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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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종택)의 관리자 이성원은 안동댐의 건설 이후로 삶터를 옮겨 2대를 옥정동에서 살아왔다. 이용구 선생도 그러했겠지만, 이성원에게도 분천마을은 떠나온 고향만은 아니다. 옥정동 집의 마루에 옛 분천마을을 채색의 화려한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두게 하였던 것은 이용구 선생일 것이다. 그만큼 이용구 선생에게 있어서는 분천마을을 잊을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분천마을에서의 삶은 이용구 선생에게 있어서는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분천마을 이후의 삶은 껍데기의 삶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분천마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남겨 두고 온 이성원 에게 있어서도 그 점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이성원이 『영천이씨 종보』에 실은 「선고 용헌처사 약전」의 서두 부분이다. “선친의 휘(이름)는 용구이고, 호는 용헌이며, 자는 시백이니, 1908년 12월 29일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태어났다. 운곡은 조상들의 선영이 밀집한 곳으로, 일제 침략 초기 조부께서 잠시 역질을 피해 우거(거주)했는데, 그 때 선친이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는 곧 분천으로 되돌아 오셨다. 선친은 학자로서, 그리고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최선을 다한 삶을 보내셨고, 학처럼 단정하고 고결한 삶을 살다가 금년(1998년) 5월 30일 91세의 나이로 영령이 계시는 부내의 뒷산 독짓골의 기슭으로 가셨다.”
운곡에서 태어나 분천에서 살다가 결국 수백 년 조상들이 물려온 기지를 당신의 평생에 물속에 묻고 90 평생을 살아야했던 그 마음이 오죽하였을까? 평생을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산을 수호하는데 바친 삶이라 하니, 분천마을을 떠난 이용구 선생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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庸軒處士略傳 용헌처사약전
1). 선친의 휘는 용구龍九이고 호는 용헌庸軒이며 자字는 시백施伯이니, 1908년 12월 29일(陰),안동시 도산면 운곡동에서 태어났다. 운곡동은 조상들의 선영이 밀집한 곳으로, 일제침략초기 조부께서 잠시 시대의 소요騷擾를 피해 우거寓居했는데, 그 때 선친이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는 곧 분천汾川으로 되돌아 오셨다. ‘분천’(지금 도산서원에서 1km 하류지역 일대)은 일명 ‘부내’라고 불리며,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비견되는 매우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으로,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諱: 李軒)선조께서 입향복거立鄕卜居하고 농암(諱: 李賢輔1467-1555) 선조가 탄생하며, 이후 600여 년을 세거世居한 안동 영천이씨의 ‘고리故里’이다. 선친은 그러니까 입향 선조로부터 20대이고, 농암 선조로부터는 16대 종손이다.
선친은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5형제의 장남으로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한편으로는 종손으로서의 행금行襟과 가업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학문의 세계에 젖어 들었다. 선친은 동생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시키면서도 자신은 초등학교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운명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큰집을 지키는 일상에서 고난하고 고독한 독학의 젊은 날을 보내셨다. 