 것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나사로가 큰 자였던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낮아지고 결국에는 죽어 없어지는 오직 내 안에 주님만이 살아계시는 그 십자가의 길로 말입니다. 믿음의 길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십자가의 좁은 길입니다.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그 길입니다.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그 믿음 말입니다.
정말 십자가의 길은 힘듭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빨리 믿음의 싸움을 끝내고 주님께 가 쉬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죽는 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빨리 이 싸움을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압니다. 나를 낮아지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교회에 나와 기도할 때 ‘광야’라는 복음성가를 잘 부릅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이 복음성가를 부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여기까지 오기위해 주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 드라마처럼 짝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도 내가 너를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때리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낮추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때 그냥 참았으면 얼마나 좋았냐고 말입니다. 장로하고 싶다고 하면 그냥 하게 놔두지, 마음이 안 내켜도 그냥 참고 넘어가지, 지금 이게 뭐냐고 말합니다. 저는 가만히 듣고만 있지만 속으로는 그럽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저는 답답합니다. 제가 그때 가만히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모르는 척 넘어갔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 세상의 영광과 힘과 권세와 명예가 내 영혼과 그 구원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받은 고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 고난 자체는 악몽 같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을 돌려놔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고 내 자아를 산산이 깨뜨리는 고난이 없었으면 나는 어쩔 뻔 했나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뭐가 중요한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자아숭배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거지 나사로보다 부자로 살다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타락한 인간들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자아숭배입니다. 부자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러면 거지 나사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거지 나사로로 사는 것이 정말 고통이지만 그러나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만났다면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내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는 십자가의 고난은 내 영혼을 결코 버릴 수 없고 반드시 천국으로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를 나사로로 만드시는 그 낮아짐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말입니다. 지금도 그 십자가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저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내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기에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며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제 인생에서 주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원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백세가 다 되셨으니 정말 오랜 된 일입니다. 연합부흥성회를 인도하는데 아주 강력하게 성령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뒤집어지고 회개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목사는 내가 능력이 있는 줄 착각을 합니다.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를 하는데 이 목사님이 강단에서 보니 두루마기를 입은 한 목사님이 기도하는 성도들 사이를 오가며 앞뒤로 안수를 해주더랍니다. 안수를 전부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을 골라서 안수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한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교인들만 안수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두루마기를 입은 그 목사님이 안수를 해주며 강단 쪽으로 가까이 왔을 때 그 손이 보이는데 그 손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은 즉시 아!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뛰어내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이 목사님은 산에 올라가 울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새벽 집회시간이 되었다고 내려가셔야 한다고 할 때까지 기도한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내가 하는 줄 알고 교만했던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꼼짝 못하는 죄수로 만들어놓고 뭘 하시라고 하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로마에 복음을 충만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도 그렇지 않습니까? 왜 나를 낮아지게 하셨는지, 왜 내게 고난을 주시는지, 왜 고통을 주시는지 내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랑으로 풀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결국은 영원한 저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낮아짐과 고난과 고통을 나를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내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푼다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기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영원히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잠시 내 육신대로 내 마음대로 살다가 영원히 고통을 받는 마귀의 자식이 되어야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