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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상적 보편 범죄 중에 간음 계열>의 줄거리 :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역시 제6계명이 살인 계열의 범죄를 금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있습니다. 이 계열의 범죄들은 육체 숭배 현상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에서 뒹굴면 반드시 마음은 육체를 숭배하게 됩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한 쾌락으로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경향입니다. 눈과 귀와 입과 감촉 등으로 얻는 쾌감에 마음이 몰두하는 상태가 됩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에 마음이 휩싸인 채로 하나님을 잃고 살아도 사람들은 그 치명적인 암흑 상태를 전혀 모릅니다.
일상적 보편 범죄 중에 간음 계열
(출애굽기 20:14)
14.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얻어야만 견딜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만족과 기쁨의 원천적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이 땅에 머무르며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간음입니다.
앞서 우리는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범죄의 계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살인 계열의 범죄들을 통틀어서 언급하신 것입니다.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단순히 간음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간음으로 대표되는 계열의 범죄들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살인 계열의 범죄들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이 땅에 머물러 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충돌 현상에서 나타남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간음 계열의 범죄들도 마음이 이 땅에서 뒹구는 동안에 나타나는 것은 같습니다. 다만 간음 계열의 범죄들은 육체 숭배 현상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육체 숭배란 마음이 육체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다른 신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은 채움을 통해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본래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그 대상을 하나님 수준으로 높여야만 합니다. 이러한 신격화로부터 다른 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 마음의 가치는 만물보다 존엄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을 향해서도 마음을 주면 안 됩니다.
한편 이렇게 다른 신으로 삼는 대상 중에 육체가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육체를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가 내 마음에 채움과 만족을 주리라 믿는 것이 육체 숭배입니다. 이러한 육체 숭배에서 나오는 모든 범죄가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 숭배는 마음이 육체의 효용성을 과신함으로 나타납니다. 육체가 내 마음 채움을 위하여 아주 유효적절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과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채움을 위한 육체의 효용성은 육체의 오감에서 나옵니다. 육체의 오감은 쾌감을 만들어 냅니다. 눈으로 보는 기쁨, 귀로 듣는 기쁨, 입으로 먹고 마시는 기쁨, 코로 냄새 맡는 기쁨, 피부로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쾌락을 통해서 마음의 만족을 얻으려는 경향은 육체의 효용성을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육체 숭배입니다. 쉽게 말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할 때 마음이 채워진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에서 뒹굴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마음의 공백을 오감을 통한 쾌감으로 채우려 하는 육체 숭배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 숭배는 너무나 순간적이고 지속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오감을 통한 쾌감에 만물보다 소중한 마음의 채움을 완전히 의존할 때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간음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가 반복될 때 사람의 마음은 육체를 통해 얻는 쾌감에 중독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독 현상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을 강력하게 경고하며 교훈을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을 보면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범죄는 몸 바깥에서 행위의 결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음행 계열의 범죄들은 자기 몸 자체에서 일어납니다. 항상 좋음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이 땅에서 뒹굴면 유독 육체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무언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가 흡수하는 쾌감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육체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과 오감의 능력을 갖춘 육체의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 절대 원칙이 내게서 지켜질 때 마음 채움의 기쁨은 하늘에서 찾게 됩니다. 꼭 전율을 느낄만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좋음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바람과 소망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는 공경을 위하여 활용됩니다.
내가 사람을 상대하든 문제나 사건을 상대하든 그 모습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공경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물건에 대해 설명서를 충실히 읽고 제작자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상대하든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있게 하신 대상입니다. 따라서 그 대상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경입니다. 몸은 이러한 공경을 위해 활용되는 것입니다. 내 몸을 활용하여 공경하며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한 분만의 좋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는 내가 마주하는 모든 대상에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 채움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육체는 마음 채움을 위하여 오감의 기능을 숭배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는 공경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경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내 몸은 하나님 주권의 장갑이 됩니다.