선친이 당신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록한 ‘자명自銘’의 한 부문은 그 무렵의 정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高宗戊申 生于道谷寓舍 先是家君曾以時騷 奉廟移棲于此 居八年而還汾上舊第 試讀七篇傳 庚申冬 遭外憂 癸亥生王考府君下世 不弔昊天 失學迷方 受制倭人” 해석: 고종 무신년(1908년) 도곡에서 태어났는데, 이때 선친이 시대의 소요로 인해 이곳으로 선조 사당을 옮겨 8년을 살다가 다시 분천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비로소 여러 경전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20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23년에는 생가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지만 어디에 하소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하여 배움을 잃고 방황하다가 드디어 왜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선친의 학문에 대한 성실함과 천재적 재능은 20대 약관에 저술로 나타났고, 30대에는 이미 완연한 선비로서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40대에는 경북대, 부산대 등으로부터 여러 번 교수요원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부산대 이상헌李商憲 교수는 더욱 선친을 모시고자 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특수성과, 불천위不遷位 종손은 ‘사랑舍廊을 지켜야 한다’는 당시의 가치관은 선친을 사당祠堂으로부터 떠날 수 없게 하였다. 이 무렵 대현大賢의 종손들은 대부분 집을 지켰는데, 그것은 아마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과 거기에 따르는 고유문화의 심각한 손상이 이들을 직장으로 나설 수 없게 한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집을 지키는 그 자체가 곧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철없는 젊은 날, “종손이라는 업이 아버지의 인생을 망친 것”이며, “종가도 개혁을 해야 한다” 고 거칠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선친은 매우 담담한 표정으로, “지금이 그때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선친은 당신의 사회적 명성보다는 ‘종손’으로서의 책무에 절대적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애는 몰沒하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 사문斯文의 진작과 고가유속故家遺俗의 보수, 그리고 교육과 독서, 저술이 그대로 일상의 전부였다. 그리하여 ‘경敬’을 생활철학으로 삼은, 곧고 기품 있는 단아한 한 학자의 빼어난 생애를 보냈다. 선친의 만년은 경북유림은 물론, 전국유림에까지도 정신적 좌장으로 존재했다. 상례가 끝나고 첫 삭망에 참여하신 대구의 유민裕民 족친께서는 서까래 아래 붙은 ‘파록(爬錄: 장례위원명단)’을 다시 보고 “이 파록은 향鄕 파록이 아니라 진정한 국國 파록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한마디도 가감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 선친은 안동 선비의 전통과 명예를 한 몸에 감당하고 계셨으며, 경북유림의 존장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셨다. 지난해 이용태 삼보컴퓨터 사장이 주관한 재령이씨 영해 도회道會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림행사를 감당했으며, 몰하기 10여일 전 김주현 교육감이 주관한 안동김씨 묵계서원 복향 고유에 선친을 초빙한 도집례 망기는, 교육감이 그 모시지 못함을 필자에게 눈물로 한하셨는데, 그런 유감의 표현은 선친이 사문斯文에서 갖는 비중을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집안에는 그 망기들이 대나무 묶음처럼 쌓여있다. 장례 때 향내 전 가문에서 일제히 조의를 표했음은 물론이고, 계속 답지하는 많은 만사挽辭(죽은 사람을 기리는 추도 시)들이 이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친의 일언일동一言一動은 가식이 없는 안동 처사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잇는 것이었다. 따라서 장례 때 ‘처사處士’라고 명명한 유림의 공론은 선친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며, 병상에서 몇 번이고 “여한餘恨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 역시 한 유학자의 후회 없는 생애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선친의 처사적處士的 생애는 일반의 일상적 삶과는 비교할 수 없다.
2). 선친이 남긴 뚜렷한 자취는 저술과 교육이다. 저술의 업적은 이미 그 제자들이 생전에 선친의 ‘생전문집발간금지’ 엄명을 무릅쓰고, 공부를 핑계하여 원고의 영인본 50질을 발간하여 나누어 가진 바 있다. 여기에는 시, 서, 기문, 상량문, 제문, 봉안문, 묘갈문, 행장 등의 많은 글들이 남아 있다. 글의 전반적 내용의 특성은 전통유가에 투철한 ‘경敬’ 사상이 그 기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지와 행이 일치하는 지고지순한 진인眞人의 생애를 추구하는 것이며, 문학적 저술의 퇴고는 이를 연마, 추구하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했다. 지금 그 글들은 어느 문집, 어느 빗 돌, 어느 정자 등에 남아 오래도록 선친의 이름과 함께 할 것이다.
이런 많은 저술 가운데 특히 서동권 전 안기부장이 부탁하여 쓴 달성서씨 조상의 비문과, 조동한 선생이 부탁한 한양조씨 양경공(良敬公 諱: 趙涓) 신도비문 및 진성이씨 원촌대감(諱: 李孝淳)의 신도비문은 선친이 생시에 매우 흡족해한 명문이었다. 필자가 평소 존경해마지 않았던 향토사학자 서주석徐周錫 선생은 생전에 선친의 글을 보고 “이런 글은 전국에 다시없다, 청명(靑溟: 任昌淳)도 이렇게는 못 쓴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루는 퇴근해 보니,『삼국지』10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들쳐보니 ‘李性源 선생께, 李文烈 드림’ 이라는 사인이 있었다. 놀라 물어보니 선친께서, “낮에 영양 석보 재령이씨에 이문열이라는 사람이 다녀갔다.”고 하셨고, 또 “그 사람이 지금 당대에는 최고 저술가라 하더라.”하셨다. 알고 보니 이문열씨는 그 조부의 『문집』을 만들고 서문을 받기 위해 문화재 전문위원 이정섭 선생의 소개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사로 자신의 책을 내놓고 간 것이다. 한 번 만나고 싶었으나, 그는 글을 받을 때도 역시 부재중에 다녀가서, 나는 알지만 그는 모르는, 전연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책을 선물한 것이다. 물론 선친에게 드린 것이지만. 당대 국문 작가가 당대 한문 작가를 상면하여 ‘글’을 부탁하니, 아무래도 자신의 글(작품)을 바로 내놓기가 어딘가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저술활동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계속된 것이지만, 필자가 지켜본 바로는 지난해 경북의 불천위 명문의 3, 4십대 종손들의 모임인 ‘보인회輔仁會’의 ‘회첩서문會帖序文’을 짓는 것으로 사실상 종료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 글은 짧은 기간에 지었는데, 그때 선친은 나에게 “‘인仁’ 자字가 글제이기 때문에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고 하셨고, 『논어』 안평중晏平仲의 ‘善與人交 久而敬之’의 고사를 원용한 대문에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지은 글은 아마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6월 어느 날, 이 글을 받기 위해 회원들이 한꺼번에 집을 방문해 비디오를 준비하여 글을 읽고 설명하는 장면은 매우 아름다운 정경이기도 했다. 사실 ‘보인회’라는 명칭 역시 선친이 지으신 것이고, 서문 역시 이들이 품의 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때 설명에서 선친은 보인輔仁과 우정友情의 핵심에 ‘통재(通財: 진정한 우정은 재물을 나누어 씀)’를 강조 언급하여, 지금 보인회의 모임을 풍성하게 하는 더 없는 소중한 지침으로 작용한다.
선친은 글을 짓기 시작하면 몇 일간 초고가 나올 때까지 바깥에 기척이 별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두 하셨는데, 이런 모습은 ‘글이 곧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친이 지금 정갈하게 써서 남긴 『용헌만초庸軒漫草』5권의 내용은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것이다. 선친이 타계하자 많은 조문객은 한결같이 “이제 글이 끊어졌다.”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선친은 일생동안 한시도 책을 놓지 않은 대독서가이며, 또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장승호 같은 제자는 ‘컴퓨터 같다’라고 했지만, 선친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친은 아마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지금 전국에 생존한 마지막 고전 이해자의 한 분임에 틀림없었다.
안동시내로 이주한 70년 후반부터 선친의 삶은 저술과 더불어 교육의 장이 펼쳐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무렵은 선친의 학문이 완숙의 경지로 접어들어 안동대학교의 출강과 문집 표점작업, 그리고 전국에서 일반학자, 교수, 학생들이 끊임없이 몰려와 가르침을 받기를 희망했던 때이기도 하다. 한 때는 안동대학교의 김종열, 안병걸, 이병갑, 오석원, 장철수 등 각기 다른 전공의 교수 10여명이 동시에 수강하기도 했으며, 이들이 모시고 간 광흥사, 봉정사, 부석사 등의 여행과, 이후 주승택, 김태안, 오수경교수 등이 함께 한 청량산 등의 산행은 선친의 생애에서 더없이 즐거운 기간이기도 했다.
선친은 배우고자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한 번도 귀찮아 한 적이 없었으며,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가르쳤다. 그리고 한 번도 수강료를 받지 않았으며, 강의 시간 역시 한정을 갖지 않는 헌신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장시간의 강의를 만류하자, 선친은 “내가 기력이 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이렇게라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친은 당신이 알고 있는 학문의 바다를 고귀하게 생각하셨고, 또 이를 알고자하는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번은 교육청에서,
“嶺南巨儒이신 李龍九翁께...(법으로 금하오니) ‘보수 없는’ 敎授들의 講義는 가능하나 課外授業은 하지 마시기 바람 니다.“
83년 안동교육청 사회교육과 ○○○
이런 사신을 겸한 공문이 왔는데, 선친은 그때 나에게 “내가 하는 일이 과외수업이라면 나의 정과수업은 무엇이냐.” 하시어, 모처럼 부자가 함께 웃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다 쓸 수 없지만, 선친은 강직하셨으나 한편으로는 매우 부드럽고 이야기를 잘 하셨으며, 유머스러움이 여간 많지 않으셨다. 젊은 날 선친은 외출을 하고 오시면 꼭 다녀온 전 일정을 밥상머리에서 가족들에게 소상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우리들은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것만은 분명했다. 선친은 배운 적도 별로 없었으나 바둑에는 일가견이 있어, 친구들에게는 좀처럼 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바둑을 두신 것은 전 생애에 다섯 번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잡기雜技’라는 인식 때문이며, 더욱은 자식들이 빠져들까 원려遠慮했던 것이다.