앞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음행에 대해 경고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19절 말씀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주권이 외출 나오신 인격체입니다. 그 성령님이 내 몸을 장갑처럼 끼시고 움직이실 때 나타나는 일이 공경입니다. 우리의 몸은 바로 이러한 공경의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했습니다. 제사로 드려지는 모든 제물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살아있는 채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살아있어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공경을 목표로 활용되는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숭배하면서 오감의 쾌감으로 마음의 만족을 이루려 한다면 그 자체로 범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간음은 몸 자체에 행하는 범죄입니다. 모든 범죄의 결과는 내 몸 바깥에서 발생하지만 간음 계열의 범죄만은 내 몸 안으로 수용됩니다. 내 몸의 오감에서 발생하는 쾌감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인 쾌감만을 위하여 도를 넘는 간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간음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을 보면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이 땅에서 뒹굴며 하나님께로 가지 못한다면 도를 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음이 육체를 통한 쾌감을 붙잡고 의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29~30절을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감의 쾌감으로 만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눈을 움직이고 손을 움직인다면 차라리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버리고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눈의 기쁨, 귀의 기쁨, 손의 기쁨 등 마음에서 육체의 감각을 통한 쾌감을 기쁨으로 추구하는 일이 간음 계열에 속하는 범죄들임을 경고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경고하실 만큼 간음 계열의 범죄들은 그만큼 엄청난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간음 계열의 범죄들은 무척 다양합니다. 눈으로 보는 기쁨, 귀로 듣는 기쁨, 입으로 먹고 마시는 기쁨, 코로 느끼는 기쁨, 피부를 통해 느끼는 기쁨들이 있습니다. 한때 제가 사우나로 체중 조절을 해보겠다는 착각을 갖고 즐겨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나면 마사지도 해줍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육체의 오감에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마음의 만족을 의도하려는 행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하는 마음은 만물보다도 소중하고 존엄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육체의 오감으로 얻을 수 있는 쾌감으로 채우려고 하는 시도는 지독한 범죄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소소한 기쁨은 하나도 없이 살라는 것인가? 너무 무미건조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마음의 만족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전혀 못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를 비롯하여 십계명 전체는 단순히 금욕주의를 향한 의도에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금욕주의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간음 계열의 범죄들을 말하다 보면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인가?’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답답한 마음이 들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지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음 계열의 범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답답하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지 못함에 문제가 있습니다. 체험 이전에 믿음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믿으나 체험에 도달하지 못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도 믿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문제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범죄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함이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론적으로라도 내 마음은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 믿음조차 없기에 체험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교리적 가르침이나 으레 하는 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에서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 세상에 대해 다른 기쁨을 원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론적이나마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확고하게 ‘마음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은 양심이 됩니다. 양심이 된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양심으로 발전할 수 없는 이론에 대한 앎은 지식으로 그칠 뿐입니다.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이론이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양심이 되었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육체의 오감으로 얻을 수 있는 쾌감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간음 계열의 범죄라는 것을 들어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5장 27~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 계열의 범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고, 눈이나 손으로 범죄 할 바에는 차라리 눈을 뽑아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살인에 대해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미워하고 싫어하고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살인 계열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살인 계열의 범죄들을 일상적으로 저지를 수 있듯이, 간음 계열의 범죄들 또한 보편적으로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인 계열과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일상적이고 보편적임을 인정하고 나면 십자가 생활화에서 획기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죽어야 하는 포인트가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이는 곧 촘촘한 십자가 생활화로 이어집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가능성과 확률도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수없이 많은 순간에 붙잡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시간을 몇 배, 몇십 배로 늘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살인 계열의 범죄들과 간음 계열의 범죄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도둑질 계열, 거짓 증거 계열, 탐심 계열의 범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을 인정하고 진단할 수 있다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의 양은 몇 배, 몇십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을 노리고 십계명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간음 계열의 범죄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답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답답함은 하나님이 유일한 만족임을 모를 때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 계열이나 간음 계열을 비롯한 나머지 모든 계열의 범죄들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금욕주의로 옥죄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무조건 하나님이 우선이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늘로 가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주님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붙잡으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감조차도 