선친의 강함은 부드러움이 있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이런 선친에게 나는 그야말로 필요할 때마다 찾아가 묻곤 했는데, 그 ‘필요할 때마다’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자질 또한 부족하며 학문은 충실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친은 나에게 한 번도 ‘공부해라’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어디까지나 내가 마음을 가다듬고 ‘구기방심求其放心’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이제 선친이 가신 지금 그 앎과 지식을 더 배우고 메모하지 못했음이 가슴에 맺히는데, 이런 심정은 아마 필자의 인생이 마감되는 먼 훗날, 그 날까지도 지워지지 않을 슬픈 각인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교육적 자세와 노력이 계셨기에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가 있어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만 10여명에 가깝고 석사학위를 받은 자는 다 기억할 수도 없다. 특히 임종하기 10여일 전, 병상에 문병 온 권오봉權五鳳, 유창훈柳昌勳, 김원걸金沅杰 선생 등에게 이루어진 1시간 여 강의는 이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기에 족한 것이었다. 이런 생애가 만년에 선친의 학문을 잇고자 하는 모임인 ‘분상학계汾上學稧’의 창립을 가져와서, 문향文鄕으로서의 안동학맥을 잇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분들에게의 병상강의는 마침 5월 20일 강의가 예정되어, 선친에게 그 ‘문목問目’이 전해져 있었고, 선친은 이때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그 문목 첫 번째인『논어』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조항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다가오는 6월 28일, ‘분상학계’의 98년도 정기총회에 회원들에게 보내진 유창훈 선생의 통지서 일부에는 ‘함석函席이 역책易簀하셨다’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이들이 선친에 향하는 존경의 척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 ... 저희들이 無祿하여 依歸尊仰하던 函席이 易簀하신지 이미 數旬이 지났습니다. 저희 汾上同契人이 어찌 痛怛할 일이 아니 겠습니까....“
3). 선친의 집안의 문화유산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선친은 해방과 6. 25를 전후한 계남溪南, 대전大田, 운곡雲谷으로의 피난과 가난, 그리고 계속되는 가화에도 좌절하지 않고 50년대에는 쓰러져 가는 ‘애일당愛日堂’을 중수하고, 농암선조 묘비와 제사를 개수했으며, 60년대는 ‘분강서원’을 복원하고, 종택을 다시 중수했다. 70년대는 안동댐건설로 이들 유적들을 다시 옮겨야하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여러 숭조사업들이 있어 그야말로 영일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해는 노구를 무릅쓰고 ‘자운제사紫雲齋舍’를 다시 보수했으며, 운명하는 그 날까지 문병 온 우리들에게 이를 걱정하셨다. 선친은 적지 않은 선조의 유품을 찾아 정리해 놓았으며,『농암집聾巖集』을 비롯하여,『매암집梅巖集』,『정자동면례일기亭子洞緬禮日記』,『화개석운상기華蓋石運上記』등의 글을 번역했다. 그리고 조부, 증조부 등 불우하게 돌아가신 선조들의 유고를 정리하여 『긍구당세헌肯構堂世獻』이라는 가승家乘을 남기기도 했다.
70년대에 시작된 안동다목적댐 건설은 고향의 소멸과 더불어 멸문적인 상황으로 닥쳐왔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상전벽해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선친께서 진심갈력해 중건한 유적들을 다시 옮겨야 하는 쓰라린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옮기는 일 역시 선친의 몫이었다. 선친은 80노구의 몸으로 그 역사를 감당하셨다. 충분하지 않은 보상금은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600여 년을 살아온 농암종택이 문화재가 아니라는 연유로 그대로 수몰되었으니, 안동댐 당시의 정황은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물의 호수, 댐이 건설되었다. 수마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어린 필자는 당시 슬픈 체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안동댐은 적어도 5개 정도의 하회마을을 수장시켰다고.
이런 경황 중에 ‘도산서원진입로’ 문제가 불거져서 관계당국과 극심한 대립이 야기되었다. 이 문제는 농암선생께서 귀거래 하여 사랑한 분천의 강산들이 도산서원의 진입을 위해 그 허리가 파괴되는 것을 자손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탄원서를 제출하고 치열하게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일 년을 끌어온 투쟁은 ‘국가수용령발동’ 위협으로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되어 버렸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당시 선친의 입장을 옹호하고 직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은 이일선李一善 수자원국장과 내압의 김시박金時璞 어른뿐이었다. 실로 가혹한 시련의 기간이었다.
지금 이들 유적들이 흩어진 것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였다. 혹자는 뒷날 당시의 처사에 대해, 혹은 고향인 도산서원 진입로 부근에 농암선생유적을 집단화하지 않음에 대해, 그 선악을 말하기도 하지만 선친의 인생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혼신을 다한 것이고 최선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한 가난하고 정직한 학자에게 다가온 파천황의 대사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필자는 선친의 당시 처신이 얼마나 전화위복할 좋은 계기로 남아있는가를 조만간 여러 뜻있는 인사들에게 소상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기를 진정으로 희망한다.
선친은 또한 더할 수 없는 효자였다. 선친의 나이 13살, 28살의 나이로 돌아가신 조부의 3년 상을 마쳤음은 물론이고, 60년대는 전주유씨 조모께서 돌아가셨는데, 선친은 60노구로 정성을 다해 상례를 마쳤으며, 3년의 여막廬幕생활을 했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 삭망을 지내고는 부내에서 30리 길의 모란(안동시 녹전면 사천리) 묘소를 다녀왔다. 당시 이 길은 차도 다니지 않았고, 길 또한 험했으나, 선친은 상복에 상장喪杖을 짚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걸어서 다녀오곤 했다. 이런 측면은 물론 농암 선조께서 남겨주신 ‘애일愛日’의 정신을 그대로 잇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때 10대 소년이었는데, 늦은 저녁 돌아와 땀에 젖은 상복을 벗어 사랑마루에 걸어놓고 맛있게 국수를 드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그러나 한 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사실 이 무렵 나는 매달 다가오는 이 날들이 기다려지곤 했다. 왜냐하면 이때 나는 선친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소학小學』등의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런 날들은 선친이 낮에 불러 그 복습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친의 심신이 지친 날, 이날이 나에게는 해방의 날이었던 셈이다.
최근 어느 친구와 ‘전통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우리 집의 전통에는 “효도와 우애와 청렴함이 있노라”고 했다. 그 예를 나는 지금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지만, 사실 선친은 효성과 더불어 형제분들과는 당연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남다른 우애를 전 생애에 걸쳐 나누셨고, 이미 언급했듯이, 그리고 모든 영천이씨들이 그렇듯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생애를 보냈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 종반從班들을 친형제처럼 엮어 주는 끈이 되었고, 직장과 가정에 한 번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은 더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나는 이런 집안의 분위기를 진정한 전통이라 설명했고, 그 역시 수긍하고 매우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조상들이 물려주시고 선친이 그러하셨듯이, 나 또한 이를 행동으로 물려주어야 할 벅찬 과제로 남아 있다.
4). 선친은 학자로서,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최선을 다하셨다. 그리고 학처럼 단정하고 고결한 삶을 살다가 금년 5월 30일(음력 5월 5일), 91세의 나이로 조상들의 영령이 계시는 부내의 뒷산 ‘독곡獨谷’의 기슭(도산서원진입로 입구 옛 종택 뒷산)으로 가셨다. 단아하며 간단間斷없는 한 평생을 보내셨고, 마지막 월여(月餘: 꼭 1달 3일)의 병상생활에서 선친은 입원초기 한복을 입고 문병객을 맞이했으며, 사병임을 자각하고도 임종의 순간까지 그 품위와 단정함을 잃지 않으셨다. 간소한 장례 이외에 특별한 말씀은 남기시지 않았지만, 나는 이 와병기간, 이승을 하직하며 보여주신 선친의 여러 가지 처신과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선친은 평소 너무 큰사랑을 나에게 주셨고, 행동으로 인도해 주셨기에 많은 말씀을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선친은 당신의 생애에 대한 소회와 유지를 ‘자명自銘’이란 글에 간결하고 담담하게 남기셨던 것이다.