하나님의 기쁨으로 얼마든지 수행해 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으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저 답답해집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들을 찾아낼 수 없다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쾌감을 추구하려는 성향에 마음이 끝없이 휩쓸리는 것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 자체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십계명은 금욕주의가 아닌 하나님 우선주의를 주장하고 있음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활동 또한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면 얼마든지 부부 관계도 가질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눈으로 재미있는 것도 볼 수 있으며, 귀로 아름다운 것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사우나에 가서 찌뿌둥한 몸을 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는 상태라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감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육체 숭배의 경향을 죽이고 하나님을 먼저 찾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열망함이 유지된다면 얼마든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을 해도 됩니다. 우리 육체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 또한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찌뿌둥하면 이상하게 마음도 찌뿌둥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때 마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쾌감으로 마음을 채우고 만족고자 합니다. 찜질방에 가서 몸을 개운하게 하면 마음도 개운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함을 알면서도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서 육체를 숭배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처럼 몸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적 상황에서도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동안 육체에 달라붙어서 오감을 통해 느끼는 쾌감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육체의 오감이 주는 쾌감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거의 자동으로 몸의 느낌을 마음으로 흡수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중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의 상태를 따라감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육체와 붙어서 하는 모든 활동은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됩니다.
몸이 찌뿌둥할 때 찜질방에 가서 뜨끈하게 몸을 지져야 마음도 시원해진다고 여기는 것은 중독입니다. 사실 몸이 아무리 찌뿌둥해도 마음은 시원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얼마든지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오히려 찌뿌둥했던 몸도 마음을 따라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부족함을 육체의 오감을 통한 쾌감으로 채우려고 함이 반복된다면 마음은 육체 중독 현상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과 육체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느끼는 불쾌함을 마음이 그대로 느낍니다. 육체가 찌뿌둥하면 마음도 찌뿌둥해지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압니다. 육체가 배고프면 마음도 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취미 생활을 해야 마음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육체에 중독된 것입니다. 중독되다 못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묶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오랜 세월을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마음의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기간이 길었던 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으로 얻는 쾌감, 귀로 얻는 쾌감, 코로 얻는 쾌감, 입으로 얻는 쾌감, 피부로 얻는 쾌감에 마음이 중독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오감을 통해 얻는 쾌감에 목숨을 거는 현상까지도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만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기껏 육체의 오감을 통한 쾌감에 몰두하다 보니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선을 넘고 도를 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부터 오감의 쾌감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은 마음이 육체의 오감을 통한 쾌감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만족이 안되는 것을 알았다면 오감을 통한 쾌감을 마음에서 떼어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점점 더 오감을 통한 쾌감에 집중합니다. 그러는 중에 선을 넘고 도를 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타나는 범죄들의 대표를 간음이라고 정하시고 간음 계열의 범죄들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는 쾌감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중독 상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중독 상태는 우리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또 육체의 오감을 통한 쾌감에 마음의 만족을 의지하려고 하는구나.’라고 간음 계열의 범죄 순간을 포착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마음은 육체로 사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먼저 가게 해주시옵소서. 내 마음을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셔서 아버지를 직면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직면하여 이 세상 것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내 육체를 활용해 주시옵소서. 오감의 느낌과 쾌감도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대로만 주어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이 육체의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죄악 됨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효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죄의 깊이와 죄의 무게와 죄의 강력함을 깊이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십자가는 해방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게 됩니다.
얼마나 깊이 중독되었는가를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깊이 중독된 죄의 상태를 십자가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깊이만큼 십자가는 나의 마음을 뚫고 들어와서 죄의 뿌리를 제거해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직면하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오감의 기능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살아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들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며 냄새 맡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피부로 접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오감을 통해 느끼고 육체를 통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의 표현이며 감사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십계명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우선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지금보다 몇 배 더 촘촘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 우선주의가 온전히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경고성 계명 배후에 숨어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복음적 의도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러한 계열별 범죄들에 대한 인식이 또렷해짐으로써 아버지를 향한 필수적 십자가 생활화가 더욱더 촘촘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