운명하시기 두 세 시간 전, 안동대학교 임노직林魯直, 이남식李南植 교수가 문병 와서, 이교수가 “남식 입니다”하고 거듭 말하니, 선친은 부축을 받은 앉은 자세에서 거의 눈을 감으신 채 “이용구라고 합니다”하고는 스르르 누우셨다. 이 한마디, 이 자세가 이승의 마지막 당신의 인사였다. 이런 처신은 대수롭지 않은 행동 같지만, 사실은 선친의 일생을 견지해온 몸에 배인 투철한 유가정신의 결과로, 기력이 남아있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인사의 예를 다한 것이며, 필자를 가장 감동시킨 한 순간이기도 했다.
병상에서 절대 엄금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제자그룹인 분상학계 계원들에 의해 7일의 유림장이 거침없이 논의되었고, 임종이 전해지자 안동향교에서는 전교典敎를 비롯한 향내 8대가문의 대표가 모여 장시간 협의한 끝에 ‘처사處士’로 결정된, 요즈음 보기 드문 커다란 양식의 부고(訃告)의 글이 다듬어졌다. 유림, 서원, 향중의 통지는 여기에서 감당했다. ‘유림장儒林葬’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상가喪家에 문중파록門中爬錄과 더불어 장문의 향중파록鄕中爬錄이 이루어짐은 오늘날의 인물에는 거의 없는 일로서, 우리 집안의 큰 광영이 아닐 수 없다. 한 분의 뚜렷한 학자가 존재했음은 어느 가문이든 수통垂統을 오랫동안 분명히 해주는 찬란한 지남指南으로 남기 때문이다.
선친은 이제 가셨다. 그리고 고인이 되셨다. ‘죽음’의 과정이 있었고, ‘매장’의 순간이 있었다. 이런 기간에 한 인생의 표면적 결산이 있다면, 선친의 생애는 정녕 결산이 있고 의미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비록 고인과는 유幽와 명明이 다른 세계로 갈려 있지만, 영령이 계시어 우리를 지켜보시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필자는 3년 상을 마치는 여막에서, 혹은 그 이후에도 이런 선친의 이력을 두고두고 되새겨 볼 참이다. 나는 지금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여막에는 3개의 액자가 걸려있다. 하나는 삼여재 김태균金台均 선생의 글씨이고, 하나는 이일걸李日杰 박사의 글씨이며, 또 하나는 권기윤權奇允 화백의 그림이다. 삼여재의 글씨는 ‘용헌庸軒’이라는 커다란 전서체의 편액이며, 권화백의 그림은 난蘭이다. 선친은 사랑의 대청에 그렇게 계시면서 진정한 안동선비의 표상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안동일원의 저명인사 37명이 납명하고, 포항공대 교수인 권오봉權五鳳 박사가 쓴 ‘분상학계’의 서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거칠은 약전略傳을 매듭 하고자 한다.
사진: 권오봉 교수가 찍은 사진 사진:권기윤화백의용헌처사스케치
汾上學稧 序文
中國에 宋明儒學이 倡起한 以來 우리 靑丘文化 특히 安東의 君子儒 實學淵源學脈은 偉大합니다. 陶山을 이은 臨川, 屛山, 高山으로 뻗어 내린 文風과 道學은 世世遺傳으로 오늘날까지 東國의 證左를 代表해 주었습니다.
庸軒 李龍九 先生은 朱晦庵, 李退溪의 道學을 中心欽慕하는 儒者이십니다. 居室壁上에 걸어놓은 옛 梅花圖만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簇子에 紫陽, 陶山 兩夫子의 墨梅詩로 畵題하였고, 先先子 洛厓公의 竝題詩序에 當身의 跋文을 갖추었습니다. 특히 孝節公, 文純公,의 遺文을 많이 誦讀하여 一生을 操履指南으로 삼고있는 今世紀 儒家의 師表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西敎가 乘勢하여 우리 學風이 餘地가 없어져버리니 깊이 自省하여 質 높은 옛 儒風의 脈을 다시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先代學風을 振作하고 우리 東方禮義文化를 繼承하기 위하여 汾上學稧를 發起하오니 뜻 있는 분은 稧帖에 納名하여 주시기를 敬望합니다.
一九九六年 陰丙子 正月 初六日
右發起人
徐周錫 金沅杰 柳昌勳 權五鳳 金台均 金源吉 徐守鏞 1998년 6월 26일
孤子 性源 於廬幕 痛哭謹記
<영천이씨대종회 청탁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